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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2)더 본드⑥제국의 합종연횡
영화로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2)더 본드⑥제국의 합종연횡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4.1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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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극복과 산업화를 지속하려면 새 시장과 원료 공급지 필요해 '식민지 각축전'
1871년 탄생한 '통일 독일제국' 러시아,英과 연합 저울질하며 세계질서 재편 야심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문제는 쇠(鐵)와 피(血)에 의해서만 해결" 힘의 외교 강조
영국과 러시아, 1891~92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된 후 '중국 이권' 놓고 대충돌

지난 번 글에서 썼듯, 세계 선진국들은 급속하게 산업화되고 있었다. 산업화는 곧 자본주의 체제의 심화를 의미했으며 또한 자본주의 체제는 주기적 또는 장기적 불황을 만들어냈다.

불황을 이겨내고 산업화를 지속하려면 새로운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가 필요했다.

그것은 주요 열강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이는 곧 세계 주요 선진국들의 세계 식민화가 이뤄졌음을 의미했다.

열강들의 '세계 식민지 각축전'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발칸은 그저 하나의 사례였을 뿐이다. 언뜻 보기에 새로운 상품시장이나 원료 공급지 문제는 실상 '산업'과 '경제', 그리고 '기업'의 문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에는 늘 나라의 명운이 달려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종국에는 국가마저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나 20세기 초에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식민지 경쟁'에 대한 국가의 참여. 이는 달리 말할 것도 없다. 우선적으로 외교력을 강화해 경쟁 상대의 힘을 빼앗아야 했고 궁극적으로는 '한 판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다. 당연히 한편으로는 '국가 간 합종연행'이 활발했고 군비경쟁이 치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국가 간 합종연행'을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독일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세기 후반까지 독일 지역은 지역 맹주 프로이센과 여러 소국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 이후 프로이센이 주변지역을 복속시키며 통일제국일 일궈나갔다. 그 끝을 본 것이 1871년 4월로, '독일제국헌법'이 제정됨으로써 오늘날 '독일'로 불리는 '독일제국'이 탄생하게 됐던 것이다. 당연히 프로이센 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제국 황제로, 프로이센 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가 제국의 재상(宰相)으로 등극했다.

새로 탄생한 독일은 그야말로 막강한 나라였다. 통일로 영토만 넓어진 게 아니었다. 인구 4000만 명의 이 제국은 가장 조밀한 철도와 가장 훈련이 잘된 40만 명의 군사를 지닌 강국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유럽의 또 다른 강국 프랑스를 박살내고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냈다.

철과 석탄의 보고(寶庫) 알사스ㆍ로렌 지방을 획득한데 이어 배상금 50억 프랑까지 손에 쥐었다. 이로써 독일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유럽 대륙의 패권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유럽 그 누구도 독일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 강력함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화가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가 그린 ‘독일 제국의 선포’.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정복 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출범을 선포한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독일제국의 황제로 취임한다.
독일 화가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가 그린 '독일 제국의 선포'.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정복 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출범을 선포한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독일제국의 황제로 취임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상처를 안겼다는 점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본래 프랑스 영토였던 알사스ㆍ로렌 지역을 빼앗긴 것만도 통탄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제국은 몇 걸음 더 나갔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가져갔는가 하면 프랑스의 왕국인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그것도 왕비가 가장 아낀다는 거울로 둘러싸인 초호화 방에서 통일된 '독일제국'을 선포했다. 그뿐 아니었다.

독일제국에 의해 벌어진 파리 코뮌과의 내전은 프랑스 국민에게 심각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안겨줬다. 독일은 프랑스를 짓밟으며 새로 출범한 독일제국의 힘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겠으나 프랑스 입장에서라면 치를 떫며 복수의 그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재상(宰相) 비스마르크가 그 한 가운데에 있었다. "독일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실력"이라며 "문제는 오직 쇠(鐵)와 피(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유명한 연설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철혈(鐵血) 재상'이라는 수식어가 달린다. 수식어만큼이나 강인한 성격의 그가 프랑스를 그토록 잔혹하게 밟은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에 버금가는 유럽 대륙의 강국이었다.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할 경우 통일된 독일제국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를 제압했음에도 비스마르크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프랑스는 강국이었다. 비스마르크 외교정책 1순위가 '프랑스의 고립'에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혼자'인 상태라면 결코 독일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연합한다면? 그건 곤란했다.

비스마르크의 이 정책에서 중요했던 나라는 러시아였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는다면 독일로서는 앞뒤를 모두 적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만다. 비스마르크가 통일 직후인 1873년 서둘러 러시아와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을 엮어 '삼제동맹(三帝同盟, Three Emperors League)'을 체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오스트리아ㆍ헝가리와 러시아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던 탓이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1878년 베를린회의를 통해 이 동맹을 깬다.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ㆍ헝가리만이 동맹국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이 '양국 동맹 체제'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자 이곳에 야심을 품고 있던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놓이자 1881년 독일이 이탈리아를 이 동맹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독일,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이탈리아 3국이 맺은 '삼국동맹(三國同盟, Triple Alliance)'이었다. 이 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에까지 이어진다.

■ 삼국동맹 vs. 삼국협상

당연히 프랑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고립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중요했다. 독일을 협공할 수 있는 좋은 파트너였던 것이다. 러시아도 싫지 않았다. 독일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편으로 보였고 또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이라는 숙원사업을 펼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독일로부터 들여오는 차관은 러시아의 젖줄이었다. 그 돈이 러시아를 프랑스보다 독일로 향하게 한 동력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1888년 독일에는 빌헬름 2세가 새롭게 황제로 취임했고 새 황제는 러시아에 차관을 제공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프랑스가 바로 그해 러시아에 5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던 것이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892년에는 군사협정까지 체결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이제 불안해진 것은 독일이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하나다 된다면? 독일의 안정도 보장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일전쟁 사후처리 과정에서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3국 간섭에 동참한 것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를 의식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했다.

1888년 독일제국에 새 황제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2년 뒤인 1890년 비스마르크가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외교정책도 바뀌었다. 범게르만주의를 표방했던 빌헬름 2세는 식민지 및 세력 확대를 꾀하며 이른바 '3B정책'을 펼쳐나갔다. 베를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개설해 지역 패권을 얻겠다는 심보였다. 즉위 당시 빌헬름 2세의 나이는 고작 스물아홉이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죽고, 이어 즉위한 아버지 프리드리히마저 즉위 99일 만에 암으로 세상을 뜨자 스물아홉의 나이로 유럽 대륙 최강인 독일제국의 황제가 됐던 것이다.

보어전쟁(1899~1902) 중 벌어진 클렌소 전투의 한 장면. 보어인들이 최초의 연발 자동소통으로 당시 최강 영국을 격퇴한 전투로도 유명하다.
보어전쟁(1899~1902) 중 벌어진 클렌소 전투의 한 장면. 보어인들이 최초의 연발 자동소통으로 당시 최강 영국을 격퇴한 전투로도 유명하다.

젊은 빌헬름 2세는 자국의 군사력에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독일의 정책은, 당연히, 주변 강대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스마르크 시절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한 고립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빌헬름 2세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주변국들이 독일의 고립을 추진했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독일의 재정지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빌헬름 2세 즉위 후 이 재정적 지원이 끊겼다. 그러자 러시아는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프랑스에 접근, 1891년 러시아-프랑스 동맹(Franco-Russian Alliance)을 체결한다. 이후 이 동맹에 영국이 참여, 1907년 영국-프랑스-러시아가 하나가 되는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나라가 있다. 바로 영국이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세계 패권을 쥔 영국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강자는 혼자 가는 법. 영국은 19세기 내내 북미와 인도, 중국 등을 상대로 혼자 자의 반 타의 반 세계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러다 독일제국을 맞는다. 독일이 통일되자 영국은 유럽 및 세계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한다. 이제 2~3개 나라가 연합해 영국과 대치하면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세기 들어 영국은 비로소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처음에는 독일과 손을 잡으려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유럽 어느 나라도 영국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네덜란드계 아프리카 백인인 보어인과 치른 '보어전쟁' 때문이었다. 보어인이 발견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에 지나치게 욕심을 낸 영국이었다. 광산을 얻기 위해 결국 보어인과 전쟁까지 치렀다. 영국의 이 같은 도발을 다른 유럽 나라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힘으로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내심 적개심이 생긴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영국은 유럽 주요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은 달랐다. 무엇보다 영국과 독일의 황가(皇家)가 남달랐다. 유럽의 황제들 혈통이라야 워낙 얽히고설켜 웬만하면 친인척 아닌 가계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의 황가는 워낙 가까웠다. 보어전쟁이 시작된 1899년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는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였다.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Victoria Adelaide Mary Louise)라는 긴 이름을 가진 빌헬름 2세의 어머니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첫째 딸이었던 것이다. 보어전쟁으로 고립된 영국은 외무부를 통해 "우리 4촌 나라인 독일과의 동맹을 고려할 수 있다"며 손을 내밀었던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러일전쟁 중 불타는 러시아 전함. 러일전쟁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정세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러일전쟁 중 불타는 러시아 전함. 러일전쟁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정세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하지만 독일이 영국과 손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영국과 적대관계에 있던 러시아 때문이었다.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ㆍ헝가리 간 '3제 동맹'이나 독일-러시아 간 '2중보호조약' 등의 파기로 동맹관계는 아니었으나 독일은 여전히 러시아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로써 영국은 이제 유럽에서 마땅한 파트너를 찾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영국은 아예 시선을 더 먼 곳으로 둔다. 유럽을 뒤로하고 아시아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그곳에는 영국의 최대 이권이 걸려 있던 중국이 있었고, 수십 년 간 영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 온 새로운 강국 일본이 있었다. 동아시아 팽창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던 일본은 러시아를 최대 적대국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영국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사실 영국에게 가장 거북한 존재는 러시아였다. 세계 최대 영토를 자랑하는 데에다 남하정책을 최우선으로 하던 탓에 곳곳에서 영국과 충돌했다. 거기에 20세기 중후반 이후 러시아는 영국의 최대 이권이 걸려 있던 중국에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특히 1891~92년 사이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착공되면서 양국은 중국 문제에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1890년대의 영국은 중국 무역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중국과의 무역은 영국 총 무역량의 65%에 이르고 있었다. 영국에게,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러시아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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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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