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권력의 버섯인줄만 알았는데 진짜를 보았다"
"일찌기 위대하던 것들은 이제 부패하였다. 사제는 토끼사냥에 바쁘고 사교는 회개와 순례를 팔아 별장을 샀다."
김성한이 1956년 발표한 단편소설 〈바비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바비도? 섬도 아니고 명검은 더욱 아니다. 왕과 사제들이 라틴어를 무기로 종교, 결국 국민의 정신을 지배하던 중세 영국의 한 재봉직공 이름이다. 소설은 영역(英譯)성서를 읽던 바비도가 법령을 어겼다 해서 체포되어 결국 화형장에서 한 줌의 재로 스러지는 과장을 담은, 어찌 보면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소설 묵직하다. 드라마틱한 이야기 대신 '양심'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재판과정에서 사상의 자유를 둘러 싼 태자와 바비도의 실랑이, 회개하면 살려주겠다는 태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진해서 화형을 당하는 바비도. 시대와 나라를 떠나 권력의 부조리는 상존하고, 이에 맞서 양심과 자유에 충실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값진지 일깨운다 할까.
교과서에 실리거나 입시에 출제되지 않은 탓인지 작가나 이 작품의 지명도는 높지 않지만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낮지 않다. 1967년엔 '한국 근대소설 50주년'이라 해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그 하나로 평론가등 문인 50명의 응답을 토대로 『한국 단편문학 12 명작집』(백미사)이 나왔는데 여기에 김동인 염상섭 황순원 등의 대표작과 나란히 실렸으니 말이다. 발표 당시 제1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니 더 보탤 말이 없다.
한데 이 작품 접하기 쉽지 않다. 한국문학 관련 전집 정도에 '박제'가 되어 있는 정도다. 오래 전 발표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가 본인이 문학적 활동보다 『사상계』 주간,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이 더 두드러진 탓이 아닌가 한다. 그가 전업작가로, 혹은 대학교수로 무리를 짓거나 후학을 키웠더라면 또는 1950, 60년대 이후에도 『요하』, 『왕건』, 『임진왜란』 등 신문소설 대신 순수문학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지식인소설의 큰 맥을 이루어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으리란 아쉬움이 크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 중반, '양심'을 이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힘이다…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고 약한 것이 문제다. 힘은 진리를 창조하고 변경하고 이것을 자기 집 문지기개로 이용한다."(바비도의 탄식) 이런 보석 같은 구절이 점점이 박힌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란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바비도 회유에 끝내 실패한 태자의 감탄이다. '무서운' 시민들이 갈수록 필요해지는 요즘, 이 짧은 소설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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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