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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⑪볼셰비키의 득세
영화로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⑪볼셰비키의 득세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7.1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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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월혁명후 임시정부는 온건 … 10월혁명후 독일과 강화조약
당시 美國은 경제난 허덕여 … 전쟁이 길어지자 미국경제는 활황세

윌슨의 대통령 취임에서 참전 요청 연설까지의 한 달 간 러시아의 상황을 보자.

러시아는 새로운 대통령을 맞은 미국보다 훨씬 더 바빴고 격렬했다. 윌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날은 1917년 3월 4일. '러시아 2월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위와 폭동이 있었던 것은 이로부터 4일 뒤인 3월 8일에서 11일 사이다.

3월 11일에는 러시아 의회인 두마의 의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꾸려졌고 3월 15일에는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러시아혁명에 결정적 계가가 됐던 레닌의 귀국은 이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16일(구력 4월 3일)의 일이었다.

물론 레닌은 일찌감치 전쟁불참을 선언했지만 이것이 실현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1917년 11월 그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러시아 정계에는 두 개 핵심 세력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러시아 의회인 두마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와 노동자와 병사들이 선출한 지방 평의회를 의미하는 소비에트였다.

2월 혁명 직후 국가정책은 임시정부가 이끌었다. 중요한 것은 이 임시정부의 입장이 비교적 온순했고 보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로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이 이끌었으며 이전까지의 외교정책 노선을 크게 바꾸지도 않았다. 임시정부는 여전히 영국,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독일에 대항해 유럽의 전장을 지키는 것도 여전했다.

결론적으로 윌슨이 참전을 선언했을 무렵 러시아는, 비록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기는 했어도, 대외정책만큼은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그때도 미국의 친구의 나라였던 영국과 친구였던 것이다. 상황이 급변했던 것은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탈취한 이후였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Brest-Litovsk Treaties)'으로 불리는, 러시아가 독일 등 동맹국들과 체결한 강화조약을 보라. 이 조약은 1918년 3월 3일 체결된 것으로 윌슨의 참전 연설 뒤 1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뤄졌다. '음모론'을 무조건 비판할 일은 아니겠지만 간혹 역사적 사실의 전후만 잘 따져도 무너져 내릴 논리가 있어 아쉽다.

■ 개전(開戰) 5일 째 美 증시 폐쇄

결국 윌슨의 연설을 통해 살펴 본 참전의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한전에 따른 미국의 직접적 피해,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국의 땅을 멕시코에 돌려주겠다는 독일의 약속 등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대외 정책에서 진짜 중요한 이유는 잘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또한 윌슨이 내건 전쟁참여의 명분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 연설에서 거론되지 않은 진짜 참전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게 뭘까? 적잖은 연구자들이 경제적인 이유를 든다. 경제적인 이유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윌슨의 1차세계대전 참전이 진정 경제적인 이유 때문일까.  이제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이를 위해서라면 전쟁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론 천노(Ron Chernow)의 책 『금융제국 J.P.모건』에서 가져 온 다음 인용을 보자.

"전쟁 선언이 나온 지 나흘째인 1914년 7월 31일 밤사이에 엄청난 매도 주문이 쌓였다. 매도 주문이 뉴욕 증권거래소 거래 시작과 함께 쏟아져 나온다면 시장은 붕괴될 게 뻔했다. 걸출한 시장 조정자 피어폰트 모건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지만 1907년 패닉 기간 동안 제대로 훈련 받은 헨리 데이비슨이 있었다. ······ 데이비슨은 주요 은행가들을 소집했다. ······ 잭도 그날 회동에 참석했지만 회의를 주관한 사람은 헨리 데이비슨이었다. ······ 휴장 결정은 매매 개시 수 초 전에 내려졌다. ······ 매매 시작을 알리는 종을 막 치려고 하는 참에 휴장 선언이 내려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잘 알려진 대로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ㆍ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됐다. 유럽 증권 시장이 문을 닫은 것은 하루 지나서였다. 다음날 러시아 차르가 100만 동원령을 내리자 자산을 찾으려는 투자자들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팔자' 주문에 더 이상 시장을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여파는 곧 미국으로 넘어왔다. 유럽에서 자산을 뺄 수 없었던 투자자들이 대거 미국 시장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시장에는 위기감이 넘쳤고 마침내 '휴장'의 결정을 내리고 만다. 위에서 인용한 미국의 저술가 론 처노(Ron Chernow)의 말에서 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더 중요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미국경제가 위기징조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로 금융시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들어 잠시 호황을 보이던 미국경제는 1907년의 위기에 이어 1913년 12월 연방준비법의 통과 및 연방준비제도(FRS)의 탄생으로 또 한 번의 위기를 겪는다. 중앙은행의 등장으로 난립하던 지방은행의 폐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기 두 달 전인 1914년 6월에는 반(反)기업적 정서가 강화된 독점금지법인 '클레이튼 법(Claton Act)'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기업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1914년 7월 31일 폐장된 미국 증권거래소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투자자들.
1914년 7월 31일 폐장된 미국 증권거래소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투자자들.

그러나 전쟁이 미국에 엄청난 혜택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공포에 떨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니 모든 게 기우(杞憂)였음이 드러났다.

전쟁 초기 급속하게 쪼그라들었던 수출도 되살아났다. 영국이 북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상황이 급반전했던 것이다. 특히 농산물 수출이 대박을 쳤는데 1914년 12월에서 1915년 4월 사이 미국의 밀 수출량은 35억2800만 리터로 이는 한 해 전 같은 기간보다 5배가 늘어난 분량이다. 미국을 빠져나갔던 금도 '안전한 나라' 미국을 다시 찾았고 3개월 뒤에는 증시도 다시 개장됐다.

전쟁특수는 전쟁 초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이 누리는 혜택은 더욱 커졌다. 대부분의 참전국은, 처음에는, 이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전쟁의 양상이 '참호전'이라는 방어전으로 돌입하며 길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주로 서유럽에 국한됐던 전장(戰場)이 동유럽과 중근동, 나아가 동아시아로까지 확장됐다. 전쟁이 참여한 나라들의 산업은 참혹해졌지만 그럴수록 미국의 산업은 확장됐고 부(富)는 축적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미국은 이제 세계 헤게모니의 중심국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역 부문이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무역 규모는, 당연히, 커졌다. 수출과 수입 모두 늘었지만 특히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인 것은 경상수지 규모다. 일단 수출을 보자. 전쟁이 발발했던 1914년 23억 달러였던 미국의 상품수출액은 1915년 27억 달러, 1916년 43억 달러, 1917년에는 62억 달러로 3년 사이 2.7배나 늘어났다. 반면 수입은 같은 기간 동안 19억 달러에서 27억 달러로 1.4배 증가했을 뿐이며 따라서 경상수지 흑자 규모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1914년 4억 달러에 불과했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917년 36억 달러로 무려 9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수출의 증가, 경상수지 흑자 규모의 증가는 당연히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전쟁이 장기전ㆍ총력전으로 기울었던 만큼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엄청난 물자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자국 내 생산시설과 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결국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 상당 부분을 미국이 충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농업 외에 군수산업 또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베들레헴 철강과 듀퐁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베들레헴 철강의 최대 전함 수주량은 1000만 달러 수준이었지만 전쟁이 터지자마자 영국으로부터 1억3500만 달러어치의 주문을 받았다. 중소 화약제조업체였던 듀퐁은 전쟁 중 연합국 군수물자의 40%를 생산하며 떼돈을 벌었다.

전쟁 발발 직후 폐장됐다가 그해 겨울 다시 개장한 미국 증시도 활황이었다. 그냥 '활황'수준이 아니었다. 역사상 최고의 호황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폐장 무렵 60에도 미치지 못했던 다우존스지수는 개장 직후 100에 육박했으며 이 수치는 미국이 참전을 선언했던 1917년 4월까지 계속됐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1914년 개장 직후 81달러였던 자동차 기업 제너럴 모터스의 주가는 1년 뒤 500달러를 넘어섰고 같은 기간 철강회사 베델레헴 철강은 46달러에서 459달러로, 채광ㆍ제련기업 아메리칸 스멜팅(American Smelting)은 56달러에서 108달러로 올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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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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