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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⑥ 비버의 수난사
[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⑥ 비버의 수난사
  • 송명견(동덕여대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 mksongmk@naver.com
  • 승인 2022.12.2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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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들어 모피가 성직자의 대례복이나 귀족의 사치품이 되면서 비버의 몸 값 천정 부지
유럽이 비버를 찾아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해 '인디언의 친구' 비버의 생명을 물품과 교환
모피 장사로 큰 돈을 번 애스터의 증손자가 세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모래성 운명

인간의 '돈'에 대한 집착은 예나 지금이나 끝이 없어 보인다. 돈 때문에 무자비한 살생이 자행되고, 인간의 운명과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비참한 소용돌이 속에서 '패션'이 한 줄기 흐름을 주도했다는 점이 왠지 역사 앞에 미안하다.

처음으로 수난의 표적이 된 것은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비버였다. 태고부터 보온용으로 이용되던 모피가 중세 들어 성직자의 대례복이나 귀족의 사치품이 되면서 갑자기 비버가 귀하신 몸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580년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비버 털모자(beaver hat)가 유행하면서 비버의 비극은 절정에 이른다.

비버 가죽은 양가죽보다 120배나 비싸졌고, 비버 모자는 유산 상속 목록에 오를 정도였다. 비버 그 자체가 돈이었다. 이 '돈' 때문에 비버는 씨가 마르게 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비버를 찾아 북아메리카까지 쫓아갔다. 비버가 북아메리카 탐험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곳 인디언들은 그동안 친구로서 사이좋게 살아온 비버의 가죽을 벗겨 위스키, 손도끼, 총, 화약 등을 받고 교환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원하는 비버 가죽과 인디언들이 원하는 물품의 교환은 비버뿐만 아니라 인디언에게도 어둠을 닥쳐오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영국인들이 비버를 찾아 슬그머니 발을 들이밀더니 결국 남의 땅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역사는 영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와중에 '캐나다'라는 국가가 만들어졌다. 캐나다의 상징 동물로 비버를 쓰는 것도, 비버 모자가 세계사를 다시 썼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캐나다는 영국령이 되었다. 비버는 더 많이 죽었고, 원주민들도 삶의 주도권을 잃어갔다. 먼저 퀘벡 지역에 자리를 잡았던 프랑스인들은 이 역사를 거부했다. 그들은 '또 하나의 프랑스'를 고집하며, 영국과의 분리를 아직도 꿈꾸는 앙금이 남아있다.

1580년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비버 털모자(beaver hat)가 유행하면서 비버의 비극은 절정에 달았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이런 비극이 누군가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축복이 되기도 했다. 허드슨 베이 컴퍼니(Hudson Bay Company)는 캐나다 북동부 허드슨만 지역에서 생산되는 비버 모피 등을 영국이 독점 교역하기 위해 1670년 설립한 회사다.

1730~1750년 사이 영국으로 송출한 비버 가죽이 1백만 마리를 넘을 정도로 재미를 보았다. 이 회사는 200여년간 이 지역에서 정부나 다름없는 영화를 누렸다.

비버의 크기가 기준이 되는 토큰을 만들어 모피 무역에 사용하기도 했다. 시류에 따라 사업 내용을 바꾸어가며 'HBC'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존 자코브 애스터(John Jacob Astor)도 '비버의 축복'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1700년대 후반 미국 뉴욕으로 이민 와 고생 끝에 모피 장사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성공하자 1808년 '아메리카 모피회사'를 세웠고,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로 등극했다.

덕분에 그의 후손들까지 2세기가 넘도록 귀족(?)의 삶을 누렸다.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을 애스터의 증손자가 세웠다. 거의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던 비버의 피 값으로 말이다. 그 가문의 상징이 비버이고, 호텔에도 그 문장이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7년 3월 이 호텔도 그동안의 영화를 역사 속에 묻으며 문을 닫았다. 비버의 핏값으로 딴 열매는 결국 이렇게 사라졌다.

그렇게 비버가 지구상에서 멸종 위기를 맞던 1797년, 런던에서 모자 판매점을 하던 존 헤더링턴(John Hetherington)이 실크햇이라는 새로운 모자를 만들어냈다. 비싼 비버가 아닌 실크 모자였다. 이 모자가 유럽에 퍼지면서 비버는 거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비버 이후에도 밍크, 여우, 친칠라, 앙고라토끼, 라쿤 등 아름다운 털을 가진 모든 동물이 지속적으로 살육당하고 있다.

동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며 '동물의 털을 입지 말자'는 캠페인이 일고 있다. 명품 브랜드들까지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퍼 프리(Fur Free)'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과연 이 갸륵한 움직임이 인간의 탐욕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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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견(동덕여자대학교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송명견(동덕여자대학교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송명견(동덕여자대학교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40여년 동안 옷에 대해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의생활문화 전문가. 그 과정에서 '옷이 곧 사람이고 역사'라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글을 쓰는 '옷 칼럼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다. <패션 인사이트>를 시작으로 <아시아경제신문> <농촌여성신문> <강남 라이프>(서울 강남구청 소식지)에 동서고금의 옷과 패션산업을 주제로 글을 연재했다.

또한 <기능복>(1998년, 공저)부터 <바느질하는 여인이 그립다>(2006년), <옷, 벗기고 보니>(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 선정), <옷은 사람이다>(2014년), <옷으로 세상 여행>(2018년) 등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오늘도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회의 모습과 시대적 가치'를 찾고자 고민한다.

서울대학교 농가정학과를 나와 이화여대에서 석사를,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임하며 일본 문화여자대학 연구교수, 영국 맨체스터대학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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