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서 담금질해 '진짜 사나이'로 변신 … 2006년 월드컵 앞두고 무릎 부상 불운
그가 세운 골기록(228골) 71% 30세 넘어 넣어 …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아"교훈
이동국이 은퇴했다. 축구에서 골키퍼가 아닌 공격수가 40세 넘어서도 현역으로 뛴 것은 눈여겨 볼만한 일이다. 그만큼 자기 관리에 뛰어났다는 증거다.
이동국을 보면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만 18세의 최연소 대표로 출전,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 후반 교체 출전해 호쾌한 중거리 슛으로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비록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고, 16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역설적으로 프로축구에서는 이동국 신드롬이 일었다. 소속팀 포항 스틸러스 경기는 연일 매진이었다. 이동국은 20세 이하 월드컵과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너무 일찍 맛본 환호가 독이 된 것일까. 옛 선조들은 '소년 급제'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 크다는 경고였다.
2000년 말 부임한 히딩크 감독은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박지성, 차두리 등을 중용하면서 이동국은 빼버렸다. 히딩크는 이동국을 "어슬렁거리는 게으른 천재"라고 했다. 정확한 진단이었다.
월드컵 4강의 환호를 애써 외면하던 이동국은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명예 회복을 노렸다. 그러나 준결승전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졌고, 이동국은 군대를 가야 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못하다고 여긴 친구들은 월드컵 4강으로 군 면제를 받았는데 자신은 군대를 가야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었다. 하지만, 군대는 이동국에게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였다. 상무에서의 규칙 생활은 '게으른 천재'를 '성실한 진짜 사나이'로 만들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이동국은 절정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4월 5일 경기 도중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월드컵과 인연이 없음을 한탄해야 했다.
이동국은 2009년 전북 현대로 팀을 옮겼다. 최강희 감독은 "동국이의 눈빛에서 절박함을 봤다"고 했다. 이동국은 그 해 22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팀과 자신의 프로 첫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이 때가 만 30세였다.
'소년 급제'에서 '불운의 아이콘'으로, 다시 '대기만성'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동국은 전북에서만 12시즌을 뛰면서 162골을 넣었다. 그가 세운 K리그 최다골 기록인 228골 중 축구선수로는 노장으로 불리는 30세 이후에 넣은 골이 전체의 71%다. 만 18세에 스타덤에 오른 이동국이 29세까지 12시즌에 넣은 골이 66골(29%)이었으니 그의 후반기가 얼마나 빛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은퇴 경기에서 또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멋진 피날레였다.
천재가 좌절했을 때 재기할 가능성은 일반인보다 더 어렵다. 그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동국은 그 어려운 것을 해냈다. 연속된 불운은 천재라는 자부심을 버리게 했고, 억지로 가야했던 군대는 그에게 성실함이라는 선물을 줬다. 이동국은 우리에게 '마지막이 좋으면 좋다'는 인생의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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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6년 중앙일보 입사. 사회부-경제부 거쳐 93년 3월부터 체육부 기자 시작.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주요 종목 취재를 했으며 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98년 프랑스 월드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한일 월드컵,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을 현장 취재했다. 중앙일보 체육부장 시절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으며Jtbc 초대 문화스포츠부장을 거쳐 2013년 중앙북스 상무로 퇴직했다. 현재 1인 출판사 'LiSa' 대표이며 저서로 부부에세이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와 소설 '파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