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8 23:45 (목)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3)'학병 동기' 김수환 추기경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3)'학병 동기' 김수환 추기경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12.2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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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앙대 졸업하던 해에 징집당해 막바지 태평양 전쟁 출병 대기
일부 조선학생의 남양군도 투입 하루 전날밤에 '아리랑' 송별곡 해포
금지곡 불렀다며 日本장교 金추기경 폭행하자 쓰루가 칼 커내 맞짱
광복후 생환한 쓰루 눈에 비친 조국은 미국만 바라보는 '헐벗은 나라'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졸업 후 1941년 쓰루는 일본 주오대(中央大) 법학부에 진학했다. 사실 주오대는 그의 선호 1순위는 아니었다.

그는 도쿄제국대에 들어가고 싶었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도쿄에 있는 인문계 예비학교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예비학교 입학에서부터 좌절되었다. 이때의 좌절로 인한 학력 콤플렉스가 평생을 두고 지적 탁월함에 대한 집착을 부추겼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주오대를 졸업하는 해에 그는 학병으로 징집당했다. 학병훈련소 동기 중에는 훗날 추기경이 되는 김수환과 국회 부의장이 되는 구태회 등이 있었다.

어느 날 한국 학병 중 일부가 남양군도(南洋群島·South Sea Islands)로 출병 가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최고의 격전지인 남양군도 출병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이었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김학렬은 일보 주오대(중앙대)를 졸업하는 해에 학병으로 징집당했다. 학병훈련소 동기 중에는 훗날 추기경이 되는 김수환과 국회 부의장이 되는 구태회 등이 있었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김학렬은 일보 주오대(중앙대)를 졸업하는 해에 학병으로 징집당했다. 학병훈련소 동기 중에는 훗날 추기경이 되는 김수환과 국회 부의장이 되는 구태회 등이 있었다.

조선 학병의 '마지막'을 위한 송별 곡은 「아리랑」이었다. 문제는 「아리랑」이 금지됐다는 것. 곡의 정서가 일본 제국주의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 학병 막사에 들이닥친 헌병과의 옥신각신 중에 김수환 학병이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때 일본도를 빼 들고 "이래저래 죽을 거 느그들 죽고 나도 죽자"라며 거칠게 대든 게 쓰루였다. (그 후 조선 막사에서는 출병식 때 「아리랑」을 부를 수 있게 정리되었다.) 그때의 '불같은' 그에 대한 인상은 남양군도 파병에서 살아남은 김수환, 구태회 등이 종교, 정치 등 각자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당시 그가 일제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운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절실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개혁적 엘리트를 중심으로 상하 일체로 국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즈음 유럽의 선진 강국과 미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 지배 아래 두고 있어서 제국(empire)으로 불리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제국 대열에 낄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유일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거국적인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일본은 서양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패전을 앞둔 일본의 그런선전이 기승을 부릴수록, 쓰루 같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독립하여 부국강병으로 우리 두 발로 우뚝 서야 한다'는 절심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8·15 광복 직후 쓰루는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해방 조국은 희망찬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폭격만 당하지 않았을 뿐, 경제적 폐허였다. 36년 일제의 착취가 할퀴고 간 한반도, 특히 남한에 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하에서는 조선인 기업가나 기술자 계층이 길러질 수 없었다. 제조업 자산의 3%만 조선인 소유였고, 기술자 5명 중 1명만 조선인이었다. 게다가 공업 기반의 80% 이상, 철광석 및 석탄 매장량의 거의 100%가 북한에 소재하고 있었다. 농업 중심의 남한에는 공장이 남아있다고 해본들 하루살이 경공업이 고작이었다.

22세의 쓰루가 마주한 '내 나라'는 남과 북으로, 좌와 우로 갈기갈기 찢어져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다. 그런 총체적 혼란은 찢어지게 가난한 신생 개발도상국(개도국) 한국을 더욱 깊은 빈곤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한은 산업화에 필요한 기계 등 자본재와 주요 원자재를 모두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쌀 이외에 기본생활을 위한 모든 물자를 제2차 세계대전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 군정의 시혜에 기대야 했다. 몇 안 되는 공장마저 파업이다 자재 부족이다 하여 태반이 멈춰 서 있었다. 수많은 실업자가 거리를 헤매는데, 일본, 만주, 북한 등지로부터 100만여 명의 귀환 동포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8월 해방 후 연말까지 5개월 사이에 물가는 16배 뛰었고,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안정을 찾았는데도 인플레이션이 25%에 육박했다. 극빈 개도국 한국은 일제 말 '식민지 경제 조선'으로부터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뒷걸음질은 1953년까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퇴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남한 경제가 해방 전 수준을 회복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라는 추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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