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진서 10~12% 성장목표 제안하자 " 계획은 낮게잡고 실적은 높게 내는거야. 8%로 해 "호통
일부 비판 세력은 이를 두고 정해진 목표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는 '군사문화’의 유산이라고 폄하
쓰루는 '2차 5개년 계획의 아버지'로 불리었다. 기획원 차관 때 주도적으로 그 계획을 관장했다고 해서다. 그러나 청와대 정무수석(경제수석)으로 물러난 후 2년 반 넘게 그는 5개년 계획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부총리가 된 지 3개월이 되던 1969년 9월 3일, 그는 오래간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얘기를 꺼냈다. 3차 계획(1972~1976년)의 기본구상을 밝히면서다. 그는 "계획이 마무리되는 1976년이 되면 우리나라 경제는 도약 단계로부터 성숙 단계로 이행되고, 1인당 GNP는 약 375달러 선이 되어 1968년의 2.3배로 늘어난다"며 계획의 큰 그림을 내비쳤다.
3차 계획 수립은 1, 2차 계획에 비해 탄탄한 자신감 속에 출발하였다. 그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1차 계획이 목표를 대폭 초과 달성한 것에 이어, 1971년에 끝나기로 되어 있는 2차 계획도 GNP 등 주요 목표가 1969년 안에 대부분 달성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울산 석유화학단지, 포항제철소 등 '2차 계획의 3대 총아'의 건설이 마무리 내지 본격화 단계에 이른 것도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1, 2차 계획 수립 시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말끔히 벗은 모습이었다.
'도약하는 한국 경제를 일궈내는 한국인'의 그 자신감을 국제 경제개발 커뮤니티는 'Can Do Spirit'(마음을 합해 절실히 원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사회 분위기)이라고 불렀다. 일부 비판 세력은 이를 두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 나가는 '군사문화'의 유산이라고 폄하하였다.
1969년 11월 26일에 발표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작성 지침(안)은 그동안의 고도성장이 야기한 두 가지 병폐, 즉 고질적 물가 불안과 불균형 성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작성 지침은 계획 기간 중 연평균 성장률을 8.6%로 정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너무 낮은 목표였다. 2차 계획이 출범하고 처음 3년간(1967~1969년)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12.5%에 달하고 있었다. 쓰루 스스로 "지나치게 건실하게 잡은 계획이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원래 실무진이 상정했던 성장률은 10, 12% 두 가지였다. 보고를 들은 쓰루는 실무진에게 "이런 미친놈들 보게. 10, 12%가 무슨 수작이야. 원래 계획이란 낮게 잡고 실적은 높게 내는 거야. 8%로 해!"라고 호통을 쳤다. 왕초에게서 배우고, 박통 옆에서 수많은 실적 보고를 지켜보며 터득한 나름의 처세술이었다.
의도적으로 낮게 잡은 성장률에 대해서, 언론은 정부가 '고도성장에서 안정성장'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3차 계획의 할아버지(쓰루 지칭)의 성숙함이 엿보인다'는 해설까지 덧붙였다.
언론은 불균형 성장의 그늘을 상징하는 농업과 농촌에 재정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겠다는 균형 기조 도입 부분에 높은 점수를 줬다. 당시 공업화의 성과가 눈부셨던 만큼 농업-공업 간, 농촌-도시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59~1969년 광공업 부문은 연평균 15.6%의 성장을 거듭해왔는데, 농림어업 부문은 고작 4.5%씩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4.5%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그렇다고 농공 간 격차가 숨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국가적 관심의 초점이 점차 농업과 농촌의 발전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농촌은 여당 공화당의 표밭이었고, '3선(選) 대통령'은 박통의 공개적 야망이었다.
안정과 균형 기조 도입은 고질적 인플레와 불균형 성장 문제를 지적해온 언론의 의표를 찌르는 정책 기조의 전환이었다. 긴축의 결과로 도출된 물가 안정, 혁신적 부총리에 의한 균형 성장으로의 전환……. 쓰루 경제팀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긍정에 긍정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