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9 21:05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④냅킨에 쓰인 '래퍼곡선'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④냅킨에 쓰인 '래퍼곡선'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9.29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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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美대통령 비서실장 럼스펠드, ' 엉망진창 ' 경제 살린 묘수에 골몰
호텔서 칵테일 곁들인 식사를 하며 래퍼 교수의 아이디어에 귀가 번쩍
세율 올리면 세수 늘어나지만 일정 시점 넘으면 준다며 감세 정책 조언

1974년 12월 4일 저녁. 워싱턴 D.C.에 있는 워싱턴 호텔의 내부 식당 '투 콘티넌츠(Two Continents)'에는 4명의 주요 인사가 칵테일과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당시 대통령의 비서실장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그의 보좌관 딕 체니(Dick Cheney), '월 스트리트 저널'의 부 편집장(associate editor)이자 경제 칼럼니스트인 주드 와니스키(Jude Wanniski), 그리고 당시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무부 컨설턴트였던 아서 래퍼(Arthur Laffer). 경제와 관련해 워싱턴에서 가장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좌장(座長)은 럼스펠드였다. 지난 6월 89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는 관운이 무척이나 좋았던 사람이다. 1969년 서른일곱 나이에 닉슨 대통령의 명을 받아 빈곤층 재기에 도움을 주는 경제기회국 국장으로 임명된다. 1974년 8월 이번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낙마한 뒤 새로 취임한 대통령 제럴드 포드(Gerald Ford)의 부름을 받아 그의 첫 비서실장이 된다. 그때 나이 마흔 둘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국방장관까지 지낸다. 그리고 26년이나 지난 2001년 그는 다시 한 번 관직에 나선다. 이번에는 부시 대통령이었다. 9ㆍ11 테러 직후 당시 중차대한 국방장관직을 수행하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의 주역이 된다.

■ 세율(稅率)이 낮으면 세입(稅入)이 는다?

1974년 12월 그가 보좌관 딕 체니와 함께 와니스키 부 편집장과 래퍼 교수를 만났을 때 그에게는 엄청난 고민거리가 있었다. 4개월 전 닉슨으로부터 물려받은 나라경제가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성장은 없었고 실업은 9%를 넘나들었으며 물가는 12%에 이르렀다. 거덜 난 경제를 살리고자 그는 두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고견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그때 래퍼 교수가 자신의 이론과 함께 해결책을 제시한다. 냅킨에 그림을 그려가며 그는 "동일한 세수를 가져 오는 데에는 두 개의 세율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래퍼곡선(Laffer Curve)'이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냅킨은 스미소니언박물관에 남아 아직도 그때를 기리고 있다.

래퍼 교수가 내프킨에 직접 그렸다는 ‘래퍼곡선’
래퍼 교수가 내프킨에 직접 그렸다는 '래퍼곡선'

래퍼곡선의 의미는 간단하다. 세율을 지속적으로 올리면 일정 기간 동안 세수가 확대되지만 어떤 시점을 넘어서면 세수가 줄어든다. 일해 봐야 벌이가 세금으로 많이 나가기 때문에 일에 대한 의욕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재정을 위해 증세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세율을 낮춰 세수를 늘릴 수 있는 방안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래퍼는 이때 세수를 최대화시킬 수 있는 세율을 '적정세율'로 명명했다. 세수를 최대로 만드는 '적정세율'. 래퍼곡선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논리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이 '적정세율'을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지금도 없다. 그러니 폐기되거나 더 연구돼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4년 뒤인 1978년 칼럼니스트 와니스키가 공공정책에 대한 논문집 『퍼블릭 인터레스트(The Public Interest)』에 '세금, 세수, 그리고 래퍼곡선'이라는 제목의 관련 논문을 쓰며 오히려 세간에 널리 알린다. 그는 1974년 모임에서 래퍼가 그린 냅킨을 가져가 결정적인 참고자료로 썼다고 밝혔다. 논문에서 와니스키는 "래퍼곡선은 단순하지만 매우 강력한 분석 도구"라며 "이 곡선을 이해하는 정치인들은 그렇지 않은 정치인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언론인이 쓴 논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결론은 강력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당연히 정치인의 눈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한 정치인이 그를 잡았다. 1980년 제4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래퍼곡선은 작은정부ㆍ감세ㆍ규제완화를 공약으로 내건 레이건 측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작용했다. 여기에 바틀리라는 언론인이 가세한다. 그는 '강한 나라 미국'을 제창하며 강(强) 달러 정책을 권했다. 마침 폴 볼커(Paul Volcker) 연준 의장은 고금리로 당시 심각한 상태였던 인플레이션을 잡고 있던 중이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연준에 암묵적으로 이를 동의, '강한 달러'를 통한 '강한 미국'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바틀리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래퍼의 감세정책도 실상은 바틀리의 조언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래퍼는 훗날 "우리는 모두 바틀리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결론은 '실패'였다. 그것도 대실패. 대규모 감세정책은 대규모 재정적자를, 강력한 달러 정책은 엄청난 무역적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1985년 플라자합의의 배경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은 레이건 정부 1기의 정책실패를 검증되지 않은 미흡한 이론을 정책에 채택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 1993년 사우나탕에서 결정된 2020년의 세계경제

1993년의 어느 날이었다. 럼스펠드가 래퍼와 와니스키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한 지도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럼스펠드는 시카고의 라켓 클럽(Racquet Club Of Chicago) 사우나탕에서 뜨거운 스팀을 즐기고 있었다. 당시 그는 3년 간 재직했던 미국 유수의 케이블TV 관련업체 제너럴 인스트르먼트(General Instrument Corporation)의 회장직을 마치고 고향인 시카고에서 개인 사업을 준비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사우나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있던 사람은 성공한 헤지펀드 매니저 워렌 모슬러(Warren Mosler). 럼스펠드는 할 말이 있다며 만나고 싶다던 그에게 사우나에서 1시간을 내주겠다고 약속해 그를 만났던 것이다.

모슬러는 럼스펠드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20년 동안 금융계에서 일했던 그였다. 재정과 금융에 대한 그만의 특별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미국에게,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별 필요 없는 강박관념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발권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 정치인인 럼스펠드에게는 귀가 솔깃해질 만한 얘기였다. 그야말로 꿈같은 이론 아닌가. 재정적자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돈을 구할 수만 있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자동차 개발자 워렌 모슬러와 MMT 이론의 효시가 된 그의 저서 『연화경제학』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자동차 개발자 워렌 모슬러와 MMT 이론의 효시가 된 그의 저서 『연화경제학』

하지만 럼스펠드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편견 없이 모슬러의 아이디어를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모슬러에게 자신이 잘 아는 경제전문가를 알려주고 만나볼 것을 권했다. 럼스펠드카 추천해 준 경제전문가, 그는 다름 아닌 '래퍼곡선'의 주인공 아서 래퍼였다.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래퍼 역시 그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아이디어를 체계화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래퍼는 모슬러를 동료 학자 마크 맥나리(Mark McNary)에게 소개해 줬고 맥나리는 모슬러의 아이디어를 체계화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MMT의 전설이 된 짧은 에세이 『연화(軟貨)경제학(Soft Currency Economics)』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때 '연화'란 '금이나 달러 등 다른 통화로 바꿀 수 없는 통화'를 뜻한다. 그런데 이 에세이를 가리켜 왜 MMT의 전설이라 할까? 호주 뉴캐슬 대학의 빌 미첼(Bill Mitchell)이 이 에세이에서 제기하는 논리에 'MMT'라는 이름을 만들어 붙여줌으로써 이 에세이는 영예로운 '최초의 MMT 이론서'로 등극하게 됐던 것이다. 이 에세이와 함께 모슬러도 미첼도 모두 'MMT의 창시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 에세이의 주장의 핵심은 "충분히 큰 재정 조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금융위기는 없다(No financial crisis is so deep that a sufficiently large fiscal adjustment cannot deal with it.)"라는 것인데 이는 이후 '모슬러 법칙'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중요하니 우리는 모슬러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코네티컷 대학 공대생이었다. 그러다 성적이 좋지 않아 경제학으로 학과를 옮긴다. 그리고 겨우 졸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후 그는 사업 분야에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대학 졸업 후 저축은행에서 일하다 '돈' 관련 업무에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1982년 월스트리트로 진출, 헤지펀드 매니저로 활동한다. 그는 이 와중에 자기 사업체도 낸다.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그 뒤 그는 고급 스포츠카 디자이너 및 개발자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런 그이니 직업과 관련된 다양한 타이틀이 붙어 다니는 것은 당연하다. 헤지펀드 매니저에 사업가, 자동차 개발자,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얘기지만, 그에게는 'MMT의 창시자'라는 영예와 함께 경제 이론가와 교수라는 타이틀도 붙는다. 말년에 그에게는 새로운 타이틀 하나가 더 붙는다. '정치가'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이 붙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이론을 직접 정치에 적용시키고 싶은 욕심이었을 수도 있다. 2016년 그는 67세 나이에 대통령에 도전했고 2년 뒤에는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주지사에 도전한다. 모두 무소속이었다. 결과는 전패(全敗)였지만 정신만큼은 알아줘야 할 것 같다.

■ MMT는 아마추어?

켈튼은 자신의 책 『적자의 본질』에서 MMT의 기원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영미권에서 주로 활동했던 후생(厚生)경제학자(welfare economist) 아바 러너(Abba Lerner)에서 찾는다. 그는 '기능적 재정(Functional Finance)'이라는 이름 아래 재정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재정의 중요성을 '경제'보다 '사회'에서 찾았던 경제학자다. 재정의 목적이 경제안정보다 고용안정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고용을 위해 필요한 재원은 세금이 아닌 화폐의 발권(發券)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한 마디로 고용을 늘리고 돈을 찍어 그 뒷감당을 하라는 얘기였다. 켈튼은 MMT의 기초 개념의 출발을 여기서 찾는다(pp.8-9).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학'이라는 학문분과에서의 '기원'을 얘기한 것일 뿐이다. 켈튼 역시 다양한 인터뷰와 대담 기사에서 MMT의 실질적인 기원이 모슬러에게 있음을 밝혔다. 2019년 미국의 대표적인 종합 주간지 『더 뉴요커』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9년 5월 19일 켈튼이 케이블뉴스채널 MSNBC의 앵커 크리스 헤이스(Chris Hayes)와 함께 했던 대담 프로그램 '이 일은 왜 일어났나'의 56번째 에피소드에서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켈튼은 특히 이 대담 프로그램에서 "MMT는 약 25년쯤 전에 시작한 놀라운 프로젝트였다"며 "외부인이 제시한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6명의 경제학자들이 씨름하면서 탄생했다"고 밝혔다. 이때 그가 말한 '외부인'이 모슬러였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기원전 4세기 엄청난 영토를 장악한 알렉산더 대왕. 그와 그의 측근들은 노확한 귀금속을 고국에 가져가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엄청난 영토를 장악한 알렉산더 대왕. 그와 그의 측근들은 노획한 귀금속을 고국에 가져가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MMT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창시자 모슬러가 학문적 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래퍼와 맥나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연화경제학』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MMT는, 기묘하게도, 경제학자가 아닌 사업가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이론이다. 정치인이 소개해준 경제학자의 도움을 받아 간행된 얇은 에세이 한 권이 그 효시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많은 대다수 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외면당했던 이론이다. 그만큼 허술했다. 하지만 30년쯤 지나며 이 이론은 주류가 됐고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제 그 과정을 살펴 보자.

➀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돈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인간의 그 본성. 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권력까지 준다. 그러니 늘 필요하고 늘 부족하다. 돈은,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돈에 대한 인간 욕망의 끝이 아니다. 돈을 내 마음대로 찍어낼 수만 있다면···. 돈에 대한 인간 욕망의 끝은 바로 이 지점 어딘가에 있다.

➁그러나 돈은 아무나 찍어낼 수 없다.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자, 최강의 권력자다. 반대도 성립된다. 최강의 권력자는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자다. 그도 돈이 필요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그래서 돈을 찍는다. 돈 자체가 금ㆍ은 등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즉 '금화'나 '은화'였던 때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아니다. 그때도 돈을 찍어냈다. 금이나 은의 함유량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방법도 있었고 외부에서 귀금속을 약탈해 들여올 수도 있었다.

결과? 당연히 인플레이션이었다. 권력의 유지나 확장을 위해 전쟁이라도 치를 때는 특히 심했다. 엄청난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엄청나게 돈을 찍었고 그래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맞았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싶었던 권력자의 욕망은 인플레이션으로 끝이 나고 나라가 쑥대밭이 된 뒤에야 종료되고는 했다. 정치가 경제를 망가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➂옛날에는 통화량과 인플레이션의 관계를 몰랐을 것이라고? 아니다. 맥스 샤피로(Max Shapiro)는 자신의 책 『인플레로 돈 버는 사람들』(한울, 1991) 서문에서 다양한 사례를 예로 들며 고대인들도(심지어 원시인들도) 과동한 통화공급이 물가상승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했던 많은 사례 중 다음 두 가지를 보자.

<사례a> 기원전 1792년 권력을 잡은 바빌론 왕 함무라비의 법전 중 경제 부문에서도 통화와 물가의 관계에 대해 고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법전에 따르면 시골에서는 곡물을, 도시에서는 은을 화폐로 써야 했다. 왕실은, 자신은 돈을 풍족하게 쓰면서 전반적인 물가는 안정시키기 위해 곡물과 은이라는 2중 화폐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사례b> 기원전 4세기 경 엄청난 영토를 획득한 그리스 왕 알렉산더는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마케도니아로 가져가고 싶었다. 하지만 왕실 재정을 담당했던 관리는 반대의견을 냈다. 그들은 이 전리품이 마케도니아로 갈 경우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나라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④인류는 통화량과 인플레이션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도입 이후 국가는 권력자의 통화량 증대 욕구를 막으려는 몇 가지 제도적 장치를 강구했다. 귀금속 본위제가 첫째다. "우리나라 통화는 언제든 금이나 은으로 바꿀 수 있다"며 통화에 신뢰를 줬다. 함부로 돈을 찍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둘째는 중앙은행 제도의 도입이다. 권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중앙은행은 경제안정을 목적으로 스스로 금리ㆍ통화제도를 운영하도록 했다. 의회의 승인이 셋째다. 권력자의 국채 발행이나 발권에 대한 견제세력을 둬 함부로 돈을 풀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⑤하지만 돈에 대한 권력의 갈망은 이 세 가지 제재를 언제든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보라. 세계 패권국이 된 미국은 또 다시 돈을 풀기 시작했다. 자국 경제를 위해, 유럽 재건을 위해, 그리고 한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치러진 전쟁을 위해···. 의회도 국채발행과 통화량 확대에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1970년 미국은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며 마지막 남아 있던 금본위제도 파기시켰다. 이후의 혼란과 10~2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⑥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특별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의 가장 큰 위기였다. 자본주의의 근간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금리를 바닥까지 내렸어도 경기는 살아나지 못했다. 그러자 돈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의회도 이를 부정할 수 없었고 결국 돈이 풀렸다. 그럼에도 이 위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은 돈을 더 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금본위제는 없어졌다지만 재정적자나 국가부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금리를 인상할 즈음이었다.

⑦이 무렵 팬데믹이 찾아왔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금리인상을 멈추고 다시 금리를 낮춰야 했다. 거기에 돈도 엄청 풀어야 했다. 반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돈 풀기가 자칫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MMT였다. 국가채무는 빚이 아니다, 화폐주권국은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는 이상 얼마든 돈을 찍어낼 수 있다, 그러니 돈을 찍어라···.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통화공급에 대한 반대론이나 회의론을 잠재울 수 있는 훌륭한 논리였다. 돈을 찍어내고 싶은 권력자들은 MMT를 경제이론 최상층에 올려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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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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