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8:10 (토)
북방수교ㆍ남북경협 초석 놓은 장치혁 고합회장
북방수교ㆍ남북경협 초석 놓은 장치혁 고합회장
  • 성태원이코노텔링기자
  • iexlover@hanmail.net
  • 승인 2019.03.20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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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으론 처음 미수교국 중국 방문… '금강산 관광사업'도 먼저 구상
양친 모두 독립운동 헌신 … 섬유 제조업 몰두하며 사업보국의 길 모색

87세 고령의 장치혁 前 고합 회장(이하 장치혁 회장)이 최근 모처럼 언론에 얼굴을 내비쳤다.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이 35년 가까이 고합을 경영하면서 겪었던 풍상(風霜)을 얘기해 주는 듯 했다.

오로지 섬유,화학 등 제조업에만 몰두한 장치혁(87) 전 고합회장은 돈이 된다는 부동산이나 서비스업은 멀리했다. 독립운동을 한 부모님을 기리듯 그가 펼친 사업은 하나 하나가 나라와 경제를 생각한 포석이었다. 기업으론 처음으로 미수교국이던 중국을 방문하고 북한에도 다녀오는 등 북방수교와 남북경협의 초석을 놓는대 앞장섰다. 2000년 김대중대통령이 방북할때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 자격으로 수행했다. 금강산 관광사업도 그가 현대보다 앞서 처음으로 구상한 남북경협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IMF풍상을 겪어 고합그룹은 해체됐지만 그가 걸어온 경영 발자취는 한국경제사의 보석으로 남아있다.
오로지 섬유,화학 등 제조업에만 몰두한 장치혁(87) 전 고합회장은 돈이 된다는 부동산이나 서비스업은 멀리했다. 독립운동을 한 부모님을 기리듯 그가 펼친 사업은 하나 하나가 나라와 경제를 생각한 포석이었다. 기업으론 처음으로 미수교국이던 중국을 방문하고 북한에도 다녀오는 등 북방수교와 남북경협의 초석을 놓는데 앞장섰다. 2000년 김대중대통령이 방북할때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 자격으로 수행하는 등 정,재계를 넘나든 창업오너이자 지략가였다. 금강산 관광사업도 그가 현대보다 앞서 처음으로 구상한 남북경협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IMF풍상을 겪어 고합그룹은 해체됐지만 그가 걸어온 경영 발자취는 한국경제사의 보석으로 남아있다. 왼족 사진은 최근 한 기업의 행사에 격려차 참석한 모습이고 오른쪽은 88년 5공의 폭압정치를 증언하던 장면이다./KBS캡처

이번에 그가 언론에 모습을 비춘 것은 ‘기업인 장치혁’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제 시절 독립운동가였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인 만큼 갖은 고초 속에서도 ‘나라 사랑’에 몸 바쳤던 부모님의 뜻을 다시 한 번 기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부모의 영향 때문인지 장치혁의 사업 행보는 좀 남달랐다. 그는 20세기 한국 재계에서 35년 정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다 사라진 존재였다. 재계에선 그를 두고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전형적인 모범기업인이자 정·재계를 넘나든 지략가라고 말해왔다.그는 부동산이나 서비스업에 투자하지 않고 섬유·화학 등 제조업과 수출에 승부를 걸었다. 또 기술개발과 세계화, 개척과 혁신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의 화섬 및 화학 산업을 이끌었다. 창업자였지만 오너보다는 전문경영인의 면모를 많이 보여주었다. 권한을 전문경영인들에게 많이 이양했다. 92년쯤으로 기억된다. 그가 “외국 기업인들을 만나면 한국 기업들의 의사결정 구조가 마치 군대처럼 경직돼 말만 자유 자본주의 국가지 마치 사회주의 국가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자신의 신앙관을 기업경영을 통해 구현하려 애쓰기도 했다.

‘장치혁’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북방 수교 및 경협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폭 넓은 대외 네트워크와 정보망을 가졌던 까닭에 정부 당국자나 내로라는 그룹기업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냈다. 재계에서 그는 ‘마당발’로 통했다.80년대 중반 국내 기업인으로선 처음으로 미(未) 수교국인 중공을 방문하는 등 현지 요인들과의 인맥을 십분 활용해 92년 역사적인 한·중 수교(노태우 정부)에 큰 기여를 했다. 한·러극동협회장을 맡는 등 러시아 경협에도 초석을 닦았다.

또 민간 기업인으로 북한을 방문해 경협 방안을 모색하고 정부의 메신저 역할도 많이 했다. 러시아 및 대북 경협 추진에 관한 한 현대 정주영 회장과 함께 두 손 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이런 점은 일제 시절 감시와 탄압을 피해 소련과 중국 등지를 돌며 독립운동을 폈던 선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평북 영변이 고향인 그는 해방 이듬해인 46년(14세) 부모를 따라 남하했던 만큼 남북경협에 남다른 애착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YS 정부 때는 92년 첫 방북 이래 여러 차례 북한을 찾아 경협 등을 논의했다. DJ 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15일 열렸던 역사적인 남북정상(김대중-김정일) 회담에도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 자격으로 대통령을 수행했다. 현대아산이 맡게 된 금강산개발 사업은 당초 장 회장이 맡기로 하고 일이 시작된 것으로 재계에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자녀들이 대개 그렇듯이 장 회장도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무척 어렵게 보냈다. 6·25 전쟁 직후 어수선한 시절이었던 54년, 서울 법대 1학년이었던 그는 미국 유학을 추진했으나 배 삯 5백 달러가 없어 좌절하고 만다. 그는 학업을 접고 서울 방산시장 좌판 장사에 나서 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익히기 시작했다.

10년도 넘게 사업의 기본기를 닦은 그는 마침내 1966년 1월 섬유업체인 고려합섬을 창업해 한국 재계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석유화학, 전기·전자 등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90년대 중후반엔 연매출 4조원을 넘겨 재계 17위로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좌초돼 그룹이 공중 분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장치혁은 20세기 후반부에 활약했던 한국 유수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됐다. 고합이란 이름도 사라졌다. 그는 북방 경협의 일선에서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IMF 때 부도 처리된 점에 대해 통한(痛恨)의 마음을 갖고 있는 듯 했다. 계열사들이 흑자를 내고 있었던 만큼 은행의 유동성 지원만 있었으면 공중분해는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2003년 그는 대출사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 2심에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으며 2007년 대법원에 의해 원심을 확정 받았다. 그 여파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이 생겨 1년 반 이상 병상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1월 그는 사라지고 없는 고합 창립 50주년을 맞아 옛날 회사 임직원 200여 명과 자리를 함께 하며 회포를 풀었다. 2016년 5월엔 김우중 전 대우 회장, 김상하 삼양그룹 그룹회장 등 재계 원로 6인과 함께 한 언론사 대담을 통해 한국 경제와 후배 경영인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기업인 장치혁’의 고금(古今)을 좇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세월만 무상한 게 아니라 인걸도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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