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곤 두산그룹의 명예회장이 지난 3일 세상을 떠났다. 87세. 박승직 두산 창업주의 손자이자 박두병 초대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인 그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에 그룹의 사업구조를 확 바꾸는 구조조정을 단행해 그룹을 재건했다. 창업 100주년이던 1996년. 그는 "가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산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며 그룹 분위기를 다 잡았다. 그룹의 대표사업인 맥주사업마저 접었다.
당시 두산그룹이 여러 계열사를 팔고 일부 사업을 접는 모습을 보고 재계 일각에선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1년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그의 ‘경영혜안’이 재계의 화제가 됐다. 박 회장의 선제적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에서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환골탈태했다. 우리나라 경제 역사상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사업구조를 재편한 사례는 드물다.
그는 재계에서도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았고 언론과의 접촉도 자제했다. 하지만 두산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언제나 앞장섰다. “두산에서 일생을 보내도 후회가 없는 직장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재계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해 임직원의 자율경쟁을 유도했다.
박 명예회장은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하거나 실없는 말을 하게 된다.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은 모두 엄중한 약속이 된다. 그러니 말을 줄이고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영인과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육중한 체구을 빗대 ‘침묵의 거인’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또 고인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재계 총수이기도 하다. 1951년 1월 경동고 졸업 직후 해군에 스스로 들어간 그는 비밀 훈련을 받고 암호해독 부서에 배치됐다. 이어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뒤늦게 알려져 2014년에 정부가 주는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첫 직장은 두산 밖에서 찾았다. 1960년 한국산업은행 공채 6기로 시작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안다"는 선친의 뜻을 따랐다. 3년 후 동양맥주로 옮겼으나 말단 사원의 일이 주어졌다고 한다. 공장 바닥을 쓸고 맥주병 세척작업을 했다. 당시 그와 일을 했던 현장사원들은 꺼리김 없는 그의 소탈함에 놀랐다고 한다. 사업 현장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임직원의 사정을 꿰뚫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을 가도록 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 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그는 야구를 각별히 좋아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때 OB베어스 야구단을 만들었고 어린이 회원 모집을 가장 먼저 했다. 2008년 4월 17일 희수(喜壽·77세) 때 자녀로부터 등 번호 77번이 찍힌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받아들곤 환하게 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제2 창업의 밑그림을 그린 후 그룹 회장에서 물러난 그는 아우들에게 그룹 경영을 한 번씩 돌아가며 맡기는 ‘형제 순환 경영’의 토대를 만들었다. 다만 그룹 내 파열음으로 인해 동생 박용오 회장이 2009년 타계한 것은 그룹의 아픈 대목이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씨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7일이며 장지는 경기 광주시 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