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자인 강주룡, 일경에 의해 쫓겨 나자 높이 12미터 을밀대 지붕에 올라
농성 8시간 만에 내려와 투옥돼 … 보석 출감 후 30세에 한 많은 인생 마감
노동쟁의에서 종종 쓰이는 투쟁방법 중에 '고공 농성'이 있다. 시위대가 크레인 등 높은 곳에 올라가 장기 농성을 벌이는 방식이다. 위험하기도 하고 침식도 불편하지만 주목도가 높아지는 반면 진압당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이점이 커서 그런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데 이 '고공 농성'이 이미 일제강점기 때 시작됐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여성노동자가 시작했다는 것도.
엄혹했던 일제 식민지 시절, 통념과 달리 노동쟁의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식민지 백성이자 노동자라는 이중의 약점에 노출됐던 당시 노동자들이 임금 차별에 대한 항의로 시작해서 곧잘 독립투쟁으로 변하곤 했다. 당대 21종의 신문에서 1면 기사를 골라 시대의 흐름을 엮어낸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김흥식 기획, 서해문집)에 보면 1929년 2월 '원산 대쟁의' 기사가 나온다. 54개 노동자단체의 2,000여 명이 80여 일간 총파업에 들어간 대규모 투쟁이었으니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수밖에.
1930년대 들어 노동쟁의는 특히 평안도, 함경도를 중심으로 더욱 빈번해졌다. 일제의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중화학공장이 많았는데, 대공황 이후 '산업 합리화'를 이유로 임금을 낮추거나 해고를 늘리는 일이 잦아진 것이 큰 이유였다. 반면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커지고, 산업별 연대가 강화되는 등 노동자 세력이 강화된 배경도 작용했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대형 투쟁이 1930년 8월 평양 고무공장 파업. 평원공장 등 10개 고무공장 노동자 1,800여 명이 '임금 인하 반대'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자 일경이 투입돼 노동자들을 밖으로 몰아내는 등 파업 양상은 요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1931년 5월엔 평원 고무공장 여공들이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단식 파업을 벌였는데 이를 주도하던 인물이 강주룡이다. 일경에 의해 공장에서 쫓겨난 그녀는 평양 모란봉 아래 있던 높이 12미터의 정자 을밀대 지붕에 오른다. 밤 사이에 광목을 찢어 만든 줄을 타고 올라간 강주룡은 새벽부터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외쳤다. 이를 두고 당대 언론은 "을밀대 상의 체공녀(滯空女·공중에 떠 있는 여자)"라 보도했으니 요즘 고공 농성의 원조라 할 만하다.
이 여장부의 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였다. 농성 8시간 만에 일경에 의해 끌려 내려와 처벌을 받았다. 옥중에서도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안간힘을 다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보석으로 풀려난 후 병세가 악화되어 출감 두 달만인 1931년 8월 평양 빈민굴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한창 나이인 30세였다.
높이야 요즘 타워크레인 등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여장부의 간절한 마음은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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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