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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2)더 본드⑯1914년, 그 역사성
영화로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2)더 본드⑯1914년, 그 역사성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8.16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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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는 독일과 러시아, 미국 역사와의 결정적인 연관성
1차 세계대전은 물론 러시아혁명과 美연준 설립 기폭 역할
『국가의 탄생』이란 영화가 나와 영화 역사 분기점 제공

현대 인류사에서 1914년은 매우 중요하다. 이 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 분야가 많다. 세계사는 물론, 유럽사, 영국사, 프랑스사, 독일사, 미국사, 러시아사 등 주요 나라의 국가사(國家史)에 1914년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전쟁사와 정치사, 국제관계사, 경제사, 금융사 등에서도 1914년은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해'로 기록된다.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으니 역사 전반에 큰 영향을 줬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이는 1차원적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 겪는 세계전쟁이 역사에 큰 의미를 주기는 했으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사건 하나를 보자. 이해 6월 28일 있었던 사라예보에서의 총격사건. 이 사건이 1914년을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피살됐고 이를 계기로 세계전쟁이 터진다. 이 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는 유럽사와 유럽의 각국사(各國史) 분야에서 이 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혹독한 것이었으며, 특히 패전국의 경우 감당하기 힘든 경제적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 추후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패전국 독일에게 부여했던 승전국들의 경제부담은 나치의 등장과 두 번째 세계전쟁의 불씨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는 좀 달랐다. 참전의 동기부터가 특이했다. 러시아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정치ㆍ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의회가 설치되는 등 자유민주주의가 싹트는 듯 보였지만 차르의 독재는 계속됐다. 황제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여전히 전제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왕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당연했다. 거기에 심각한 계층갈등과 파업이 나라를 혼란의 끝으로 몰아가는 듯 보였다. 지배계급, 특히 황실이 이를 불안해 했다. 나라 곳곳에서 혁명의 열기가 감지됐다. 전쟁이 터지자 차르 황제가 재빨리 참전한 배경에는 이 같은 내부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미국도 바다 건너 터진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직접 당사국은 아니었다. 유럽에 비해 한 걸음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유럽에서의 전쟁을 뺀다 해도, 1914년은 미국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앙은행이 설립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특히 경제ㆍ금융사 부문에서 이해의 중요성은 다른 어느 해보다 크다 할 수 있다. 한 해 전 연말, 즉 1913년 12월 23일, 윌슨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법(Federal Reserve Act)을 비준했다. 이로써 1914년 8월 10일 연방준비제도(FRS)가 출범했고 11월 14일에는 연방준비은행(FR-Bank)이 본격 영업을 시작했다.

■ 세계영화사도 1914년 전과 후로 시대 구분

D. W. 그리피스 감독
D. W. 그리피스 감독

사실 연준은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말했던 대로 연준은 1907년 미국경제에 불어 닥친 공황에서 시작됐다. 이때, 또는 이를 계기로, 또는 이를 빌미로 미국 경제ㆍ금융계는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6년이 지난 뒤 마침내 관련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이 유럽의 전쟁과 거의 동시에 설립됐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쟁은 돈'이라 했다. 나라 돈, 나라 경제는 그 나라 중앙은행이 관장한다. 전쟁을 치르며 중앙은행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만큼 중요하다. 신설된 중앙은행의 활동으로 미국은 전쟁의 와중에 엄청난 국부(國富)를 쌓으며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한다. 엄청난 우연이다.

그러나 역사가 부여하는 1914년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 연준, 러시아혁명과는, 진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또 하나의 역사 부문에서도 1914년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특정 분야의 역사는, 말 그대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뉜다. 최소한 그 분야에서 만큼은, 인류사가 예수의 탄생 전과 후로 나뉘는 것에 비유된다. 그게 어떤 분야냐고? 영화다. 보통 영화의 역사는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12월 관객에게 <기차의 도착> 등 10편의 활동사진을 틀어준 것을 그 기원으로 삼는다. 이후 20년 만에 역사가 '그 전'과 '그 후'로 나뉘었다. 프랑스의 영화사학자 르네 프레달(Rene Predal)은 저서 『세계영화 100년사』에서 "영화 이론가들은 1914년을 '원시영화'가 '고전영화'로 탈바꿈한 해라고 인정해 왔다"고 말한다.

D. W. 그리피스 감독이 1914년 제작된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 포스터. 통상 영화계는 이 영화를 기준으로 영화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눈다.
D. W. 그리피스 감독이 1914년 제작한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 포스터. 통상 영화계는 이 영화를 기준으로 영화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눈다.

이 역시 전쟁과 관련 있지 않느냐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 전쟁은 역사 전반에 큰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계가 1914년에 부여하는 의미는 이 '전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해에, 전쟁과 관계없이 태어난 한 편의 영화가 영화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한 것이다. 그 역사의 주인공은, 모든 영화이론과 영화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바로 그 영화, D. W. 그리피스(Griffith) 감독의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Nation)>이다. 원작은 토마스 딕슨(Thomas Dixon)의 소설 『클랜스맨(Clansman)』. 인종차별적 특성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리피스 감독은 이 영화 한편으로 '근대 영화의 아버지'나 '영화 언어의 창시자' 등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 영화 <국가의 탄생>은 정말 놀랍다. 『세계영화사』의 저자 잭 C. 엘리스(Jack C. Ellis)는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의 탄생>은 모든 종류의 전례들을 깨뜨렸다"고 썼다. 3시간에 이르는 러닝 타임은 이전까지의 최장 영화의 3~4배에 이르며 11만 달러의 제작비는 이전까지 쓴 최대 영화제작비의 5배를 넘는다. 영화계는 개봉 후 2년 동안 끌어 모은 관객의 수는 2500만 명에 벌어들인 수입은 50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이 같은 '물량적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이다. 클로즈업이나 미디엄 쇼트, 플래시백, 이중노출(double exposure) 등 요즘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영화기법을 자유자재로 쓴 첫 번째 영화다. 특히 감독의 천재성이 두드러졌던 '편집' 분야에서는 이후 '교범(敎範)'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워낙 중요한 영화다 보니 제작 일까지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1914년 7월 4일 촬영을 시작해 10월에 끝냈고 촬영을 위한 리허설에 6주, 촬영을 마친 뒤 편집에 2~3개월이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 공개는 1915년 1월 1일과 2일 양일에 걸쳐 진행됐다. 장소는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안 오페라하우스였으며 이때의 영화 제목은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해 <클랜스맨>으로 명명됐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개봉은 약 한 달 뒤 2월 8일 이뤄졌다. LA의 한 강당이었으며 첫 날 청중 수는 무려 3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대박'을 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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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광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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