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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⑤ 쇼와(昭和) 금융공황의 서막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⑤ 쇼와(昭和) 금융공황의 서막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1.3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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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여당 총재, 자신의 발언을 뒤집고 ' 금본위제 '로 급선회해
미국 금본위제로 복귀 후 프랑스 등 주요 강대국 동참하자 국제적 위상 고려 합류 선택

인간은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회가 이 욕심을 따르면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가 떨어진다. 금본위제는 이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금본위제 아래에서는 함부로 돈을 찍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국가적으로 자칫 돈이 고갈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경제가 어려울 경우 이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1920년대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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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의 고통은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훌쩍 뛰어 넘는다. '공든 탑 파괴의 10년'이라 부를 만했다.

공황의 연속이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전후(戰後)공황, 1923년 대지진에 의한 진재(震災)공황, 1927년 정격유착이 불러온 쇼와(昭和)금융공황. 전쟁 종식 후 2~4년 터울로 찾아온 대규모의 공황 쓰나미는 물이 채 빠질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수해복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대규모 수해가 찾아오는 꼴이었다.

1920년대가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으로 마무리됐다면 그나마 1930년대는 희망을 갖고 기대해 볼만했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더 크고 결정적인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930년 닥쳐온 또 하나의 공황이었다. 역사책에 '쇼와(昭和)공황'이라 기록된 이 공황은 그 규모 면에서 1920년대 경험한 세 차례 공황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 시리즈 시작점에서 제시했던 '금해금(金解禁)' 즉 '금에 대한 수출규제 해제'로 출발한 금본위제 도입이 그 시발(始發)이었다.

1929년 금본위제 도입을 선포한 하마구치 내각.
1929년 금본위제 도입을 선포한 하마구치 내각.

이 시리즈 1회에서 얘기했던 금본위제 도입의 구체적인 특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경제학자 피터 테민(Peter Temim)이 말한 다음 5가지다.

➀개인과 국가 사이에 금의 이동이 자유로워야 한다. ➁금으로 표시된 각국 통화가치가 일정 수준에서 유지돼야 한다. ③국제적인 조정기구가 없어야 한다. ④국제수지는 흑자를 보는 나라와 적자를 보는 나라가 있다. ⑤국제수지 적자국은 환율조정이 아닌 자국 내 물가하락, 즉 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잘 생각해 보자. 중요하다. 경제가 어렵다면 어떻게 하나. 금리를 낮춘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소비도 하고 투자도 하라는 뜻이다. 그럼 시중에 돈이 풀린다. 그러나 돈이 너무 많이 풀리면 문제가 된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그럼 이번에는 금리를 올린다. 돈을 은행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시중에 돈이 부족해진다. 물가가 잡힌다. 2023년 1월 현재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RS)가 하는 걸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될 것이다.

■ 금본위제는 '대세',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금본위제라면 이 같은 정책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시중에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함부로 돈을 풀 수가 없다. 일정 금액의 돈과 일정 분량의 금을 연계시켜 놓은 탓이다. 1온스에 35달러라면 이걸 지키는 게 최우선이다. 돈을 많이 찍어 달러 가치가 1온스 당 50달러가 된다 치자. 그럼 달러는 금본위제를 버리거나 온스 당 달러 값을 변경시켜야 한다. 이 경우 달러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돈을 더 찍어 시중에 공급하려면, 즉 어려워진 경제를 살리려면, 더 많은 금이 필요하다. 금이 추가로 없다면? 돈을 찍지 말아야 한다. 그럼 경제는 긴축 효과를 갖게 된다. 시중에 돈이 사라진다. 기업도 가계도 더 어려워지고 소비도 투자도 어려워진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금본위제는 그야말로 강자 중심의 체제가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보다 수출을 많이 해 다른 나라의 금을 빼앗아 오거나 아니면 자국 또는 식민지에서 새로운 금광을 찾아야 한다. 19~20세기 초 열강이 그토록 금을 찾아다닌 이유이기도 하다.

1920년대 일본정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전후공황에 진재공황에 쇼와금융공황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KO펀치'를 맞은 일본경제였다. 이 상황에서 금에 대한 수출 규제를 풀고 금본위제를 채택한다고? 이는 곧 '긴축'을 의미했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많은 기업과 정부 인사들이 반대 의견을 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1929년 6월 5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총재는 한 연설에서 "조속한 금해금은 없다"며 불안에 하는 재계를 보듬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다. 하마구치 총재는 내심 금본위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인물이었다. 뒤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그는 이것이 '대세(大勢)'였고 따라서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 달 뒤인 1929년 7월 총리 취임 후 그는 일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4개월 뒤인 11월 21일 그는 마침내 금본위제 도입을 천명했고 다음 해인 1930년 1월 11일 금 수출 금지를 해제함으로써 세계 금본위체제에 동참하게 됐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된다. 금본위제 도입은 긴축을 의미한다. 이 얘기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또한 당시 일본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여당 총재가 연설에서 "대공황에 빠졌다"는 표현까지 썼을까. 이런 상황에서 금본위제 도입은 자칫 일본경제에 독약이 될 수 있었다. 금본위제는, 말했던 대로, 긴축정책을 의미했으며 이는 어려운 일본경제를 더욱 어렵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하마구치 내각은 무리를 했다. 금본위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왜 그랬을까. 심각한 불황 상황에서 돈줄을 조이는 금본위제 도입의 무리한 추진 배경. 이는 단순한 일본경제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나아가서는 만주사변(1931년)과 뒤를 이은 만주국 수립(1932년), 그리고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연결된다. 일본의 금해금 문제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성격을 띤다. 금해금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이제 어려운 상황에서 하마구치 내각이 무리하게 금본위제 도입을 추진한 배경을 보자.

1920년 벨기에 브리셸에서 열린 금융회의. 이회에서 주요 열강들은 이미 금본위제 도입을 약속했다.
1920년 벨기에 브리셸에서 열린 금융회의. 이 회의에서 주요 열강들은 이미 금본위제 도입을 약속했다.

가장 먼저 금본위제가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금본위제의 본격적인 시작은 1867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해에 열렸던 유럽 통화 회의에서 주요 열강들이 금본위제 도입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붕괴되고 만다.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주요 강대국들이 금의 유출을 우려해 금에 대한 수출 규제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강대국들은 여전히 금본위제가 세계무역 및 경제를 위한 최상의 체제라 보고 있었다. 1920년 벨기에 브리셸에서는 이미 금본위제 도입을 위한 금융회의가 열렸다. 이후 주요 강대국들의 금본위제 채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19년 7월 미국이 가장 먼저 금본위제를 복원한 뒤 1928년에는 금본위제 도입을 미루던 프랑스마저 이에 합류, 주요 강대국 중 금본위제 채택을 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위 상승도 한 몫 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일본은 1853년 개국 이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서구 열강 편에 서서 국익을 추구해 왔다. 영국과 미국 역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견제하고자 일본을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879년 조선개국,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은 신흥 강국으로의 부상을 시작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른바 '협상국' 측에 가담, 전쟁특수를 누리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본에 준 선물은 대단했다.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얻어내며 일본은 세계 5대 강국으로 인정받는다. 당연히 일본은 그 지위에 맞는 세계 정치ㆍ경제 시스템 구축에 참여한다. 1920년 출범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주요 재정위원회 회원국이었으며 1930년 설립 예정이었던 국제결제은행(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에도 주요 출자국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무조건 금본위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금본위제 도입이 이 모든 활동의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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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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