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9 21:50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⑦獨총리, '배상 조약' 거부 후 사임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⑦獨총리, '배상 조약' 거부 후 사임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10.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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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조지 총리가 '조약 서명 안하면 다시 전쟁'이라는 '협박' 불구하고 무응답
신임 총리가 의회 설득해 비준 … 알사스-로렌 등 알짜 지역 프랑스 등에 넘겨
배상금은 독일의 지불 능력 등 감안해 결정하기로 했지만 '갈등의 불씨' 잉태

독일과의 평화조약에 대한 연합국 측 입장은 모두 달랐다. 지난 번 글에서는 우선 프랑스와 영국의 입장을 알아봤다. 프랑스는 심경이 복잡했다. 전쟁 대부분이 자기 앞마당에서 벌어졌다.

그러니 그 어느 나라보다 피해가 컸다. 거기에 1870년 독일 통일과정에서 치러졌던 전쟁(보불전쟁)에서의 쓰라린 패배도 맛봤다.

이제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왔다. 프랑스는 독일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반면 영국은 전후 독일이 안정을 되찾기를 바랐다. 무역 파트너로 있어 주기를 원했고 프랑스와의 세력 균형을 원했다. 프랑스의 독주는, 영국에게 나폴레옹의 악몽을 일깨워줬던 것이다.

자. 이제 미국을 보자. 미국의 입장은 프랑스나 영국과 또 달랐다. 미국은 전장에서 영국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쟁에 뛰어든 것도 전쟁이 터진 지 한참 지난 뒤였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한 게 1917년 4월이었고 전쟁이 끝난 것이 1918년 11월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4년 4개월 동안 전쟁을 치른 반면 미국은 고작 1년 6개월 남짓이었다. 이 같은 이유에서 미국은 단순히 전쟁에서 피해를 덜 봤다고 애기하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은 이 전쟁 덕을 톡톡히 봤다. 전쟁 초ㆍ중반 중립을 지키며 엄청난 규모의 전쟁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전쟁 덕에 생산, 무역, 금융 모든 부문에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 덕에 미국은 전후 최강의 열강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전쟁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전후 처리를 논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의 수장으로 파리 강화희의에 참석했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정치가가 되기 전 이미 학자로서 크게 성공한 인물이었다.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렸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는 세간에 이상주의자로 평가됐다. 독일로부터의 배상금이나 식민지나 영토의 분할 등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인류로부터 아예 전쟁을 없앨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비밀 외교 폐지, 군비축소,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조정 등을 강조한 윌슨의 '14개조'와 "각 민족은 자국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고 강조한 '민족자결주의(National Self-determination)' 그리고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과 군비감축 등의 아이디어는 그렇게 해서 나왔던 것이다.

■ 철광석 75%, 아연 68%, 석탄 28% 매장지 상실

패전국 독일의 입장은 어땠을까. 말 그대로 패전국이었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영토, 해외 식민지, 전쟁 책임 및 배상금 등의 문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답이 늦어졌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부터 6월 사이 열렸다. 그리고 5월 7일 대(對) 독일 강화 조약 초안이 독일 측에 제시됐다. 그럼에도 답이 없었다.

그러자 5월 31일 영국 로이드 조지 총리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답이 없었다. 연합국 측은 최후통첩을 했다. 6월 15일 "일주일 이내에 무조건 조약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답이 없었다. 6월 19일 필리프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 총리는 오히려 서명을 거부하며 사임한다. 결국 조약은 신임 구스타프 아돌프 바우어(Gustav Adolf Bauer) 총리의 몫이었다. 그는 "독일은 전쟁을 치를 수 없다"며 의회를 설득했다. 결국 의회는 비준했고 정부는 6월 22일 조약을 맺는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베르사유조약 체결식. 웅크린 자세로 의자에 앉아 등을 보이며 서명을 하는 이가 독일 대표 요하네스 벨이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베르사유조약 체결식. 웅크린 자세로 의자에 앉아 등을 보이며 서명을 하는 이가 독일 대표 요하네스 벨이다.

최종 조약 체결일은 6월 28일. 큰 의미를 갖는 날이었다. 전쟁의 시발점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가 시해된 지 꼭 5년 째 되던 날이었다.

장소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이 장소 역시 의미가 컸다. 앞서 말했던 대로 48년 전인 1871년 1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의 빌헬름 1세가 이곳 프랑스 궁전에서 황제 취임식을 가졌다.

프랑스로서는 남의 집 잔치에 안방을 내준 꼴이었다. 프랑스는 이후 수 십년 동안 절치부심했다. 그런데 마침내 그곳에서 독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게 됐다. 프랑스 국민의 감회가 이루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가혹했다. 무엇보다 영토의 상실이 뼈아팠다. 알짜 땅을 주변국에 내줘야 했다. 조약 42~100조 사이사이에 알사스-로렌, 포센, 상부 실레지아 등 많은 지역 영토가 프랑스나 벨기에에 인도된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이들은 주요 농업지역에 광물 매장지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경작 가능 영토의 15%, 철광석 매장량의 75%, 아연 매장량의 68%, 석탄 매장량의 28%를 잃었다. 또 조약 119조는 중국과 아프리카 등에 있는 독일의 해외 식민지 지배권도 박탈한다는 규정도 있다. 군사력도 감축됐다. 조항 159~163조에 의해 독일은 190만에 이르는 전력을 단계적으로 해체, 육군 10만 명에 한정해야 했다. 공군과 해군은 아예 포기해야 했고 육군도 영토 내 질서 유지에 한정시켰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배상금 문제였다. 일단 조약에는 배상금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앞서 말한 대로 "독일과 동맹국들이 연합국 측의 모든 손실과 피해에 책임을 진다"는 원론적인 내용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안에는 "배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맞다. 배상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 설립될 '배상위원회(Reparation Commission)'에서 정하기로 했다. 1921년 서립 예정이었던 위원회의 주 업무는 ➀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과 지불 능력을 살핀 뒤 ➁이를 독일 정부에 설명하고 ➂최종 배상금액과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예정했던 대로 설립됐고 성실하게 일을 했다. 그 결과 성과도 나왔다. 1921년 4월 27일 최종 배상금 규모와 배상 방식이 정해졌다. 이로써 위원회의 일은 끝났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제 전후 처리를 위한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배상금, 즉 돈 문제였다. 돈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골치 아프고 해결하게 쉽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돈 문제도 그랬다. 위원회의 결론은 이후 수 십 년 동안 벌어진 돈 문제의 시작이 됐다. 그리고 히틀러와 두 번째 세계전쟁을 잉태한 '불행한 어미'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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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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