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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대화' 몸부림 엿볼 수 있는 '관세박물관'
'조선의 근대화' 몸부림 엿볼 수 있는 '관세박물관'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09.23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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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맺은 '불평등'강화도조약을 뜯어 고치면서 부산에 첫 세관 설치
관세업무 낯 설었던 조선은 독일인 뭴렌도르프를 '초대 관세청장' 임명
산업혁명 후'관세 갈등'은 보호무역 주의와 2차세계대전 빌미가 되기도

 요즘 미국과 중국간 '관세전쟁'이 한창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이 터무니 없는 밀어내기 수출로 미국의 무역적자가 쌓이고 있다면서 중국산 수출제품에 높은 관세를 물리자 중국도 미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높이는 등 맞불을 놓고 있다.

 이런 관세전쟁의 이면에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싸움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중국이 3조 달러가 넘는 막대한 외환 보유고를 앞세워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힘을 과시하자 미국이 중국 길들이기에 나선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1885년 인천 해관이 당시 관세업무를 총괄하던 뭴렌도르프 총세무사에게 보낸 보고서(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4호) . 당시는 세관이 아니라 해관(海關)으로 불리웠다. 사진=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1885년 인천 해관이 당시 관세업무를 총괄하던 뭴렌도르프 총세무사에게 보낸 보고서(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4호) . 당시는 세관이 아니라 해관(海關)으로 불리웠다. 사진=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관세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같은 '관세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산업혁명 후 영국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산업화 산물인 영국산 제품들이 유럽전역에 넘쳐났다.

우리나라 초대 관세청장 격인 총세무사의 일을 봤던 독일인 조선관리 뭴렌도르프. 그는 세계정세에도 밝아 고종의 외교자문역도 맡았다.
우리나라 초대 관세청장 격인 총세무사의 일을 봤던 독일인 조선관리 뭴렌도르프. 그는 세계정세에도 밝아 고종의 외교자문역도 맡았다.

좋은 물건이 나오니 유럽은 국경을 허물어 자유무역을 구가했다. 하지만 공업 선진국인 영국의 배만 채운다는 비판이 대두되면서 독일과 프랑스 등이 관세를 세게 물리기 시작했다. 미국 역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매겼다.

관세의 장벽이 쳐졌고 '보호무역'이 대두됐다. 이에 영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32년 자유무역정책을 포기하고 영연방 특혜관세 제도를 도입했다. 이를 계기로 진영간 무역전쟁이 확산된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을 부른 하나의 원인이 됐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언제 관세제도가 도입됐을까. 근대적인 관세는 구한말 미국,·영국,·일본 등과 통상조약을 맺고 부산 ·인천 ·원산항의 빗장을 풀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관세제도가 낯설어 처음 관세업무를 총괄한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독일인 뭴렌도르프가 엄밀히 따지면 우리나라 초대 '관세청장'이다. 청나라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1882년(고종 19년)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관리가 됐다. 그 때 직책이 통리아문의 참의(參議)다. 세관업무를 총괄(총세무사)했다. 그의 자취는 서울 강남 서울본부세관에 자리 잡은 ‘관세박물관’에 남아있다.

구한말 대영제국과 맺은 통상조약 내용.
구한말 대영제국과 맺은 통상조약서(한문판).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885년 인천해관이 뭴렌도르프에게 보낸 업무 보고서다.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조선인 세관원을 채용해 통보한 발령장도 있다. 세계 정세에 밝았던 그는 고종의 외교 고문역까지 했다.

조선의 근대화 작업에 적짆은 이바지를 했다. 청나라의 눈 밖에 날 정도로 저물어가는 조선 왕조의 국권을 지키는데 일조했다. 청나라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부딛히자 러시아와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도록 도왔다. 조선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청나라는 외무협판에 재직 중인 그를 해임하도록 조선에 압력을 가했다. 동양학에 심취했던 그는 해임된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중국 영파(寧波)에서 숨졌다.  관세박물관은 그래서 ‘조선 근대화 몸부림’의 흔적을 살필수 있는 곳이다. 관세청 개청 30주년을 맞아 2000년 8월 30일 개관했다.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빼앗긴 관세주권을 되 찾기위해 1878년 첫 세관을 만든 과정부터 근대 관세청의 역사를 모았다.

해방후 우리나라는 관세업무를 국제통상의 눈높이 맞춰 정비했다. 1952년 세관원들이 갖고 다니면서 볼수 있도록 만든 휴대용법령집.
해방후 우리나라는 관세업무를 국제통상의 눈높이 맞춰 정비했다. 1952년 세관원들이 갖고 다니면서 볼수 있도록 만든 휴대용법령집.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했다. 조선은 관세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고 일본정부의 요구대로  ‘무관세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일본상인들은 무차별적으로 일본제품을 들여와 장사를 했다. 무역적자가 커졌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관세 재협정을 맺지 않을수 없었다. 이 때 뭴렌도르프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1878년 9월 28일, 부산 동래부사 휘하에 있던 두모진에 해관(海關)을 설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이다.

1945년 해방 후 우리나라는 관세업무의 제도와 법령 등을 대폭 재정비해 국제 통상 규범의 눈높이에 맞췄다.1952년 휴대용 세무법령집도 이곳 관세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밀수품을 단속하는 기법과 장비도 시대에 따라 정리해 놓았다. 짝퉁 밀수품도 전시해 관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젠 자취를 감춘 전국 관세청의 옛 건물 모형도 있다. 세관원의 복장은 물론 그들이 사용하던 도장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관세박물관에는 짝퉁 밀수품도 전시돼 있다. 이 박물관에는 밀수단속을 위한 장비도 시대별로 나눠 정리돼 있다. 사진=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관세박물관에는 짝퉁 밀수품도 전시돼 있다. 이 박물관에는 밀수단속을 위한 장비도 시대별로 나눠 정리돼 있다. 사진=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문을 연지 20년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박물관 관리는 소홀해 보였다. 우선 관람객들을 안내하는 상주 인원이 없었다. 입구가 닫혀있어 서울본부세관 청사 내부에서 일하는 안내원이 박물관의 위치를 가르쳐 줬다. 관세청 관계자는 "간혹 단체 관람객들이 오긴 하지만 평소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 박물관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관세=영어표현이 ‘customs’로 붙여진 이유가 있다. 옛 부터 관습(custom)처럼 내던 세금이었던 것이다. 원래 일종의 통과세였다. 국경선을 넘나드는 화물에 부과되는 국경관세가 일반화하면서 관세는 무역정책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자국의 국익을 최대화 하기 위해서 지금도 관세를 무기로 삼는다.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WTO(세게무역기구)체제아래서도 관세 주권은 인정된다. 세아프가드(safeguard)란 제도가 있는데 특정품목의 수입이 급증해 자국의 업계가 중대한 어려움에 빠질 경우 GATT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맹국이 발동하는 긴급 수입 제한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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