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3 00:45 (월)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9)'더 포스트'㊦환율전쟁과 美음모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9)'더 포스트'㊦환율전쟁과 美음모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06.24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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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가치 떨어뜨리자 일본,영국, 독일 등 주요국 저항거세져
스미소니언 체제로 일단 봉합했지만 결국 '金본위제' 무력화
워싱턴포스트, 베트남 전쟁 등 미국의 음모 관련한 문건 폭로
美법원"정부 비밀 파헤쳐 알리라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것"

앞서 말했듯 1971년 8월 15일 닉슨의 발표에 대해 전문가와 언론은 '닉슨 쇼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날 발표에 대한 정식 명칭은 따로 있다.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이다. 말 그대로 닉슨 행정부의 새로운 경제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 정책의 핵심에는 앞서 말했듯 ➀인플레와 ②금 유출을 막는다는 것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③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여 무역수지 적자를 줄여 달러의 유출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닉슨 행정부가 무역수지 개선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내심 구체적인 목표치까지 생각해 놨다. 130억 달러. 달러 가치를 일정 수준 낮추면 이 정도 무역수지 개선은 가능할 것으로 봤다. 미국은 낙관했다.

금태환 중지와 함께 달러 가치가 떨어질 테고, 만일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주요 몇 개 나라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독일과 일본이 중요했는데, 독일 마르크에 대해서는 18%, 일본 엔화에 대해서는 24% 절하를 목표로 했다. 닉슨은 이를 위해 존 코널리(John Connolly) 재무장관과 폴 볼커(Paul Adolph Volcker) 연준 의장을 급파했다.

하지만 세계는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국의 화폐가치 상승은 기업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자국 통화가치 상승을 쉽게 용인하기 어려워진다. 일본이 좋은 예다. 8월 15일 닉슨의 발표로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일본은 한 달 전 일을 떠올렸다. 7월 15일 닉슨의 중국 방문 소식은 '발표 3분 전' 통보를 받은 일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표 3초 전에도 통보를 받은 바 없었다. 미국에 대한 배신감이 극한으로까지 치솟았다. 기업 경쟁력이 순식간에 떨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닉슨 대통령과 담소 중인 존 코널리 재무장관과 폴 볼커 연준 의장. 이들 3인이 세계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온 ‘닉슨 쇼크’의 주역이다.
닉슨 대통령과 담소 중인 존 코널리 재무장관과 폴 볼커 연준 의장. 이들 3인이 세계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온 '닉슨 쇼크'의 주역이다.

당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대책에 나섰다 한 달 사이 두 번째 강펀치를 맞았지만 그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일본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즉각적인 달러 매입, 그것도 대규모 달러 매입이었다.

일본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닉슨의 정책 발표 다음날인 8월 16일 월요일과 17일 화요일 이틀 사이 일본은 13억 달러를 사들였다. 이를 통해 겨우 달러 당 360엔 선을 지켜냈다. 일주일 후 외환 보유액은 27억 달러 늘었고 이는 전체 달러 보유액의 30%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2주 뒤에는 추가로 40억 달러가 늘었다.

미국은 곧 깨달았다. 일본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설득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폴 볼코 연준 의장은 훗날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순진하게도 나는 한두 달 내로 환율 재조정 문제를 끝내고 개혁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나는 대신 큰판에서 이뤄지는 협상을 통해 속성 교육을 받았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환금창구를 닫은 뒤임에도 달러에 대해 자국 통화가 급속하게 올라가는 것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격렬한 저항이었다."

결국 닉슨 정부의 금태환 정지 선언은 각국의 환율전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환율전쟁은 당연히 자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자국 시장의 보호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한 방법론은 오직 '환율'에만 국한됐던 것이 아니다. 관세는 물론 수입할당제, 수입허가제 등 비관세 정책까지 동원해 자국 시장을 보호하려는 보호주의가 판을 쳤다. 나아가 세계는 몇몇 주요 나라를 중심으로 블록화 되려는 경향까지 보였다. 영국과 유럽 일부 국가, 그리고 일본 등을 중심으로는 파운드 블록이, 북남미에는 달러 블록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달러가치 하락을 통해 무역수지를 개선하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지고 말았다. 세계는 이익이 맞는다고 생각되는 나라들끼리 모였고 미국은 통제권을 상실했다. 그야말로 혼돈의 세계였다. 혼란은 4개월 동안 지속됐다. 그리고 이 혼란의 종착역은 일단 '금본위제로의 복귀'였다. 1971년 가을 내내 세계 주요 나라들은 단독 또는 다자간 협상을 이어갔다. 무너진 브레튼 우즈 체제를 이을 새로운 금융체제를 찾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해 말 마침내 최종 합의에 도달한다. 닉슨 쇼크 이후 4개월이 지난 뒤였다.

1971년 12월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 주요 10개국 재무장관들이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새로운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중요한 협정을 체결한다. 이른바 '스미소니언 체제(Smithonian system)'로도 불리는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➀ 금에 대한 미국 달러를 순금 1온스 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평가절하 한 뒤 여기에 맞춰 각국 통화의 가치를 재조정한다.② 환율체제는 금태환이 담보되지 않은 달러화를 기준으로 조정이 가능한 고정환율제로 운영한다.③ 각국 통화의 변동 환율 폭은 기준율의 상하 각 2.25%로 확대한다.

이로써 세계는 결국 다시 익숙하고 믿음이 가는 금본위제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전의 금본위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설프고 신뢰하기 어려웠다. '금으로 돌려줄 수 없는' 불환화폐 달러는 그 자체로 이미 '절대성'을 상실했다. 여기에 변동성 허락 정도마저 늘어나 '절반의 변동환율제'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됐다. 무엇보다 달러에 대한 믿음이 안 갔다. 이 틈새를 타고 투기자본까지 가세함으로써 달러는 다시 한 번 폭락하는 신세가 됐다. 1973년 2월 38달러였던 금 1온스 당 달러가치는 42.22달러로 10%나 평가절하 됐다.

달러는 제자리를 찾아 간 듯 보였다. 그럼에도 세계는 여전히 달러를 믿지 못했다. 달러 가치는 점점 더 떨어졌고 이제 금-달러-통화를 잇는 고정 환율은 의미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1972년 6월 영국은 이미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도 이중환율제를 택했다. 1973년 3월에는 유럽공동체(EC) 6개국과 일부 북구 유럽 나라들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한다.

결국 스미소니언 체제도 출범 1년 좀 지나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후 혼란을 거듭하던 국제통화제도는 1976년 1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변동환율제로 새롭게 출발, 오늘에 이른다.

이로써 금본위제는 역사로만 남게 됐다. 이 모든 것의 책임은 과도하게 풀린 달러에 있었다. 미국은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냈다. 그리고 그 핵심 배후에 전쟁이 있었다. 당시 전쟁은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지키려는 체제 수호 전쟁의 성격이 강했고 그 전쟁 중에는 또한 베트남 전쟁이 핵심이었다.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아봤다.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과도한 달러 발행, 그리고 그로 인한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생각보다 역사가 길고 복잡하다. 일단 1945년 이전을 보자. 19세기 말 베트남은 프랑스에 의해 식민화된다. 식민지 기간 중 여러 차례 베트남 민족주의자의 봉기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진압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얘기가 달라진다.

본국이 전쟁에 휘말리면서 베트남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이 힘을 키운 민족주의자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9월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치민이 있었다. 이때부터 프랑스-베트남 사이에는 새로운 갈등이 형성된다. 다시 베트남을 식민화시키겠다는 프랑스의 야욕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1946년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다시 한 번 19세기 식 식민지 전쟁이 터진다.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베트남 응오딘지엠 총릴 표지모델로 한 1955년 4월 4일자 ‘타임’ 지(誌).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베트남 응오딘지엠 총리 표지모델로 한 1955년 4월 4일자 '타임' 지(誌).

문제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비밀리에 프랑스를 지원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를 소련에 빼앗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공산화된 데 이어 한국전쟁이 터졌고 소련의 팽창주의는 더욱 확장될 분위기였다.

미국의 프랑스에 지원은 이로써 한층 강화됐다. 프랑스와 베트남 간 전쟁 중 경비 대부분을 미국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유럽의 강호 프랑스는 베트남에 졌다. 프랑스 주력부대가 항복하고 베트남에 투항하자 전쟁이 끝나 버린 것이다. 1954년 프랑스와 베트남 간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졌다.

그렇다고 베트남에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남북 모두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며 내전과 통일의 기운이 고조됐다. 북베트남은 여전히 호치민 중심이었으나

남베트남은 왕정이 끝나고 응오딘지엠을 수반으로 하는 공화정이 출발하게 된다. 미국은 당연히 응오딘지엠 지원자였다. 당시 미국의 지원은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은 중요한 한 해였다. 이 해에 남베트남에 이른바 '베트콩(Viet-cong)'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흘러갔다.

케네디 등장 이후 베트남 상황은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승리하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인적ㆍ물적 지원을 늘려나갔다. 취임했던 해인 1961년 11월 그는 처음으로 미군 7000명을 파병하는데 동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응오딘지엠은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 시장들을 주요 요직에 앉힘으로써 불교 중심의 베트남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아내와 남동생 부부 등 가족들이 정권을 차지함으로써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같은 반정부 기류를 누르기 위해 독재도 서슴지 않았는데 일부는 응오딘지엠이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 사람이 16만 명, 투옥된 사람이 24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응오딘지엠 정부는 실패로 끝난다. 1963년 11월 남베트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는 공개총살형에 처해지는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이후 남베트남 내 베트콩의 세력이 강화되고 남베트남은 곧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등 불안이 심화됐다. 미국은 이 같은 남베트남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으며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케네디 사후 권좌를 물려받은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개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남베트남 내 베트콩의 세력이 더욱 거세지면서 남베트남의 적화 가능성이 커졌던 탓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64년 8월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터진다. 통킹만에서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지만 이틀 뒤에도 북베트남과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격노한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을 발표했고 의회도 '통킹만 결의안'을 채택, 존슨 행정부에 힘을 실어줬다.

이로써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과의 전쟁에 뛰어들게 됐다. 앞서 말했듯 최초의 파병은 1961년 11월 케네디에 의해 7000명의 미군이 보내진 것이었다. 5년 뒤인 1965년 4월 베트남 내 미군 병력은 8만2000면으로 늘었고 연말이 되면서 18만4300명으로, 1968년에는 53만6100명으로, 1969년에는 54만3000명으로 늘었다. 이제 전쟁은 미국에 의해 수행되는 그야말로 '미국 대 북베트남'의 전쟁 양상을 띠었다. 미국 내 반전운동이 거세지는 데에는 이 같은 정황이 담겨 있었다.

1971년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는 반전운동의 열기가 가마솥처럼 뜨거운 상태에서 터져 나왔다. 펜타곤 페이퍼는 앞서 말했던 대로 미국 펜타곤에서 작성한 보고서 『미국-베트남 관계, 1945-1967』를 가리킨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S.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의 지시로 만들어진 7000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그야말로 '베드남 전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서 작성에 참여했던 군사 전문가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뉴욕 타임스에 문서를 건넴으로써 비로소 세계에 알려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엄청난 특종을 한 뒤 새롭게 보고서를 입수해 5일 뒤인 18일 두 번째로 기사화할 수 있었다. 엘스버그는 정부가 뉴욕 타임스를 국가기밀 누설죄로 제소해 기사를 내지 못하자 이번에는 보고서를 워싱턴포스트에 제공했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마침 기업공개 직후였다. 몇몇 큰손들은 몇 주 동안 '큰 문제만 없다면'이라는 조건을 걸고 투자를 약속했다. 펜타곤 페이퍼가 언론사로는 놓칠 수 없는 특종이기는 했지만 자칫 회사를 위기로 빠뜨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편집장 브래들리나 오너인 그레이엄 회장은 모두 기사화를 결정했다. 실로 대담한 선택이었다.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에 공격당한 것으로 알려졌던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 ‘펜타곤 페이퍼’로 인해 이 사건이 조작됐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에 공격당한 것으로 알려졌던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 '펜타곤 페이퍼'로 인해 이 사건이 조작됐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문서의 내용은 말 그대로 '극비'였다. 세상에 알려지면 큰일 날 게 여럿 담겨 있었다. 중요한 것만 간단히 추려보자. ➀미국과는 관련이 없던 것으로 알았던 프랑스와 베트남 간 전쟁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은 물론 ②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왕정을 바꿔 북베트남의 새로운 공산주의 정권을 없앨 계획을 세웠으며 ③이 계획에 따라 미국은 응오딘지엠이 1956년 왕정을 몰아낸 뒤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는 과정 전체에 개입했다는 것, ➃또한 케네디 대통령은 이전까지의 '제한전쟁전략'을 파기하고 대규모 개입으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통킹 만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통킹 만 사건은 1964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하였다고 알려진 사건으로,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 삼아 베트남전쟁 확전을 정당화시켰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 ➄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과의 전쟁 확대를 위한 특별 계획을 수립했었고 이 계획을 통해 통킹 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 참전의 중요한 명분이 됐던 통킹 만 사건의 허구성이 입증됐던 것이다.

닉슨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것이 나왔던 것이다. 닉슨 정부는 누설자인 엘스버그를 즉각 간첩죄로 기소했고 이들 내용을 기사화한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를 국가기밀 누설혐의로 제소했다. 닉슨 행정부의 대응은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1심에서 보도 정지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은 좋지 않았다. 2심 연방 대법원은 신문사의 언론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판결했던 것이다. 당시 휴고 블랙(Hugo Black) 판사의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는 "정부의 비밀을 파헤쳐 국민들에게 알리라고 미국 헌법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라고 했다.

영화 '더 포스트'를 만든 ‘드림팀’ 톰 행크스,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영화 '더 포스트'를 만든 '드림팀' 톰 행크스,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영화 <더 포스트>는 이 과정을 그린 것이다. 2017년 개봉된 영화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국 등 북미 지역에서는 8000만 달러, 기타 지역에서는 1억 달러 수준의 흥행 성적을 냈다. 한국에서도 상업적 성공은 어려웠다. 2018년 개봉돼 관객 수 14만 명 정도에 그쳤다.

물론 그렇다고 '실패'로 볼 수는 없다. 제작비 5000만 달러에 비하면 영화 상영 수입만으로도 네 배 가까이 벌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큰 흥행 수익을 목표로 한 블록버스터가 아니었던 만큼 제작자들도 이 정도 수준의 '중박'에 만족했을 것으로 본다.

수익은 별로였다지만 관심은 그렇지 않았다. 기획 단계 때부터 언론에 오르내릴 만큼 화제를 불러 모았다. 한편으로 당연했다. 감독과 출연진만큼은 '어벤저스' 못지않은, 말 그대로 '드림팀'이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이름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끄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이었던 데다가 할리우드 최강의 배우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가 주인공인 워싱턴포스트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과 편집장 벤자민 브래들리(Benjamin C. Bradlee)로 출연했던 탓이다. 배우와 관계없이 감독 이름만으로도 관심이 가는데 여기에 극강의 두 배우가 출연하다니. 두 연기파 배우의 명연기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관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사실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지휘봉을 들었던 브래들리의 회고담은 영화의 모태(母胎)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의 요소는 다양하다. 아니 무한하다. 무엇을 선택해 역사를 재구성하느냐가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느냐 만큼 중요한 이유다. 영화의 역사 집필 과정에서 감독이 사실의 왜곡에 대한 유혹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극적 요소를 추구하는 대중 영화의 특성 때문일 것으로 본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 <더 포스트> 중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워싱턴포스트의 기업공개 과정이다. 영화는 편집국이 워싱턴 포스트의 기업공개 직전 문서를 입수했고, 기업공개 직후 문서를 폭로했던 것으로 그린다. 기업공개 시 워싱턴포스트에 투자한 '큰손'들은 일정 기간 내에 워싱턴포스트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킬 경우 투자 결정을 취소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자, 이 같은 회사의 명운이 갈리는 시점에서 국가 최고 권력기관의 강한 압력을 이겨내고 기사를 내보낼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영화의 극적 효과가 배가된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며 관객이 손에 땀을 쥐고 긴박감 넘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주요 대목이기도 한다.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랜드 연구소 연구원 엘스버그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랜드 연구소 연구원 엘스버그

필자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궁금했던 대목은 바로 이곳이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영화가 만들어 놓은 조형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확인 결과는 놀라웠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업공개 과정은 영화와 거의 동일했던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회사를 키워나갈 자금이 필요했고 그 결과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며 주식시장에 상장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이 자칫 수포(水泡)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는 일반화된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의문도 여기서 풀렸다. 왜 스필버그 감독은 펜타곤 페이퍼의 최초 폭로자였던 뉴욕타임스가 아닌 워싱턴포스트를 주제로 잡았던 것일까? 필자는 뉴욕타임스보다 워싱턴포스트가 훨씬 더 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특히 기업공개와 정부의 압력에 반발한 과정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의 극적 요소는 더 있다. 선두주자 뉴욕타임스는 펜타곤 페이퍼 입수 뒤 3개월 동안 이를 분석했다. 하지만 뒤늦게 자료를 받은 워싱턴포스트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입수 후 3일 만에 기사를 내야 했다. 자료를 얻는 과정이나 이를 기사화하는 과정 모두에서 뉴욕타임스의 사례보다 훨씬 극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영화 속 워싱턴포스트는 언론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영화의 이야기는 실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실제 언론은 정의로운가? 이 점을 우리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비리를 폭로하고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 닉슨을 대통령의 권좌에서 낙마시켰다. 그래서 언론이 정의롭다고? 어쩌면 이 같은 해석은 순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닉슨은 당선 직후부터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1968년 선거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허버트 험프리의 득표율이 42.7%였던 것에 비해 그는 43.4%로 차이가 1%p에 있었다. 이를 빌미로 언론은 그를 쪼아댔다. 그의 합법성을 의심하고 심지어 그의 당선을 파기시킬 것까지 고려했다.

1971년 워싱턴 법원에서 함께 한 워싱턴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과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
1971년 워싱턴 법원에서 함께 한 워싱턴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과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

왜 그랬을까? 보통 두 가지 해석이 따라다닌다. 당시 동부의 언론은 서부 출신 정치인을 홀대했다는 게 첫 번째다. 이들에게 대통령은 세련된 동부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평민 출신인 닉슨은 가문과 출신, 전통을 중시하는 동부 언론의 사주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닉슨은 1960년 케네디와의 경쟁에서 진 것도 동부 언론의 탓으로 생각했다. 그때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이후 닉슨은 "모든 언론은 적"이라고 말하는 등 언론에 대한 심각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워싱턴포스트가 특히 민주당 성향이 강했다는 점, 따라서 개인적으로 케네디 및 존슨 대통령과 매우 친밀했다는 점 등이 두 번째 이유로 꼽힌다. 무엇보다 그레이엄의 남편 필은 케네디와의 인연이 깊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레이엄은 자서전에서 남편 필이 자살로 생을 마치자 케네디 대통령은 두 차례나 친필 위로 편지를 썼고 그의 아내 재클린도 8장에 걸친 위로편지를 썼다고 밝혔다. 케네디의 뒤를 이은 린든 존슨과의 인연도 만만치 않다. 그레이엄의 남편 필은 그와 민주당 상원의원 시절부터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해 왔고 실제 존슨을 케네디와 러닝메이트로 맺어주는 데 일조를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펜타곤 페이퍼의 폭로로 언론계 영웅이자 스타가 된 편집장 밴 브래들리에 대한 해석도 균형을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과연 언론인의 원칙과 공명정대한 정의와 국가의 안위를 위해 펜타곤 페이퍼를 목숨 걸고 내보냈던 것일까? 혹시 권력과 명성에 경도됐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그레이엄 자서전에 따르면 브래들리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만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 편집 부국장이었던 그는 수차례 그레이엄을 만난 자리에서 "편집국장이 된다면 뭐든 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충성서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얘기다. 게다가 10년 동안 장기 집권했던 브래들리를 내보내기 위해 그레이엄은 원로 언론이 월터 리프만까지 동원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를 내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브래들리가 그레이엄의 속뜻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찌감치 닉슨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취임 직후 닉슨이 그레이엄을 백악관 만찬에 초청했으나 그레이엄은 이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왔듯 워싱턴포스트는 닉슨의 딸 결혼식에서도 홀대받는 등 좋지 않은 관계가 계속됐다. 워터게이트는 이 같은 닉슨-워싱턴포스트 간 관계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닉슨이 워싱턴포스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면 워터게이트는 터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일부 해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워싱턴포스트와 워터게이트 관계를 보는 시각 역시 전통적인 것과 다를 수 있다. 워터게이트 이전이든 이후든 정적에 대한 도청 행위는 늘 있어오지 않았느냐는 반론 역시 그중 하나다. 이 같은 해석은 워터게이트를 가리켜 '언론이 정치 공작을 극복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한 사례'로 보려는 전통견해를 순진한 것으로 치부한다. 도청기술이 아직은 미흡했던 루즈벨트 시절 그는 접견대기실 밑에 작은 방을 만들어 내방객들의 대화를 몰래 받아적기를 시켰으며 추후에는 미국 라디오 연합의 힘을 빌려 비밀녹음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루먼이나 케네디도 내방객에 대한 비밀녹음을 한 사실이 밝혀졌으며 특히 워터게이트로 닉슨의 뒤를 이은 존슨의 도창 작업 역시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로 역사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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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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