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8:15 (목)
[김성희의 역사갈피] 연필과 전쟁
[김성희의 역사갈피] 연필과 전쟁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2.10.1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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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프랑스와 싸우면서 연필심 원료 흑연의 수출 막아 佛콩테가 독자 개발
가루 흑연을 점토와 섞어 '가는 막대' 만든 다음 가마에 넣고 굽는 처리법 고안
콩테가 1795년 특허 출원한 생산 방식서 H(단단한)와 B(더 검은)로 품질 구분
美 남북전쟁 때 야전 병사들이 연필로 재빨리 메모하고 전달하면서 수요 폭발
연필은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 치던 밤 영국 컴벌랜드의 케즈윅에서 태어났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요즘은 연필 보기 힘들다. 어쩌다 잘 지워지는 덕에 연필을 쓸 일이 있어도, 흔히 말하는 '샤프'펜슬을 이용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연필은 한때 첨단 필기구였다. 생각해보라. 잉크나 먹물을 깃털펜이나 붓으로 찍어 기록하던 것과 견주면 연필은 얼마나 편리했을까.

그런 연필은,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 치던 밤 영국 컴벌랜드의 케즈윅에서 태어났다. 폭풍우로 큰 참나무가 뿌리째 뽑히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신비스러운 검은 물질, 흑연 광맥이 드러났다. 근처 농부들은 이 물질을 양에 표시하는 데 쓰기 시작했는데 손에 시커먼 자국이 남는 걸 피하기 위해 흑연 막대기를 끈으로 둘둘 말아 쓰는 방식이었다. 16세기 후반 들어서야 흑연의 여러 용도가 개발되면서 케즈윅 주변의 설계사들이 흑연봉을 나무 몸통에 넣어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나무 몸통은 흑연봉의 손잡이 기능일 뿐이어서 현대식 연필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쨌든 케즈윅은 '첨단' 필기구인 연필의 중심지가 되면서 흑연 수출이 금지되는가 하면, 귀중한 흑연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광산에 가끔 물을 채우기도 했다. 영국이 연필을 '전략무기'화 한 셈인데 1793년 영불전쟁이 벌어지면서 경제봉쇄령이 떨어지자 프랑스가 곤경에 처했다. 이에 프랑스 전쟁장관 라자르 카르노는 니콜라 자크 콩테에게 수입산 흑연을 쓰지 않는 연필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머릿속에 모든 과학을 담고 있고 손에는 모든 예술을 담고 있다"는 평을 들은 재주꾼 콩테는 가루 흑연을 점토와 섞어 가는 막대를 만든 다음 가마에 넣고 굽는 처리법을 개발했다. 콩테가 1795년 특허 출원한 점토와 흑연 혼합 방식은 지금까지도 연필심 생산에 사용된다. 예를 들면 점토의 비율에 따라 연필이 더 단단해지거나 부드러워지니 H(hard·단단한)와 B(blacker·더 검은)란 품질 표시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연필의 역사에는 뜻하지 않게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등장한다. 소로는 매사츠세츠주 콩코드에 있던 아버지의 연필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연필 굳기에 따라 네 종류로 표시하는 방안을 만들었다. 당시 소로의 경쟁자 중 윌리엄 먼로는 1812년 가구제작 출신답게 최초의 '나무연필'을 내놓았다. 흑연심을 감싸기 위해 두 쪽의 나무 몸체를 붙이되 그 형태를 육각형과 팔각형으로 했으니 오늘날 연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미국에서 연필의 인기에 불을 붙인 것은 1861~1865년 벌어진 남북전쟁이었다. 야전의 병사들이 재빨리 메모하고 전달하기 위해 간편하고 값싼 연필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는 덕분이었다.

모두 클립, 만년필, 지우개 등 문구들의 역사를 살핀 『문구의 모험』(제임스 워드 지음, 어크로스)에 실린 이야기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물건들에 깃든 역사와 과학, 땀과 눈물을 알게 되면 흥미로우면서도 새삼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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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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