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13:40 (목)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9)'더 포스트'㊥불신 받은 달러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9)'더 포스트'㊥불신 받은 달러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06.08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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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어 베트남전쟁에 돈 쏟아붓고 무역적자 커지자 달러신뢰 급락
주요국, 달러 가져와 "금 내놔라" 미국 압박… 美 주도의 금본위제도 붕괴
金보유량 바닥 드러내자 닉슨 대통령 "재무 장관에게 金교환 금지시켰다"

"코널리 재무장관에게 금과 달러의 교환을 중지하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TV로 생중계되던 닉슨의 대 국민 담화문에서 나왔던 이 말 한 마디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세상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역사는 이 담화에 '닉슨 쇼크'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 중에는 인플레 방지 차원에서 실시되는 임금 및 물가의 동결도 들어가 있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이로 인한 '쇼크'가 더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는 달랐다. 달러 문제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 전체가 그야말로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전편 글에서 말했듯 1971년 6월에서 8월 두 달 사이 미국이 세계에 던진 메가톤급 충격은 세 개나 됐다. 두 달 전인 6월 13일.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하며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했던 추악한 스캔들을 터뜨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한 달 전인 7월 15일, 닉슨은 국민담화를 통해 중국과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로 했다며 세계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세계는 이 두 개의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닉슨의 중국방문 발표에도 '닉슨 쇼크'라는 용어를 붙였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한 달 뒤 터져 나온 8월 15일의 '쇼크'에는 미치지 못 했다.

생각해 보라. 당시만 해도 '종이돈'은 믿을 게 못 됐다. 두 차례 세계전쟁을 치르며 너도 나도 돈을 찍어대니 종이돈은 그저 종이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인류가 이를 안지는 꽤 오래 됐다. 종이돈이 나온 것이 이미 1000년 전 일이다.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최초의 지폐가 나온 뒤부터 종이돈에 대한 불신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돈의 저장과 교환 과정에서 종이돈이 갖는 효과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처럼 돌을 들고 다닐 수도 없었고 흔해 빠진 조개껍데기로 물건을 살 수도 없었다.

1971년 8월 16일자 뉴욕 타임스. 전날 있었던 닉슨의 국민담화문 발표를 머리기사로 다뤘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경제에 충격을 준 ‘달러의 금태완 중지’가 아닌 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한 임금-물가 동결을 헤드라인으로 잡았다는 점이다.
1971년 8월 16일자 뉴욕 타임스. 전날 있었던 닉슨의 국민담화문 발표를 머리기사로 다뤘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경제에 충격을 준 '달러의 금태완 중지'가 아닌 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한 임금-물가 동결을 헤드라인으로 잡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금본위제(金本位制, Gold Standard)'다. 화폐의 가치를 금에 연계시키는 이 화폐제도는 ➀중앙은행이 아예 금화의 형태로 화폐를 발행하는 '금화본위제(金貨本位制)'와 ➁금화와 동일한 가치의 지폐 및 비(非)금화 동전 등 보조화폐를 발행하는 '금지금본위제(金地金本位制)' 등 두 가지로 나뉜다.

금지금본위제에서 화폐를 금으로 교환해 주는 것을 '금태환(金兌換)'이라 하며 금태환이 가능한 화폐를 '태환 화폐'라 부른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이 담화문을 발표할 당시 미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닉슨의 담화문은 결국 미국이 '달러의 금태환'을 부정하겠다는 것이었고, 이는 곧 미국이 그 동안 유지해 왔던 금본위제를 폐기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 선언은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간략하게나마 금본위제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이 금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화폐로 쓰기 시작한 역사는 길다.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그러나 안정적인 체제로서의 금본위제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세기 들어 시작됐다. 1819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채택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0년 가까이 운영됐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세계 각국은 전비(戰費) 마련을 위해 돈을 찍어냈고 그로 인해 첫 금본위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통화 남발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심각한 대가를 치른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각국은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했으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금본위제는 다시 한 번 붕괴되고 만다.

경제는 안정을 원한다. 끊임없이 금본위제가 재론되는 이유다. 2020년 6월 코로나 19와 홍콩 문제를 둘러싼 미중 갈등 속에서도 다시 한 번 금본위제가 거론되고 있다. 연준의 무제한 양적완화를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물론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를 반대한다. "의회가 연준에 최대고용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 경제목표를 과제로 위임했다"고 말한 그는 "의회가 연준에 달러 가격을 금에 고정하는 업무를 맡긴다면 통화정책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으나 그 외의 것들이 요동칠 것이고 연준은 이를 감독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본위제는 이제 한물 간 옛날 정책으로 수리가 어려운 고장 난 정책 정도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세계경제는 금본위제를 원했고 결국 채택됐다. 물론 이전과는 다른 금본위제였다. 이전에는 자국 화폐의 신뢰를 쌓기 위해 각국이 각자 금본위제를 추진했다. 그리고 금본위제를 실시한 나라는 강국이요 부국이었다. 그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모든 게 미국중심이었다. 미국만이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중 세계 금을 싹쓸이한 미국은 세계 금의 75%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는 미국 중심의 금본위제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미국 달러 중심의 금본위제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규칙이 적용됐다. ➀달러와 금을 온스 당 35달러라는 동등한 가치로 묶었고 ➁미국 연준은 발행한 달러의 25%에 해당하는 금을 새롭고 충당하고 ③각 정부는 화폐를 달러에 연동시키는 동시에 ➃달러를 지불준비금으로 보유하고 ➄원하는 경우 언제든 달러를 금으로 바꿔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금환본위제도'로도 불리는 이 제도는 1944년 7월 1일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튼우즈에서 결정됨으로써 이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기록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도 이 협정을 통해 태어났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발지인 미국 뉴햄프셔 주의 소도시 브레튼우즈. 1944년 7월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전후의 국제통화질서를 규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발지인 미국 뉴햄프셔 주의 소도시 브레튼우즈. 1944년 7월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전후의 국제통화질서를 규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결론적으로 1971년 8월 15일 닉슨의 담화문은 이 브레튼우즈 협정을 깬 것이다. 미국은 자신이 내 건 약속을 스스로 파기했던 셈이다. 닉슨 행정부는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답은 뻔하다.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닉슨 쇼크'는 '달러의 사기학(詐欺學)'이라 부를 만하다. 이유야 어쨌든 미국은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권리'를 십분 활용해 돈을 마구 찍어냈고 세계 최고의 부자 행세를 했다. 물론 그 종국(終局)은 파국이었다.

미국은 진짜 돈을 많이 썼다. 1950~67년 사이 500억 달러를 찍어 차관을 제공했으며 450억 달러를 찍어 해외 유수의 기업들을 사들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달러는 전장(戰場)에 뿌려졌다.

이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을 통해 알 수 있다. 미국의 국방비는 1949년 당시 131억 달러로 연방세출의 32.3% 수준이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경비는 급증했다. 1951년 국방비는 225억 달러로 70% 증가했으며 이는 전체 세출의 절반 가까운 비중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군비지출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났다. 1965년 496억 달러였던 국방비는 1968년 이후 3년 동안은 연간 8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미 정부는 국방비와는 별개로 베트남 전쟁 직접비 즉, '동남아시아 특별작전비'를 별도 계산했는데, 1965년 1억 달러 수준이었었던 이 '특별작전비'는 1969년 288억 달러로 폭증했다. 1965년부터 70년까지 추산되는 이 '작전비'는 무려 1044억 달러에 이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역수지마저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전후 상당 기간 미국은 전후 호황을 누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전 세계에 상품을 실어 나를 '세계의 공장' 역할을 수행했다. 이 덕에 1950~67년 동안 상품무역은 무려 700억 달러 흑자였다. 하지만 1969년부터 입장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의 무역 수지가 '적자'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9년은 미국의 무역적자 첫 해로 적자액은 40억 달러에 이르렀다.

여기에 브레튼우즈 체제가 갖고 있던 근본적인 모순이 체제 붕괴를 촉구한 주요 요인으로 작동했다. 앞서 말했듯 브레튼우즈 체제의 핵심에는 달러와 금의 연계, 지불준비금으로서 세계 각국의 달러 보유, 달러의 금태환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규칙은 자체로 모순을 갖고 있었다.

세계 모든 나라는 유동성 확충을 위해 달러를 찾았을 것이다. 그럼 미국은 달러를 더 찍어내야 했고 달러 가치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결론적으로 브레튼우즈 체제는 세계가 달러를 원하면 원할수록, 즉 '인기가 오를수록' 달러가치는 떨어진다는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을 방문한 닉슨의 전임자 린든 존슨 대통령.
베트남을 방문한 닉슨의 전임자 린든 존슨 대통령.

체제 초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계는 미국을 믿었고 미국은 여전히 많은 '황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달러 찍기'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결국 체제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엄청난 돈을 쏟아 붇자 세계는 조금씩 달러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 조금씩 체제를 정비하지 않고서는 오래 갈 수 없다고 봤다.

1969년 3월 미국은 브레튼우즈 협정의 주요 조항에 대해 손을 댔다. 미국 의회는 연준이 발행한 달러의 25%에 해당하는 금을 비축해야 한다는 조항을 폐지했다. 이로써 달러 발행을 막는 족쇄를 풀었다. 그러자 세계 각국의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미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체제 유지를 위해 또 하나의 '사건'을 준비했다. '종이금(Paper Gold)'를 만드는 일이었다.

IMF는 이른바 '특별인출권(SDR, Special Drawing Rights)'을 만들고 각국에 장부상 일정 예금액 형태로 내주는 새로운 시스템을 운영하겠다고 했다. 이 SDR은 그 가치가 금에 고정돼 있는 탓에 '종이금'이란 별칭을 얻게 됐다. 물론 연 1.5%의 이자도 줬다. 복잡해 보여도 이 종이금의 목표는 하나였다. 황금의 부족분을 종이로 메우겠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 본격화의 신호탄이 된 1965년 폭격 장면.
베트남전쟁 본격화의 신호탄이 된 1965년 폭격 장면.

말도 안 돼 보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종이금' 제도는 채택됐다. 그만큼 미국은 힘은 셌다. 1968년 2년 뒤인 1970년부터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세계는 이 '종이금'에 비아냥댔고 더 이상 미국을 믿지 않았다. '종이금'으로 불리던 특별인출권 제도도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물론 미국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지키고 싶었다. 돈을 찍어낼 수 있다니 그런 특권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체제는 붕괴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1971년 들어 상황은 눈에 띠게 악화됐다. 세계 주요 나라들은 미국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국 중앙은행이 미국에 달러를 가져와 금을 내놔라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금을 내 줄 수밖에 없었고 금 보유량은 급격히 떨어졌다. 1971년 들어 8월까지 미국에서 유출된 금은 300억 달러 수준으로 이전 10년 동안보다 70%나 초과하는 액수였다. 미국은 더 버틸 힘이 없었다. 그해 2분기처럼 금을 내준다면 연준의 금 보유량은 곧 바닥을 드러낼 상황이었다. 닉슨의 '금태환 중지' 명령은 이 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대 사건이었다.

닉슨쇼크를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금본위'라는 제도 자체의 문제로 볼 수도 있고 금본위제 자체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만들어진 미국 중심의 특이한 금본위제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전쟁, 특히 베트남전쟁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다.

이 전쟁이 없었다면 미국은 그토록 많은 달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찍어낼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브레튼우즈 체제의 수명은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1971년 8월 15일의 '닉슨쇼크'의 원인을 왜 '경제'가 아닌 '전쟁'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우리는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이 전쟁의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 <더 포스트>를 '펜타곤 페이퍼의 성격을 가장 잘 알게 해 주는 영화'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닉슨쇼크 이후 세계경제에는 어떤 격랑이 몰려 왔을까, 워싱턴 포스트는 왜 미친 듯 펜타곤 페이퍼를 찾았던 것일까, 영화 <더 포스트>는 이 과정을 어떻게 그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나.... 다음 편을 기대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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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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