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간에 노니는 사람 마음도 붉어져 인홍(人紅)…만산홍엽의 주요 색깔도 붉은색

#가을은 참 알 수 없다. 티 한 점 없이 쨍한 짙푸른 하늘을 보면 이태백의 활달무비(豁達無比)한 기상 같다가 어느 결에는 더블린의 하늘처럼 잔뜩 찌푸린 채 음산해지며 압생트(absinthe)에 취해 귀를 자른 고흐의 음울한 속울음이 되고 만다.
그런가 하면 알맞춰 부는 바람에 한껏 붉어진 입새들의 춤사위를 연출할 땐 완숙한 홍상(紅裳)의 경쾌한 태(態)인 듯싶다가도 귓전이 쌩하게 몰려오는 된새를 맞닥뜨리면 그 앙칼지기가 괴기영화 속 천년의 한(恨)과 다름없다.
봄부터 여름을 거치면서 쌓인 숱한 영광과 고난의 혼재된 흔적들이 마지막 총정리를 하면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지문의 잔상들이리라.
#그렇다면 가을의 빛깔은 무엇일까. 물론 그 심상(心相)의 깔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거죽으로 비치는 컬러는 눈으로 안다. 바로 단풍(丹楓)이다. 단풍은 본디 단풍나무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가을에 자연, 특히 나무와 풀들을 물들이는 현상을 뭉뚱그려 담아내는 표현으로 뜻이 넓혀졌다.
가을이 되면 흔히 쓰는 상투어 정안홍엽(征雁紅葉), 만산홍엽(滿山紅葉)의 '홍엽'도 단풍의 다른 이름이다. 이같이 단풍의 주된 색깔은 붉은색이다. '단(丹)'자는 붉은 염료인 단사(丹砂)를 정제하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단사는 매우 붉다. 그래서 丹이 붉다는 뜻을 갖게 됐다. 단청(丹靑), 일편단심(一片丹心)처럼. 또 '풍(楓)'자는 '木'과 '風'이 결합해 '바람나무'를 나타낸다.
잎이 바람에 쉬이 살랑거리고 잘 떨어지며 부메랑을 닮은 씨앗은 빙글빙글 멀리 날아가는데, 가을이 돼 쌀쌀해지면 유난히 붉게 물드는 특징이 있어 丹의 대표식물로 '丹楓'이 됐다.(*한데, 정작 중국에선 단풍나무는 '척(槭)'자로만 쓰고, '楓'자는 알팅기아(Altingiacea)과의 '풍나무'를 뜻한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의 용례 때문인지 요즘엔 두 가지를 다 쓴다).
단풍나무는 우리 고유어로 '신나무'라 한다. '신나무'는 옛말로 '싣' 또는 '싣나모'라 하던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신나무는 다른 나무이다. '싣나무'의 형태와 의미가 다 변해 생긴 결과다. 오늘날 신나무는 단풍나무과의 낙엽교목이긴 하나 잎이 손바닥 모양(掌形)의 나무가 아니다.
#단풍나무는 아시아가 원산지로 전 세계에 129종이 분포하고 있으며 산지의 계곡에 주로 자생한다. 우리나라에는 30여 종이 있는데 크게 보아 다섯 부류로 나뉜다. 잎 둘레에 '손가락'에 해당하는 갸름한 삼각형의 조각 잎인 열편이 11개인 것이 섬단풍, 9개는 당단풍, 7개를 단풍, 5개가 고로쇠, 3개가 신나무이다. 그중에서 당단풍이 제일 붉다.
우리나라는 설악산에서부터 단풍이 시작된다. 설악산에 있는 단풍은 대부분 당단풍나무이다. 당단풍나무는 '당나라 당(唐)'자를 쓰므로 중국 원산이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우리나라 자생식물이다. 그냥(?) 단풍나무(Acer palmatum)는 추위에 약해서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다. 이 단풍나무는 동아시아에 걸쳐 자라며, 한국에서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에서 자생한다. 그 중 내장산의 단풍나무가 유명하며 따로 '내장단풍'이라고도 한다.
# 늦가을 찬바람이 불면 시작해 잎이 지기 전까지 정리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결과가 바로 단풍이다. 단풍의 필요조건인 '낮은 기온'의 상징이 서리(霜)이다. 서리는 단풍을 부른다. '서리 맞은 잎'을 뜻하는 상엽(霜葉)이 단풍의 다른 이름인 까닭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의 <산행(山行)> 중 마지막 구절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붉은 단풍이 봄꽃보다 더 아름답다(붉다))'는 만고의 절창으로 회자된다. 요즘엔 온난화로 턱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엔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을 전후해 단풍이 절정을 이뤘다. 서리는 다른 말로 청녀(靑女)라 하는데 원래는 서리를 내리는 여신의 이름이다. 청녀는 상풍(商風)을 타고 온다. 여기서 '商'은 오음(五音) 중 하나인데 오행(五行)의 '金'과 통하니 상풍은 '서늘한 기운의 바람', 곧 찬 가을바람을 뜻한다. 가을을 고상(高商)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과연 단풍이 든 가을 산이 붉기만 한가? 사실 단풍은 붉은 색깔을 포함해 가을철 식물을 물들이는 모든 색깔을 지칭한다. 그래서 단풍의 다채로움을 '울긋불긋'이니 '알록달록'이니 표현한다. 식물의 종류마다 엽록소와 노란색, 갈색 색소(탄닌), 그리고 안토시아닌의 붉은 색소의 함량이 다르기 때문에 단풍 빛깔이 천차만별인 것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은 온 산에 단풍이 든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우리 산처럼 다양한 나무가 자라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단풍도 화려하다. 이맘때면 그야말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다.
#자고로 단풍철엔 삼홍(三紅)이라 했다. 단풍 들어 산이 붉게 타는 듯해서 산홍(山紅)이요, 그 산홍이 계곡물을 물들여 수홍(水紅), 그런 산수 간에 노니는 사람 마음도 붉어져 인홍(人紅)이렸다! 그런데 엊그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기온이 10여℃나 곤두박질쳐 급기야 얼음까지 얼었다. 서리를 건너 뛴 횡포(?)다. 일교차는 17℃라나 뭐라나. 단풍이 곱지도 않거니와 곧 스러져 떨어질 판이다. '오동일엽락 천하진지추(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오동나무 이파리 하나가 떨어지니 세상 사람들이 가을이 온 줄로 안다)라더니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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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