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 10:25 (금)
'세계 일류' 큰 길 연 이건희 회장 수원 선영서 영면
'세계 일류' 큰 길 연 이건희 회장 수원 선영서 영면
  • 이코노텔링 고윤희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20.10.25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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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사회적 한계를 뛰어 넘는 '혁신과 창조' 주창해 국내 산업계의 세계화 선봉에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발언으로 견제받았지만 삼성을 반석위에 올려
그는 회장 취임식부터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주창했다. 취임과 동시에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근본적 변혁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신경영 10주년인 2003년 '천재경영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 '창조 경영'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반도체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올랐다. 사진=삼성.
그는 회장 취임식부터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주창했다. 취임과 동시에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근본적 변혁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신경영 10주년인 2003년 '천재경영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 '창조 경영'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반도체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올랐다. 사진=삼성.

지난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인이 28일 엄수됐다. 서울 삼성병원에서 열린 발인식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장지는 수원 가족선영이다. 고인의 운구차는 이 회장이 열정을 쏟았던 화성 반도체사업장과 승지원 등을 거쳐 장지로 이동했다. 

향년 78세인 이 회장은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이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6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1942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한국전쟁을 피해 일본에서 중학교를, 서울에서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이 회장은 1987년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을 이끌었다. 그는 회장 취임식부터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주창했다. 취임과 동시에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근본적 변혁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신경영 10주년인 2003년 '천재경영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 '창조 경영'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반도체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올랐다.

미래 비전과 변화, 창조, 혁신을 강조한 '이건희식 경영'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같은 경영 이면에는 좌절도 적잖았다.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 사업 실패다. 이 회장은 1995년 숙원이었던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외환위기 등을 겪으며 좌초했다. 4조3000억원 부채를 안은 채 1999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 회장은 정치가 경제를 억누르는 상황에서도 할 말을 다한 경영인으로 꼽힌다. 1995년 4월 중국 베이징 출장길에 특파원들과 간담회에서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언급했다가 당시 정치권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혁신과 창조경영 신드롬은 우리나라 산업발전 단계를 단순  '선진국 추격'형태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큰 길을 열었다. 근대 산업사에서 이건희 회장처럼 '세계일류'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기업인은 많지 않다.  삼성의 경영혁신은 곧 국내 경영, 산업계에 '우리도 글로벌 시장을 이끌수 있는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이 회장은 2003년 소득 2만달러 시대를 가장 먼저 주창한 경제인이었다. 또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하고 2011년 평창올림픽 유치를 이끌었으며, 근대 미술의 보고인 리움미술관을 설립한 스포츠인이자 문화예술인이었다. 사업으로 나라에 이바지한다는 삼성 이병철 참업주의 경영이념(사업보국)을 충실하게,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 삼성을 글로벌 선진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물론 그를 둘러싼 여러 평가도 있지만 2세 경영인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시대적 여건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군사 정권의 등장과 IMF 외환위기란 국난의 상황을 뚫고 경제와 산업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는 것이 재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업적은 단순히 반도체와 같은 산업적 성취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도전정신과 혁신의 경영철학은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 울림이 크고 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장례는 삼성전자와 유족들의 결정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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