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견습생으로 시작해 빌헬름 9세의 신임바탕 공식 금융업자로 전면에 등장
나폴레옹이 영국의 경제에 타격 주고자 대륙봉쇄령을 내릴때 밀무역으로 축재
로스차일드-피바디- 모건가문의 인연 눈길…美연준의 지배구조는 아직도 미궁

■ 한 나라의 주식ㆍ채권 62%를 보유한 사나이
전설적인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는 앞서 말한 대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다. 1744년, 신성로마제국 프랑크푸르트의,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다. 열 셋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이유다. 13세였던 1757년 그는 한 은행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미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인류 역사 상 최대 부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를 축적한다.
이 같은 부를 쌓는 데에는 몇 차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독일의 소국 헤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의 아들로 태어나 추후 영주의 자리에 오르는 빌헬름 9세가 제공했다. 헤센에서 일개 환전상으로 활동하던 마이어는 1764년 빌헬름 9세를 만나 신임을 얻은 뒤 승승장구했다. 1785년에는 빌헬름 9세가 마침내 공국을 승계하자 자녀들까지 일을 하면서 부는 늘어갔다. 1789년 마이어는 헤센카젤 공국의 정식 금융업자로 지명되어 대외신용과 대외업무를 담당했다.
1803년 시작된 나폴레옹전쟁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흥에 기여한 두 번째 계기였다. 이 전쟁은 두 개 측면에서 가문의 부의 축적을 도왔다. 첫째는 밀수였다. 1806년 해전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주고자 대륙봉쇄령을 내리자 마이어는 셋째 아들 네이선을 영국에 보내 밀무역을 도모했던 것이다. 특히 대륙에서 가격이 폭등한 영국의 면제품을 들여와 톡톡히 재미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08년에는 런던에서 사무실을 오픈하고 네이선이 런던에서 상업어음을 발행하는 금융업을 시작한다. 빌헬름 9세의 자금관리가 두 번째 측면이다.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빌헬름 9세는 마이어에게 모든 재산을 맡기고 도망쳤는데, 이후 마이어는 빌헬름 9세의 재산을 목숨 걸고 지켜냄으로써 그로부터 전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1815년 워털루 전쟁을 끝내며 로스차일드는 결정적인 부를 축적한다. 잘 알려진 대로 런던 증시에 프랑스의 승리를 퍼뜨리며 폭락한 주식과 채권을 사모아 거부가 된다. 당시 영국 주식과 채권 62%가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손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영국 전체가 로스차일드 것이라 말할 만하다. 그들이 잉글랜드은행을 장악한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이들은 나아가 1844년 은행허가법(Bank Charter Act)을 이끌어내 독점적인 화폐발행권까지 갖게 된다.

이제 로스차일드 가문과 모건 가문의 연계 과정을 알아보자. 이 두 가문의 '역사적 기원'에는 미국의 기인(奇人) 재벌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가 있다. 매사추세츠 출신인 피바디 역시 마이어처럼 극빈층 출신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여섯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장남이었다. 학교 한 번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삼촌의 잡화상에서 죽도록 일만 해야 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단 한 번도 가난의 상처를 잊은 적 없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매사추세츠에서 볼티모어로 이사한 그는 사업가와 금융인으로 성장한다. 영국을 오가며 당시 미국의 여러 주(州)들이 발행한 정부채권 발행을 돕던 중 1835년 파산한 메릴랜드주 채무조정 대리인으로 영국 금융계 주요 인사들을 접하게 된다. 1837년 이때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그는 아예 런던에 정착한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투자은행으로 애기될 수 있는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를 설립, 본격적인 금융인의 길을 걷는다.
이 무렵 피바디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로스차일드가 그에게 비밀홍보를 부탁한 것이었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로스차일드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티를 열어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아직 영국 사교계에 알려지지 않은 활달한 미국인인 피바디에게 비밀스러운 자기 홍보를 부탁했고 피바디는 흔쾌히 이 요청을 승낙했다고 한다. 이후 피바디의 승승장구에는 로스차일드의 다양한 지원이 있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피바디라는 인물 앞에 '기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다 있다. 그 중 하나가 거부(巨富)임에도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자신이 쌓은 부를 물려줄 대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혼하지 않은 채 나은 혼외(婚外) 자녀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피바디는 그들에게도 상속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피바디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교육 및 자선사업에 기부해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말년(末年)의 그에게는 무엇보다 사업을 전수해 줄 대상을 찾는 게 중요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J. S. Morgan)이었다. 58세였던 피바디는 1853년 친구 제임스 비비의 소개로 미국의 금융 자본가였던 그를 만났던 것이다. 1813년생이었으니 J. S. 모건은 당시 나이 마흔이었다. J. S. 모건이 피바디를 처음 만난 날 아들 J. P. 모건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인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을 대동했는데, 1837년생이었던 J. P. 모건은 당시 나이 열여섯이었다.
■ 피바디, 모건 ... 로스차일드 사람들?
피바디는 주니어스 모건에 매후 흡족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건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피바디의 후임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모건으로서는 횡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피바디사는 로스차일드와 베어링 브라더스에 이어 영국 내 3위 은행이었다. 그와 동업자가 된다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10년 후에는 피바디의 돈과 그의 이름이 담긴 회사를 물려받는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모건은 1854년 정식으로 계약한 후 그와 파트너가 됐다.
약속은 지켜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10년 후 피바디와 모건의 약속은 절반만 지켜졌다. 피바디는 약속대로 은퇴를 했고 경영권을 모건에게 넘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피바디는 은행에서 자기 자본금을 뺐고 자신의 이름도 회사명에서 없앴던 것이다. 은퇴 후 금융가나 사업가로서의 이름을 지우고 전적으로 자선사업가로 나설 계획이었던 피바디로서는 불가피했던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피바디의 '절반의 약속 파기'로 모건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조지 피바디 사(George Peabody & Co.)는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사(Junius Spencer Morgan & Co.)로 거듭났다. 이것이 19세기 중반 시작해 무려 100년 가까이 미국경제를 호령했던 모건 그룹(Morgan House)의 시작이었다. 피바디는 모든 경영에 손을 떼고 오직 자선사업에만 열중, 그의 노년을 마감함으로써 '자선의 왕'이라는 칭호를 획득했다. '기업을 일궈 번 돈으로 자선사업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는 미국식 기업인의 이상형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로스차일드-피바디-모건으로 이어지는 서구 금융사의 대략적인 줄거리에는 음모론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피바디의 헌신적인 노년 생활로 인해 오히려 청렴한 금융인의 삶을 보며 경건한 마음까지 든다.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피바디는 해당이 안 된다 해도 앞서 정리했던 로스차일드와 모건의 활동에는 음모론이 끼어들 소지가 꽤 있다.
그럼에도, 물론 앞서 말한 대로 또한 이 음모론은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무시되기 일쑤다. 왤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정식으로 역사 또는 경제를 연구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인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직업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언론인이나 작가 출신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소설을 썼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이 취합한 1차 자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확실히 이들의 직업은 정통 역사학계의 신뢰를 받기 어렵다. 곳곳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 음모론 ... 죽은 로스차일드가 공황의 주도자?
예를 하나 들어보자. 멀린스나 엥달, 쑹홍빙 등 대부분의 '음모론' 주창자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의 1차 중앙은행 설립에 깊이 간여했다고 주장한다. 1차 중앙은행 설립을 주도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당시 재무장관이 로스차일드 가문이 심어놓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엥달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최대 주주였을 것"이라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또한 쑹홍빙은 "국제금융재벌은 드디어 중요한 첫 승리를 거뒀다"며 "잉글랜드 은행과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미국 중앙은행의 주요 주주가 됐다"고 썼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첫 번째 중앙은행이 설립된 해는 1791년으로, 앞서 말한 대로, 아직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유럽을 장악할 정도의 부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큰돈을 벌게 된 계기가 됐던 세 차례 기회, 즉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워털루 전쟁은 각각 1792년과 1803년, 그리고 1815년 개시됐다. 1791년 로스차일드 가문은 아직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할만한 재력이 부족했다. 쑹홍빙 스스로도 "1800년에 이르러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일가는 유대인 갑부가 됐다"고 했다.
1차 미국 중앙은행과 관련된 음모론자들의 주장이 별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이 은행의 주요 주주로 거론되는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777년 태생으로 첫 번째 중앙은행이 설립됐던 1791년에는 겨우 열네 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첫 번째 중앙은행이 설립된 이후에는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 중앙은행이 문을 닫은 게 1811년으로 이 무렵이면 그의 나이 서른여섯으로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성장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엥달은 네이선과 함께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다섯째 아들인 제임스가 미국 두 번째 중앙은행의 대주주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인 공식 사실은 이와 다르다. 두 번째 중앙은행의 최대 주주는 주식 20%를 보유했던 연방 정부였으며 나머지 80%에 대한 주주의 수는 무려 400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중 상당량이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일 수는 있겠으나 이 역시 공식적인 것은 알 수 없다.
엥달의 주장에는 더 분명하고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1837년 미국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공황은 두 번째 중앙은행의 최대 주주였던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재계약 연장을 위해 잉글랜드은행을 이용해 일부러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이 주장은 사실 객관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번째 중앙은행의 계약 연장 건은 한 해 전인 1836년 이미 종결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오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공황 한 해 전인 1836년 사망했다는 점이다. 죽은 사람이 돈을 더 벌려고 경제공황을 일으킨다?
엥달의 오류는 또 있다. 엥달은 두 번째 중앙은행이 폐지된 해를 1841년으로 명기했으나 이 또한 오류다. 두 번째 중앙은행은 1836년 폐지됐으며 이후 5년 동안은 일개 민간은행으로 잔존했을 뿐이다. 이와 관련된 엥달의 주장 모두는 두 번째 중앙은행이 1841년까지 존속했다는 착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존 타일러 대통령이 임기 초기 거부한 법안은 두 번째 중앙은행의 재연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두 번째 중앙은행 폐지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국립은행(National Bank)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처럼 음모론에는 결정적인 구멍들이 여럿 있다. 다수의 사실 관계가 틀리다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일 것이다. 그러니 음모론자들이 제시한 1차 사료들도 일일이 검증하지 않으면 믿기 어렵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렇다면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정통 역사학계의 연구는 없다는 말인가? 있다면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되지 않나. 이 같은 생각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축재 과정은 철저히 비밀로 지켜져 있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부의 축적과 상송 과정은 비밀로 하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정통 역사학계의 권위 있는 학자가 쓴 방대한 연구가 있어 눈길을 끈다. 영국의 역사학자 닐 퍼거슨(Niall Ferguson)의 연구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정치사 및 금융사 담당 교수인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일간신문 『더 타임스』로부터 "당대 최고 역사가"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국내에도 권력과 돈의 역사를 쓴 『현금의 지배』(김영사, 2002)와 영국의 세계제국 건설을 그린 『제국』(민음사, 2006) 등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방대한 양의 로스차일드 연구를 내놨다. 1998년과 1999년 두 해에 걸쳐 각 한 권씩 모두 두 권으로 된 방대한 연구였다. 1988년 작 『로스차일드 가문: 돈의 예언자, 1798~1848(The House of Rothschild: Money's Prophets, 1798~1848)』은 520쪽, 1999년 작 『로스차일드 가문: 세계의 은행가, 1849~1999(The House of Rothschild: The World's Banker, 1849~1999)』는 540쪽에 이른다. 한 눈에도 정통 역사학자가 1차 및 2차 사료를 치밀하게 섭렵한 뒤 내놓은 노작(勞作)임을 알 수 있다. 2013년 김영사에서 번역서를 출간,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 당대 최고 역사학자의 변 ... "미리 보기는 했어도 검열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안타깝게도 이 '대가의 노작'은 정통 역사학자들이 아마추어로 낮춰보는 언론인이나 작가의 글보다 더 신뢰받기 어려워 보인다. 저자도 밝혔듯이 이 책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과 허락 아래 로스차일드 문서보관소 자료를 검토했고 발간 전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리 읽어봤다. 저자는 "로스차일드 가족들이 초고를 읽은 것이 검열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둬야겠다"고 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독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일 것이다. 퍼거슨의 책을 통해 '음모론'에 대한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소문'을 가려보고 싶다는 희망과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퍼거슨의 책은 거의 모든 '음모론'을 부정한다. 치밀하게 음모론과의 일전(一戰)을 준비해 온 전사(戰士)인 양 그는 서론부터 음모론에 대해 가차 없는 칼질을 해 댄다. 비록 멀린스나 엥달, 쑹홍빙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들 주장의 근간이 되는 이전의 음모론을 비판한다. 데이비드 아이크(David Icke)나 돈 앨런(Don Allen), 셔먼 스콜릭(Sherman H. Skolnick) 등의 주장에 대해 "기상천외한 글"이라 단언한다(1권 p.51). 심지어 레닌과 함께 제국주의론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되는 존 앳킨슨 홉슨(John Atkinson Hobson)에 대해서는 "조야한 이론"으로 폄훼한다(2권, p. 655).
여기까지는 정통 역사학자가 갖는 '권위의 소산'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퍼거슨은 더 나간다. 미국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중앙은행의 설립 배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 설립 당시 두 중앙은행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는 거의 적대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 중앙은행을 로스차일드가 지배했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게 있다. 퍼거슨이 자신의 책에서 연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준'이라는 단어는 인덱스에서조차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준은 실제로 거론조차 할 필요가 없을 만큼 관계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준의 관계에 대해서만큼은 '음모론'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굳이 피해간 것일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세 번째, 즉,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준의 관계에 대한 언급 회피는 '음모론'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일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첫째, 로스차일드 가문이 연준과 얽혀 있다는 객관적 자료가 있고, 둘째, 이 사실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물론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결코 소홀히 보기 어려운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통 역사학자인 퍼거슨이라면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준의 관계를 반드시 서술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준과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그 해석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제 마지막으로 연준과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관계에 대한 음모론을 검토해 보자. 다음은, 음모론 중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①1815년 워털루전쟁 이후 유럽 금융의 최대 실세는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잉글랜드은행 역시 그들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영향력은 100년이 지나 연준 설립 때까지도 이어진다.
②앞서 말했듯 로스차일드-피바디-모건의 관계를 보았을 때 미국 금융의 최대 실력자였던 J. P. 모건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건은 성장기에 피바디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을 받았으며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융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③벤저민 스트롱과 헨리 데이비슨이 소속돼 있던 뱅커스 트러스트, 그리고 폴 와버그가 소속돼 있던 쿤롭은 모두 모건의 단독 또는 공동 소유였고 이들 3인은 모두 모건의 최측근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인물들이었다. 여기에 미국의 금융계 두 거물 밴덜립과 노턴 은행장도 모건과 긴밀한 관계였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최소한, 연준은 모건의 손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④물론 모건 뒤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특히 폴이 속해 있던 쿤룹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회사는 1867년 독일 출신 은행가인 아브라함 쿤(Abraham Kuhn)과 그의 처남인 솔로몬 롭(Solomon Loeb)이 설립한 미국의 다국적 투자 은행이다. 롭의 사위로 추후 이 은행의 실질적인 지배가 된 제이콥 쉬프(Jacob H. Schiff)는 로스차일드 수하에서 일하던 그의 심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⑤마지막으로 멀린스는 연준 설립 당시의 관련 문건을 찾아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연준 지분의 상당량을 모건과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배하는 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문건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사실 관계에서의 오류가 적지 않아 이 문건이 의심받은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상 미국 중앙은행의 굴곡진 역사에 대한 '다수의 견해'와 '음모론'을 대비해 살펴봤다. 워낙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라 확인할 게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많이 걸렸고 글도 무척 길어졌다. 초고는 이 마지막 원고의 두 배 분량이나 됐다. 여러 차례 확인하고 검토하고 정제했다지만, 그럼에도 답답하다. 서로 다른 주장과 자료의 틈바구니에서 확언(確言)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다. 누군가가 속 시원히 이 문제를 밝혀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이제 이 긴 글의 결론을 내 보자. 우선 세 차례에 걸친 미국의 중앙은행 설립과 로스차일드 가문과 관련된 '음모론'은, 전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무엇보다 사실 관계에서의 오류가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음모론'이 그저 '론(論)'이나 '소문' 정도로만 그치기도 어렵다. '정황'과 '근거'로 봤을 때 그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밝혀진 '사실(史實)'만으로도 미국의 세 차례 중앙은행, 특히 연준의 설립과 로스차일드 및 모건 가문의 연결고리는 의심을 살만 하다. "연준은 지금이라도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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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