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병하여 사임하려는 걸로 박통도 오해…위증해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行
야당의 끈질긴 출석요구 못 이겨 국회 마지막 출석해 예산심의 빠진 돈 해명

쓰루는 늘 소화 기능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화 불량은 1961년 봄의 위궤양 수술 후유증으로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1971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5차 한일각료회담 기간 동안 쓰루가 느꼈던 불편함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총리라는 자가 4대 핵공장 경제 협력 유치, 물가 등 선거 후유증 해소라는 발등의 불을 두고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차일피일 병원 방문을 미루던 차에 서재털이 사건이 쓰루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최고 관료로서의 권위와 더불어 그의 병세 또한 호전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비록 해임 건의안이 부결되었으나 (박통의 장기 집권 시도가 야기한 정국 혼란이 점차 악화되면서) 그에 대한 국회의 핍박은 날로 더 심해져갔다. 병세가 심해진 쓰루가 "이제는 그만 쉬어야겠다"고 대통령에게 사임을 청했으나, 간곡한 박통의 만류에 못 이겨 출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병세를 알지 못한 박통은 저간의 일들 때문에 쓰루가 칭병하여 사임하려는 걸로 오해한 것이다. 결국 11월 중순 병세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국회가 쓰루의 입원을 '타이밍을 맞춘 신병'이라고 빈정거리는 가운데서도, 국회 일정은 어찌어찌 예산 심의로 넘어갔다. 예산 심의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11월 30일 예결위 9인 소위가 마지막 손질을 하던 때에 중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세수 부족으로 코너에 몰렸던 정부가 그때까지 예산 심의 테이블에 올려놓지 않았던 80억 원을 세계잉여금(세금을 거두어 세출로 쓰고 남은 돈)이라며 내놓은 것이다. 야당 의원이 벌컥 화를 내면서 "그 돈을 어디다 감추었다가 이제 내놓느냐.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을 문책하겠다"며 펄펄 뛰었다.
김성곤 등 '쓰루 편'은 각료 해임 해프닝으로 정계를 은퇴한 상태였고, 날개(박통의 신임) 잃은 쓰루를 돕겠다고 나서는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야당은 그의 출석 요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국회 예산 통과 법정기일을 하루 앞둔 12월 1일 밤까지도 야당 신민당 강근호 의원은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을 당장 앰뷸런스에 태워서라도 불러오지 않는 한 발언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죄수도 병보석을 얻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는 여당의 야유 가운데, 예결위원장이 "본회의에서 충분히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고 설득하고 이중재, 이세규 의원 등이 "그만 참으라"고 만류해 겨우 강 의원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입원해 있던 쓰루는 결국 12월 2일 국회에 출석해야 했다. 그리고 "200여억 원의 세계잉여금이 있으나 일부러 세입에 계상 안 한 게 아니라 통화 증발 요인이 된다고 해서 정책적으로 세입에 계상하지 않았다"는 해명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해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법정기일(12월 2일) 안에 다음 해(1972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국회에 출석한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은 그가 퇴임하기 한 달 전, 유명을 달리하기 석 달 전이었다.
쓰루는 그날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그 후 입원과 출근을 위한 퇴원을 반복했다. 언론은 쓰루의 입원 소식을 전하면서 후속 부총리 인사에 관한 입소문을 전하기 시작했다.
12월에 들어서자 주치의는 쓰루의 병이 수술이든 약물치료이든 무엇으로도 치료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입원 치료에 별 차도가 없음을 깨달은 쓰루의 부인은 대안을 찾고 있었다.
12월 29일 기획원에서 ADB 총재와 안동댐 차관 도입 협정을 체결했다. 그것이 쓰루가 살아생전에 행한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