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3 19:35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1) 관료의 높은 벽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1) 관료의 높은 벽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10.05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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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없는 기업인들도 관료 앞에선 한 없이 작아져
김학렬 부총리는 기업인 만나길 꺼려 '담수어' 별명
경제 규모 커지자 전경련 ' 민간주도 경제론'부채질
은행의 민영화는 기업과 '비리 공생'의도로 비쳐져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쓰루 세대는 아무 잘못 없는 사업가라도 관료 앞에만 가면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구닥다리 계급의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업의 존망이 관료의 펜대 끝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보호 육성하기로 하면 없던 부문도 새로 일어서고, 정부가 손을 놓으면 잘나가던 산업도 쇠퇴를 각오해야 했다. 또 당시는 '세금 제대로 내면 망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날 기업 없다'는 말을 버젓이 할 정도로, 회계 부정과 탈세가 만연해 있었다. 그걸 아는 관료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이거 해달라, 저거 바꿔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기업인은 없었다.

당시는 특정 기업에 세무조사가 들어갔다고 하면 그 기업은 망한 것으로 봤다. 그러다 보니 기업가는 특별히 지은 죄도 없이 관료 앞에 가면 공연히 고개를 숙이곤 했다.

업계 입장에서는 부총리를 만나야 할 일투성이였다. 제도의 개선, 도입, 시행 등에 관해 억울함을 하소연하거나 급한 부탁을 해야 할 일이 켜켜이 쌓여 있어서다. 당시처럼 정부가 칼자루를 쥐고 거의 모든 큰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때는 더욱 관료를 만나 해결해야 할 일이 많기 마련이다. 문제는 쓰루가 업종 협회 대표이건 개별 기업인이건 면담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오죽 기업가들을 멀리하고 지냈으면, 언론이 그를 '담수어(淡水魚)'라고 불렀을까?

당시 기업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경영이 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쓰루는, 기업인과의 간담회 등 자리에서 그런 부정적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다. 사진은 1971년 9월 정경련과의 간담회에서의 쓰루. 재계를 무시하는 듯 손가락질 해가며 발언하는 그의 모습이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당시 기업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경영이 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쓰루는, 기업인과의 간담회 등 자리에서 그런 부정적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다. 사진은 1971년 9월 정경련과의 간담회에서의 쓰루. 재계를 무시하는 듯 손가락질 해가며 발언하는 그의 모습이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쓰루도 기업인에 대한 사회 일반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 기업인의 대부분이 윤리적 경영을 외면하고 정부와 은행에 의존하여 벌어들인 돈을 사치와 부동산 투기로 낭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70년 4월 10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쓰루를 비롯한 전(全) 경제 각료와 재계 거물급 인사 200여 명을 조선호텔에 초청해 간친회를 열었을 때, 그와 재계 총수들 간에 오간 대화(?)는 정부와 민간기업 간의 관계, 아니 그의 기업관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박두병 상공회의소 회장)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이대로 가다간 큰일나겠습니다.

(김 부총리) 돈 없다는 사람들이 부동산 많이 가지고 있는 것, 박 회장 아십니까?

(상의 회장) 부동산 있으면 왜 돈타령을 하겠습니까?

(김 부총리) 모르는 말씀 마십시오. 일전에 모 업체가 자금이 없어 은행 부도가 났다고 하기에 조사해보니 부동산이 무려 100만 평이나 있었습니다.

(상의 회장) 변두리에 100만 평이 있으면 무얼 합니까? 그리고 90%이상의 기업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니 좀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김 부총리) 그러니까 진작 주식 공개를 해서 자금 조달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구 회장(구자경 럭키금성 회장)도 계시지만 주식 공모가 좀 잘됩니까?

(상의 회장) 주식 공개는 대기업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중소기업은 어떻게 합니까? 운전자금은 좀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김 부총리) 지난해 통화량 증가가 얼마인 줄 압니까? 45%입니다. 정부가 금융의 고삐를 틀어쥔 덕에 현재의 안정이 있는 것입니다.

(구 회장) 주식 공모가 좋기는 한데 현재 은행금리나 사채금리에 비추어 기업 수익률이 40%는 되어야 하고, 정부가 반강제라도 상장된 우량 주식을 소화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부와 재계 간의 대화 창구를 마련할까 해서 어렵사리 준비한 자리가, 대화는커녕 쓰루가 기업들에 윤리 경영을 하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자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부총리가 되어서도 기업을 진정한 경제 건설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역할을 기대할 만한 번듯한 기업도 별로 없었다. 그 같은 관료의 눈에는 기업은 경제 발전에 관한 정부 구상을 실현하는 데에 활용하는 채널 또는 도구였을 뿐이다.

그런데 1970년 즈음부터 업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민간 주도 경제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부터 급속한 성장으로 경제 규모가 커지고 산업 구조가 선진화되니, 민간 주도 경제로 전환할 때라는 주장이었다.

경제가 한 해 15% 전후로 성장하는 가운데 제기된 '민간 주도 경제론'은 정부 안팎에서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정부에 기대어 지내는 업계, 정부에 눌려 지내는 금융계는 물론이고, 경제관료 중에서도 민간 주도 경제를 얘기하는 이가 늘어났다. 쓰루 자신도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향후 정책 기조를 민간 주도에 둔다'는 점을 분명히 해놓긴 했다.

이렇듯, 민간 주도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원칙에는 정부도 민간도, 박통도 쓰루도 의견 일치를 보고 있는 셈이었다. 문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민간 주도 경제 체제를 만들어갈 것인가였다. 그것에 관한 정부(특히 쓰루 팀)와 민간(특히 금융 부문)의 의견 차이는 선진국과 개도국 차이만큼이나 컸다.

1970년 초 전경련이 『1969년 민간경제백서』로 민간 주도 경제에 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이제는 정부가 누구는 이 공장 지어라, 누구는 저 공장 지어라' 할 게 아니라며, '정부의 제약, 간섭, 통제가 배제되어야 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금융의 자율성 보장과 중앙은행의 독립 기능 회복으로 집약된다'고 은행 민영화와 한국은행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민간 주도 경제론'은 당시 권력자나 정책 담당자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가 안보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 핵심부가 가급적 신속한 중화학공업화로 북한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부유하고 강한 나라를 한시 바쁘게 구축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중화학공업화에 소요되는 재원은 은행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부더러 그 수단을 내놓으라는 얘기는 중화학공업화와 대북 안보 태세 강화를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쓰루의 눈에는 민간인이 은행업을 한다는 것은 민간인이 기업들 위에 군림하여 그 비리와 부패의 덕을 보겠다는 얘기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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