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종가(宗家) 65년' … '동국제강 3세 시대'서 시련
'철강 종가(宗家) 65년' … '동국제강 3세 시대'서 시련
  • 성태원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 승인 2019.06.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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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철강역사 최초기록 금자탑…가정용 등잔부터 만드는 등 포스코보다 앞서 철강제품 생산
창업주 장경호 회장은 사재 사회환원…장세주 회장 경영 후 사세 기울고 '경영비리'연루 곤욕

동국제강은 국내 철강업 종가(宗家)다. ‘철강업’ 하면 대개 포스코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은 동국제강이 철강업 원조(元祖)다. 동국제강은 민간의 창업자 장경호 회장이 무려 90년 전인 1929년 부산에 세운 대궁양행(가마니 장사)을 모태로 성장한 유서 깊은 철강전문기업이다.

동국제강은 그야 말로 한국 철강역사의 종가이다. 와이어로드를 처음 생산했고 고로를 가동한 것도 포스코보다 앞선다.  70년대에는 '재계 빅3'에 오르기도 했으나 최근들어 사세가 많이 기울였다. 장경호 창업주(왼쪽)는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과 함께  한국철강업계를 이끌었고 그의 3남 장경태 회장(가운데)은 철강사업의 고도화를 이뤄냈지만 창업주의 손자 장세주(오른쪽)회장 시대에는 경영시련을 겪고 있다/동국제강 홈페이지
동국제강은 그야 말로 한국 철강역사의 종가이다. 와이어로드를 처음 생산했고 고로를 가동한 것도 포스코보다 앞선다. 70년대에는 '재계 빅3'에 오르기도 했으나 최근들어 사세가 많이 기울였다. 장경호 창업주(왼쪽)는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과 함께 한국철강업계를 이끌었고 그의 3남 장경태 회장(가운데)은 철강사업의 고도화를 이뤄냈지만 창업주의 손자 장세주(오른쪽)회장 시대에는 경영시련을 겪고 있다/동국제강 홈페이지

대궁양행은 1935년 가정용 등잔과 호롱을 판매하며 철물상도 겸한 남선물산으로, 1949년에는 철못과 철선을 생산하는 조선선재(朝鮮線材)로 발전했다. 1954년엔 서울 당산동에서 본격적인 철강업체 동국제강을 출범시켰다. 당시 매물로 나와 있던 한국특수제강을 인수해 직원 40명으로 출발한 회사다. 이후 65년에 걸쳐 글로벌 철강 전문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동국제강은 남선물산, 조선선재까지 치면 84년이란 오랜 철강업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 만큼 동국제강의 역사는 곧 한국 철강업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장 씨 집안에서 3대째 경영권을 행사하며 지금도 철강 종가의 자존심은 지켜나가고 있다.

대를 이어 가며 동국제강을 키워 온 오너로는 창업자 장경호 회장(1975년 76세로 타계), 2세 장상태 회장(2000년 73세로 작고), 3세 장세주 회장(66) 및 장세욱 대표이사 부회장(57) 등을 꼽을 수 있다. 1세 장경호 회장이 동국제강의 기초를 닦았다면 2세 장상태 회장은 철강 전문그룹으로 사세를 확 키우며 동국제강을 중흥시킨 오너다. 지금의 3세 장세주 회장과 장세욱 부회장은 하락세를 탄 그룹 수성(守成)을 위해 안간 힘을 다하고 있어 보인다.

장경호, 장상태 부자가 공동 경영을 하다시피 한 60~70년대에 동국제강그룹은 재계 순위 3위를 마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10~20위권은 유지했던 재계 순위는 창업자 사후 그룹 일부 분할과 사세 하락으로 상당히 후퇴했다. 2001년 3세 장세주 회장이 선장에 오른 이후부턴 30위권을 맴돌았고, 최근 몇 년 사이엔 40위권으로 밀려났다.

철강업은 천문학적인 투자가 수반되는 장치산업이라 기업주들의 선견지명과 결단력, 인내심이 각별히 요구되는 사업이다. 그래서 철강업자들은 웬만한 시황(市況) 오르내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굳은 심지의 소유자들이 많다. ‘산업의 쌀인 철강’을 공급한다는 자부심이 크고 경기 사이클이 잘 맞아 떨어질 땐 큰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덩치가 커지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불황기에도 몸집을 줄이기가 힘이 든다. 그런 탓에 중도에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경우가 흔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런 만큼 동국제강그룹이 90년 역사를 이끌어 온 것만으로도 한국 기업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겠다. 창업자 장경호는 “하나의 업(業)은 100년을, 하나의 공장은 10년을 내다봐야 한다”는 경영철학으로 철강업에 투신했다. 2세 장상태는 90년대 초반 1조2천억 원 상당을 투자해 동국제강을 반석 위에 올린 포항제강소 건립 당시 “100만원만 있어도 설비에 투자하고 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최고의 설비를 갖추는데 보태겠다. 사옥 지을 돈이 있어도 공장에 투자하겠다”고 말해 철강인들 사이에 귀감이 됐다. 당시 철강업계 취재를 다녔던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실제로 서울 을지로 동국제강 사옥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동국제강의 주요 생산품은 후판(선박·산업기계용 등), 봉강(철근콘크리트용), 형강(구조용 등), 냉연도금강판(전기아연도금강판 등), 컬러강판(건축용·가전용 고급 강판) 등이다. 포스코가 고로(高爐) 방식을 통해 각종 하위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데 비해 동국제강은 전기로(電氣爐) 방식을 통해 하위 제품을 생산한다.

국산 철근을 생산한 것도 동국제강이 한발 앞섰다. '건축의 쌀'인 철근이 본격생산되면서 우리나라의 철강생산기술은 비로서 유아 단계에서 벗어난다./동국제강 홈페이지
국산 철근을 생산한 것도 동국제강이 한발 앞섰다. '건축의 쌀'인 철근이 본격생산되면서 우리나라의 철강생산기술은 비로서 유아 단계에서 벗어난다./동국제강 홈페이지

동국제강은 철강 원조 기업답게 원자재 조달을 위해 오랫동안 국내 고로 설비를 꿈꿔 왔다. 하지만 미수에 그치다가 3대째인 2017년 ‘5전 6기’ 끝에 비로소 고로 설비를 갖추게 됐다. 다만, 국내가 아닌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연산 300만t 규모의 고로를 갖춘 CSP제철소(뻬셍철강)를 착수 11년 만에 완공해 3대에 걸친 꿈을 마침내 이뤘다. 3자 합작(동국제강 30%+브라질 발레사 50%+포스코 20%)이었으며 투자비는 55억 달러(약 6조1655억 원) 상당이었다.

철강 종가인 만큼 동국제강에 얽힌 철강 관련 에피소드도 많다. 그 중에서 꿈에도 그리던 고로 제철소 건설 기회를 반납한 에피소드가 가장 눈에 띈다. 60년대 후반당시 장상태 사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일관제철소 건립 제의를 받았다. 포철 탄생 이전에 이미 동국제강, 연합철강, 한국철강, 동국산업 등 대규모 철강업체 7곳을 민간자본으로 경영하고 있던 동국에 대한 신뢰감이 그 만큼 높았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는 고심 끝에 국책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하고 물러난다. 사업 스케일로 봐서 그렇게 판단한 그는 이후 사심을 버리고 박태준 회장을 도와 포철 건설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두 사람은 평생 한국 철강업 발전의 동지가 됐다. 60년대 중반 장 사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방위산업 참여를 제안 받기도 했다. 이 역시 절호의 기회였으나 원체 불심(佛心)이 깊었던 부친 장경호 회장이 “사람을 죽이는 군수물자까지 만들어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고 고집해 뒤로 물러났다. 이 사업은 결국 풍산금속으로 넘어갔다.

동국제강의 경영권 승계는 장남을 고집하지 않고 이뤄진 게 특징이다. 창업자 장경호 회장은 11명의 자녀(6남 5녀)를 두었다. 2세 장상태 회장은 3남이었다. 그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형제 2명(장세주 회장, 장세욱 부회장)이 경영권을 함께 행사하고 있다.

2001년 회장에 오른 3세 장세주는 2015년 5월 해외 도박 및 횡령혐의로 구속, 기소돼 3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1990년, 2004년에 이은 세 번째 사법 처리여서 그룹 안팎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지난해 4월 가석방으로 풀려나긴 했으나 구속 이후 동생 장 부회장(형보다 9살 아래)이 구원투수로 나서 그룹을 경영해왔다. 한국 철강업 원조 회사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셈인데 이들 형제가 다시금 회사의 명예와 실적을 되살려 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