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 14:45 (금)
◇김수종의 취재여록⑪'살인적 인플레' 브라질에 첫 발
◇김수종의 취재여록⑪'살인적 인플레' 브라질에 첫 발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0.11.19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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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100달러를 브라질 돈으로 바꾸니 호주머니가 '불룩'
농업이민갔던 교포 95%가 도심으로 들어가 상인변신
80년대 초반부터 유태인 소유 의류가게 잇달아 인수해
상파울로 교민들은 우리식 계(契)만들어 달러 목돈 마련

 여하간 나는 브라질로 떠나기전엔 남미의 대륙 끝 마을에 사는 생면부지의 한국인 개척자 문명근씨의 사진 한 컷에 모든 걸 걸고 준비해야 했다. 신문사일지라도 국제전화 걸기가 신경 쓰이던 때였지만, 필요할 때마다 상파울루 지사장에게 전화해서 협조를 당부했다.

 취재여행을 앞둔 마지막 전화에서 그는 "걱정 말고 취재비만 잘 받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쪽 브라질은 겨울이니 겨울옷과 여름옷을 같이 챙겨 오십시오."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브라질이라면 여름만 생각했는데 겨울옷 얘기에 의아했다. 하여간 해외취재를 할 때 느꼈던 일이지만 신문사 현지 지사장, 대사관 공보관, 한인회장이 기자가 가장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37년전 브라질에 도착하자 살인적인 현지 인플레에 놀랐다 덩시 필자는 리우데자네이로,이과수 폭포, 한인 이민농장 산타마리아 농장, 구리치바 도시 등을 둘러봤다. 사진(리우데자네이로의 예수동상)=김수종 이코노텔링 고문.
필자는 37년전 브라질에 도착하자 살인적인 현지 인플레에 놀랐다 덩시 필자는 리우데자네이루,이과수 폭포, 한인 이민농장, 산타마리아 농장, 구리치바 도시 등을 둘러봤다. 사진(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 동상)= 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5월 15일 상파울루 국제공항에 내려 남미 일정에 들어갔다. 미국 도시와는 다른 세계였다. 오히려 서울과 비슷했다. 이철 국장은 싸구려 호텔에 묵지 말고 힐튼이나 하이야트 같은 고급호텔에 묵으라고 했지만 마중 나온 홍성학 지사장이 자신의 집에서 가깝다며 일본계 호텔을 잡아 주었다. 힐튼의 반값이었다. 홍 지사장은 나는 동갑인 것이 확인되자 거의 말을 놓을 정도로 친숙해졌고, 내 취재여행을 동행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마존 밀림 선교사를 취재하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다른 좋은 취재 대상을 찾아 약속까지 잡았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북한군 출신이 브라질로 이주해 학교를 세워 운영하는데 창간특집 스토리로 좋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자신도 동행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리우를 구경하고 싶은 데 잘됐다."고 말했더니 그는 "리우데자네이루는 교포도 쉽게 발붙이기 힘든 오만한 도시"라고 말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꼭 가보고 싶은 도시였고 게다가 예상 하지 않았던 취재대상이 나왔으니 기분이 좋았다. 포르투갈 말을 잘하는 동갑나기 친구까지 생겼으니.

우리 둘은 알콜과 휘발유를 섞어 만든 에탄올로 가는 브라질제 차를 타고 털털거리며 이틀 동안 상 파울로 시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홍 지사장은 "남미까지 왔는데 이과수 폭포를 안 보면 말이 안 된다."며 리우데자네이루 취재 끝나면 이과수 폭포, 한인 이민농장 산타마리아 농장, 구리치바 도시를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힐튼에 며칠 묵을 돈을 아껴서 그와 함께 이과수 폭포와 파아과이를 구경할 수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이과수 폭포와 구리치바를 모르고 있었다.

당시 브라질의 인플레는 연 200%이상 살인적이었다. 덩치만 컸지 경제가 엉망인 나라였다. 100달러를 브라질 돈으로 바꿨더니 호주머니가 불룩해서 불편했다. 이를 본 홍성학씨가 놀라며 달러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눠서 바꾸라고 했다. 1970년대 기자활동을 시작할 때 석유파동으로 월급이 대폭 올라도 아무 소용없는 인플레를 경험했지만 브라질 인플레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브라질에는 1만여 명의 교포가 살고 있었다. 원래 농업이민으로 왔는데 95%이상이 도시로 나와 의류 패션 업종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1980년 대 초반 한국 의류 업자들이 상파울루를 장악했던 유태인들을 내몰고 있었다. 홍 지사장이 안내한 의류 골목에 들어가니 'Doremi' 'Sarona' 'Gaboza' 'Seoul 88' 'Han' 등 로마자 표기지만 귀에 익숙한 간판이 즐비했고, 원주민 종업원이 바삐 움직이는 가게 구석 카운터에는 한국인이 앉아 있었다. 골목에는 가끔 개업을 축하하는 난 화분이 보였다. 날마다 유태인의 의류상점을 인수해서 개업하는 게 흔한 일이라고 했다. 이미 유태계는 돈을 벌었고 그 자녀들이 변호사나 의사가 되어 가업을 승계하지 않으니 한국 교포들이 악착같이 번 돈으로 유태인 가게를 인수하고 있었다.

종업원을 40명이나 둔 큰 의류 상점을 방문했더니 대구에서 힘깨나 썼다는 40대의 사장이 나를 반겼고, 인사가 끝나자마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청바지 한 벌을 끄집어내어 입어보라고 말했다. 옷가게 주인이 말해주는 브라질 한인 사회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지경이었다.

상파울루를 비롯하여 브라질에 거주하는 교포 상인들은 모두 서로서로 달러거래를 한다는 것이다. 현지인이 브라질 돈을 주고 물건을 사가면 가게 주인은 즉시 한인 환전상을 통해 달러로 바꿔 보관했다. 상파울루 교포사회는 계모임이 성한데 곗돈을 달러로 붓고 목돈 달러를 타는 식이었다. 교포끼리 거래는 안정적인 달러로 이뤄지며 이렇게 달러를 모아 자녀를 미국유학을 보내거나 본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는 자금으로 활용했다.

상파울루 국제공항에서 목격한 또 하나의 광경은 좀 놀라웠다. 한국인 30여명이 죽 둘러서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홍성학씨가 말했다. "미국으로 재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축하하는 예배를 저렇게 한다. 이 공항에서는 하루 몇 번씩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0년 초반 내가 뉴욕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미국사회에서는 브라질 출신 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했다. 미국에는 계가 없다. 유독 한국 교포들만 계를 한다. 그러다 깨져서 싸움판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브라질에서 건너온 교포들은 자기네끼리 계를 만드는데 절대 깨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한국인은 그들의 문화전통에 따라 똘똘 뭉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걸 느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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