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청와대측이 교착 상태에 빠진 노사정 협력에 돌파구를 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이제 한국의 노조는 대통령과 각을 세울 정도로 힘이 세졌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다.
하지만 노조가 늘 힘이 셌던 것은 아니다. 경제 개발 초기에는 기업주에 비해 엄청난 약자였다. 수도 없는 노사 분규와 협상 끝에 얻어낸 과실(果實)이다. 한국 기업사는 그것을 생생히 증언한다.
그 중에서도 1980년대 후반 대우조선의 양동생 노조위원장과 김우중 회장이 벌였던 노사 협상은 압권이었다. 경남 거제시 옥포만 대우조선소 현장에서 두 사람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 피 말리는 담판을 벌였다. 특히 89년 ‘파업이냐, 폐업이냐’를 놓고 벌인 양측의 담판은 '낭떠러지 협상'에 비유될 정도로 치열했다.
특유의 ‘콧수염·턱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양 위원장은 당시 전두환 폭압 정권에 억눌렸던 국내 노동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87년 대우조선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아 몇 년간 전국 대기업 노동 운동을 견인했다. 이후 대우조선 노조는 울산의 현대중공업 노조와 함께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라 불릴 정도로 그 위세가 커졌다. 당연히 그는 대우조선 노조는 물론 한국 노동운동사에도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김우중 회장은 60년대 섬유수출업체인 대우실업을 통해 한국 재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기업가다. 이후 그는 M&A(기업 인수·합병)를 통해 대우중공업·대우조선 등 유수의 중공업체로까지 사세(社勢)를 확장했다. 중화학공업화가 한창이었던 80년대에 그는 한국 산업의 중심에 서 있는 기업가로 자랐다. 하지만 그는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분배 및 민주화 욕구에 직면해야 했다. 옥포조선소에 칩거하며 양 위원장이 이끄는 노조 측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숙제를 푸는 과정에서 그는 90년대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준 '세계 경영'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세월은 무상(無常)하다. ‘파업이냐, 폐업이냐’를 놓고 벼랑 끝 협상을 벌였던 때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다. 양동생과 김우중 두 사람 다 세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지 제법 오래 됐다. 대우조선도 2000년 오너 김우중 회장의 품을 떠나 독립기업이 됐다. 말이 독립이지 산업은행을 대주주로 한 사실상 공기업이 돼 있다. 한 때 세계 굴지의 조선사로 화려한 세월을 보냈지만 주인을 잃고 표류하다 요즘은 조선업 쇄락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1978년 대우조선으로 창업돼 41년 역사를 가졌지만 전신인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1973년 설립)부터 치면 사력(社歷)은 46년에 육박한다. 회사도 시들고 한창 때 회사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걸 두 사람도 우리의 뇌리에서 멀어지고 있으니 어찌 세월 무상이 아니랴.
양 위원장은 89년 말 임기를 1년 남겨 두고 물러나 상경하게 된다. 엄청난 변신을 위해서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가족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10년 간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2005년 한 중앙 언론에 목사가 된 양동생의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다. 안수집사, 전도사, 목사 고시를 거쳐 99년 11월 양천구 신월2동에 한양중앙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소개됐다. 온라인상에는 2012년까지 설교 내용이 올라와 있다. 올해 66세가 됐을 그의 목회 소식은 그 이후론 잘 들리지 않고 있다.
김 회장은 2000년대 '대우그룹 해체'라는 비운을 맞아 베트남 등지를 떠돌며 야인처럼 지내 왔다. 몇 년 전부터는 대우 명예회복과 한국 경제에 대한 훈수 등을 위해 간혹 귀국해서 얼굴을 내비쳤다. 60년대 한국 재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약 40여 년 간 대우와 세계 경영의 신화를 썼던 시절의 동료들과 함께 자리도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져 지난해 11월 귀국해 연말까지 아주대병원 13층 VIP병실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83세인 그는 알츠하이머 의심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