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15:15 (화)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69)자존심 구긴 '정통관료'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69)자존심 구긴 '정통관료'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07.2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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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부총리의 취임이후 실권 없어지고 결재권도 패싱당해
뒷방 마님 신세로 전락…쓰루의 무시전략에도 張부총리 냉담
일하는 스타일은 물론 성격과 식성까지 달라 동거내내 평행선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쓰루가 왕초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된 것은 왕초가 기획원뿐만 아니라 전 경제부처를 손에 쥐고 앞으로 끌고 나아가면서부터였다.

왕초가 부총리로 오기 전에 쓰루는 이른바 '날리는 장관급 차관'이었다. 1961년 기획원 창설 멤버로서, 왕초 직전 김유택 부총리까지 7명의 장관 밑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6대 원용석 장관 때 차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차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맡기는 원용석, 김유택 두 부총리 때는 실질적으로 (인사 등) 기획원 안살림과 (물가, 예산, 기획 등) 정책 수립 및 추진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날리는 차관'은 왕초가 부총리로 온 후 날개를 접어야 했다. 그때부터 쓰루의 역할은 의례적 행사나 2차 계획 작성, 예산 등 밖으로 별로 생색이 나지 않는 일에 국한되었다. 민간기업에 힘을 쓰거나 대통령 앞에서 근사해 보일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왕초의 몫이었다. 왕초 장관의 등장은 곧 쓰루 차관의 퇴장이었다. 막강 차관은 졸지에 뒷방 마님 신세가 되었다.

기획원 관료 중에서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쓰루 입장에서 그런 대접은 어불성설을 넘어서 일종의 쇼크였을 것이다. 왕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왕초는 자신에 대한 차관의 지나치고도 공개적인 힐난에 대해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다. 때로는 차관이 아예 없는 듯 중요한 일도 그 밑의 직원과 직접 상의하거나 지시했다. 왕초는 업자들도 직접 만나 일을 해결해버렸고, 청와대와 직거래로 결정하고 밑에 바로 지시하곤 했다.

장기영 부총리 밑에서 찬밥신세였던 김학렬 차관은 와신상담꿑에 1966년 최연소 제무부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1969년 한국경제를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에 오른다. 장기영이 부총리 취임 5년뒤의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 정일권 총리(가운데)가 배석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정통 관료로서 자존심이 짓밟히고 깊은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모든 걸 정리해서 올려야 하는데……'라는 심정이었을 텐데, 권력의 상실감도 컸을 것이다."

왕초는 행여나 '국장, 차관 결재가 필요하다'며 늦어지는 서류가 있으면, "그 서류 바로 내 방에 가져와!" 해서는 서류 작성자와 왕초 사이의 결재란을 펜으로 쓱 긋고 자기가 사인해버리곤 했다. 왕초의 펜대 하나에 결재권이 없어져버린 쓰루는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직책의 권위를 신성시하는 그로서는 앙심을 품는 게 당연했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성격, 일하는 스타일, 하다못해 체격, 식성까지 달랐다. 눈을 씻고 보아도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었다.

체격은 하나는 뚱뚱이고 하나는 홀쭉이였고, 성격도 하나는 호탕하고 하나는 깐깐하기 짝이 없었다. 한쪽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 대식가이고 한쪽은 입이 짧은 소식가였다. 왕초는 쓰루가 말라서 신경질이 많다고 주장했고, 쓰루는 몸이 비대한 사람은 머리가 명석하지 못하다고 했다.

"왕초는 전형적인 보스 기질의 사나이였다. 왕초는 부하 조지는 일은 없었다. 자기가 다 결정해버리니까. 쓰루는 보스 기질이라기보다는 꼬장꼬장한 서당 훈장 스타일이었다." 왕초의 눈에 쓰루는 '꽉 막힌 관료'였다.

두 사람 간의 차이는, 해방·한국전쟁 등 불투명한 무법시대를 각자도생으로 살아남은 세대와, 4·19 혁명, 5·16 쿠데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투명한 법치시대를 관료적 정석대로 살아가는 세대 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일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왕초는 철저하게 효율 기준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법과 제도가 어떻든 알 바 아니었다. 그는 '뛰면서 생각한다'는 게 모토인, 돌진하는 불도저였다. 상의하달식으로 일 처리를 해나갔다.

"그는 일단 소신대로 밀어붙이고, 후에 생겨나는 후유증은 그것대로 치유해나가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을 집행해나갔다."

관련 법이나 제도 때문에 추진하고자 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법과 제도가 없으면 만들고, 법과 제도가 장애가 되면 뜯어고쳐 가면서 일을 벌였다. 법과 제도에 목숨을 거는 관료들에게 쾌도난마의 돌파력은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쓰루는 "대가리 안 좋은 사람이 가만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도 모자랄 텐데 뛰면서 생각하니 이게 제대로 되겠느냐? 그러니까 나라를 망쳐먹고 있다"며 빈정거렸다.

저지르는 것은 쓰루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관료의 전형이었다. 일을 벌이기 전에 사전 검토를 철저히 하여 문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 추진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수습하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법과 절차를 지키는 것이 기본 전제였다. 관련 법이나 제도가 없으면, 법이나 제도부터 만든 후 일을 추진했다. 법이나 제도가 장애가 되면, 일을 벌이기 전에 법을 개정하거나 규제를 푸는 것부터 했다.

왕초가 국제수지 적자 대책, 수출 진흥 정책 등 특정 정책을 밀어붙이는 식이라면, 쓰루는 거시와 미시, 정부와 기업, 투자와 소비, 외자와 내자 등 관계 부문 정책을 총망라하는 종합 정책을 즐겨 내놓았다. 5개년 계획, 물가 종합 대책 등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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