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7:50 (토)
[김성희의 역사갈피]쥐약 '와파린'이 신약으로 거듭난 사연
[김성희의 역사갈피]쥐약 '와파린'이 신약으로 거듭난 사연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2.09.26 16: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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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美 위스콘신 대학의 칼 링크 교수가 출혈 일으켜 쥐를 죽이는 약으로 개발해 돌풍
한국전쟁때 미국 한 청년 징집 피하려 세차례 복용 자살시도했으나 생존해 군의관과 상담
사람에겐 혈액 응고 작용 비타민K 존재해 와파린의 출혈 효과를 상쇄한다는 사실 알아내
쥐약이 혈액응고 막는 약으로 변신…1955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심장 수술에 와파린 쓰여
와파린은 위스콘신대학의 칼 링크 교수가 개발한 강력한 쥐약이었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전쟁이 과학기술의 진보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선진 기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통조림에서 달 탐사까지, 전쟁 또는 전쟁 준비를 위한 군수용 목적에서 인류에게 이로운 뜻밖의 발명이 이뤄진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하는 전쟁의 속성상 의약 분야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발전이 이뤄진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페니실린이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때로는 전혀 의도치 않은 어쩌면 전쟁의 '부산물'이라 할 약의 발전도 이뤄졌던 모양이다.

1951년의 일이다. 22세 미국 청년 E. J. H.는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파견될 참이었다. 한데 세계대전의 여파로 미국에선 염전(厭戰) 분위기가 팽배했다.(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연히 이 청년도 전쟁에 끌려가기 싫은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한다. 자살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자살 수단으로 택한 것이 'D콘'이라는 와파린제 쥐약이었다. 와파린은 그 몇 년 전 위스콘신대학의 칼 링크 교수가 개발한 강력한 쥐약이었다. 링크 교수는 1933년 인근 지역의 소들이 사료를 잘못 먹고 집단 폐사하는 원인을 연구한 끝에 전동싸리에 들어있는 디쿠마롤이란 물질이 출혈을 일으킨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고는 디쿠마롤을 여러 차례 합성한 결과 강력한 출혈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금만 긁혀 피가 나도 쥐가 죽는 강력한 쥐약을 출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니 그 상품명이 '와파린'이었다.

그런데 E. J. H.는 와파린제 쥐약을 먹고도 다음 날 멀쩡하게 깨어났다. 연이은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6일 내내 시도하고도 자살 미수에 그쳐 결국 입대하게 된 그는 군의관에게 이 사실을 상담했다. 그 군의관은 1952년 이를 미국 의학협회지에 발표했다. 이에 의학자들이 쥐에게는 치명적인데 사람에겐 안전한 와파린의 비밀을 캐고 든 결과, 쥐와 달리 사람에게는 혈액 응고 작용을 하는 비타민K가 다량 있어서 와파린에 길항(두가지 약물을 투여했을 경우 서로 효과를 소멸하는 약리작용)했기 때문임을 알아냈다.

이후 와파린은 쥐약이 아니라 혈액응고를 막기 위해 사용되기에 이르렀고, '자살 미수 사건'이 있은 지 불과 4년 후인 195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심장 수술에도 와파린이 쓰였다.

이는 의약품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약학대학 교수가 전쟁과 약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한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백승만 지음, 동아시아)에 실린 일화다. 전혀 의도치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몸 바쳐' 의약의 발달에 기여한 웃지 못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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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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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2024-04-17 14:29:58
와파린의 탄생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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