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에게 몰려 벼슬을 떠나게 된 사마광은 왕안석의 용인술 질타
내세우는 개혁의 뜻이 아무리 좋아도 무능한 이들과 도모하면 실패
세계사에서 성공한 개혁이 많을까, 변질되거나 실패한 개혁이 많을까? 모르긴 몰라도 후자이지 싶다. 이를 두고 『중국 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리궈원 지음, 에버리치홀딩스)의 저자는, 중국사에서 유신·변법·개량·개혁 등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왕망·상홍양에서 캉유웨이·량치차오·담사동까지의 공통점은 그만한 그릇이 못 되었거나 인격적 결함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위선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개혁가, 왕안석'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왕안석은 송나라 신종 때 재상으로, 보갑법 등 부국강병을 위한 '신법'을 추진하다 결국 좌절한 개혁가로 흔히 평가된다. 한데 지은이의 평가는, 글의 제목에서 보듯 많이 다르다.
봄에 농가에 저리로 대출을 해준 다음 가을 추수 후에 갚도록 하는 청묘법을 보자. 왕안석 개혁의 핵심 중 하나였던 이 정책은 그 자체로는 타당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관에서 청묘전을 빌려 나오는 백성들을 유혹해 술을 마시게 하여 빌린 돈의 20~30%를 탕진하게 하는 주막이 들어서 창기까도 동원해 꾀어내는" 폐해가 벌어졌으나 왕안석은 그 지적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런 고집불통이, 개혁정책의 지지자가 될 법한 인물들까지 등 돌리게 했으니 이른바 '그릇'이 되지 않았던 사례다.
능력 말고 인성 자체도 문제가 많았다. 왕안석의 출사(出仕)를 끌어준 이는 구양수였다. 자신과 더불어 당송 시대 문장이 뛰어난 이를 가리키는 '당송팔대가'로 꼽히는 바로 그 사람이다.왕안석은 아직 출세하기 전에 구양수에게 "저는 어리석어 선생님의 높으신 문에 따라가고자 노력한 지 오래되었으나, 애당초 흠이 많고 비천한지라 스스로 깨우칠 수 없었습니다"라고 납작 엎드린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그가 권세를 잡자, 구법당을 이끄는 정적인 구양수를 소동파 등과 함께 헌신짝처럼 내쳤다.
무엇보다 왕안석의 최대 패착은 사람을 제대로 쓸 줄 몰랐다는 점이다. 그의 오른팔 격인 인물로 여혜경이란 이가 있다. 그가 득세할 때 여혜경에게 "위에서 모르게 하라"란 단서를 붙인 편지를 보낸 적이 있으니 이는 황제를 의식한 말이었다. 그러나 여혜경이 이를 황제에게 그대로 넘겨주는 바람에 왕안석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왕안석에게 몰려 벼슬을 떠나게 된 사마광이 "왕안석은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옳은 것이요, 그르다 여기면 그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를 가리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이라 일컫고,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자를 가리켜 간사한 모리배라 일컫습니다"라고 상소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내세우는 개혁의 뜻이 아무리 맑고 좋아도, 스스로 모자란 이가 부패하고 무능한 이들과 더불어 일을 도모하면 어찌 되는지는 왕안석 이후 송나라가 급속히 패망의 길을 걷게 된 사실이 실증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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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