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집에서 일 할 무렵인 1935년에 연극전용 첫 극장인 ' 동양극장 ' 설립

1913년 일본인 거주지인 을지로에 국도극장이 들어섰다. 그리스풍의 멋진 대리석 건물이었다. 2년 후에는 우미관이 생겼으나 국도극장이나 우미관은 모두 일본인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세워진 것들이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는 조선 통치의 기조를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기 시작했다. 1922년 조선극장을 시작으로 영화관이 차례로 세워져 서양 영화들을 상영했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는 무성영화였으며 변사가 더빙하던 시대였다.
정주영 회장이 쌀집에서 일하던 1935년에 획기적인 일이 생겼다.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인 동양극장이 서대문(현재 문화일보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또 나운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춘향전>이 종로 3가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당시 얼마나 많은 관객이 단성사에 몰렸는지 기마대가 출동해서 정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쌀집에서 단성사까지는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배우려는 의욕이 넘쳤던 정 회장은 문화적인 관심도 대단해서 일이 끝 난 뒤 짬을 내서 기어코 <춘향전>을 보고 왔다.

여기서부터는 할머니의 기억이다. 할머니는 정 회장이 영화를 보고 온 줄 몰랐다. 어느 날, 종업원들끼리 연극을 한다고 하더란다. 쌀집 종업원들 이 무슨 연극을 한다고 그러나 하고 알아보니 모두 정 회장의 작품이었다. <춘향전> 영화를 보고 온 정 회장이 자기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서 종업원들에게 배역을 맡기고 연습을 시킨 것이었다. 춘향전 연극을 한다고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광고를 한 덕분이었는지 쌀집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였다.
연극을 본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종업원들끼리 장난 삼아 하는 연극이겠거니 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봤는데 제법 격식을 갖춘 연극이었다. 대부분 직접 연극을 본 적이 없는 동네 사람들은 크게 웃고 떠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할머니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연극을 할 생각을 하고, 대본도 직접 쓸 수 있었는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역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그 후 한동안 정주영이 이끄는 쌀집 연극단의 주말 공연은 계속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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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