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1:25 (금)
‘김우중 꿈’과 ‘대우그룹 해체’는 달리 재평가해야한다
‘김우중 꿈’과 ‘대우그룹 해체’는 달리 재평가해야한다
  • 장재열 이코노텔링기자
  • kpb11@hanmail.net
  • 승인 2019.01.03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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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는 몰락했지만 김우중의 기업가정신은 엄연히 존재
‘1분을 하루같이’ 세계를 누빈 그의 창의적 무한도전 교훈
김우중은 자본과 기술이 없던 우리경제에 활력소 역할을 했다. 그는 평소
김우중은 자본과 기술이 없던 우리경제에 활력소 역할을 했다. 그는 평소 "사람이 이뤄낼 수 없는 일은 없다"며 세계최대 규모의 옥포 조선소를 건설했고 자동차와 전자을 앞세워 세계경영의 발판을 놓았다. 그가 뿌린 도전 정신에 영감은 얻은 '김우중 키즈'들은 IMF후 벤처붐을 이끌었다. 고개를 숙이기는 커녕 언제나 높은 곳을 쳐다봤다.

김우중(82) 대우그룹 회장과 그의 세계경영, 그리고 ‘국가 부도의 날’ IMF와 대우그룹의 해체. 20년 전 우리는 당시 재계서열 2위인 대우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대마불사의 신화가 허상이었음을 마침내 체감했다. 비록 타의로 그룹이 무너졌다고 해도 대우는 할 말이 없었다.

대우의 차입경영은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특히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한 분식회계는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을 저버린 범죄 행위였다. 물론 당시는 적잖은 대기업들이 차입경영에 치중했고 고무줄 회계 잣대를 댔다고는 하지만 대우는 그 도를 넘어섰다.

그러나 기업인 ‘김우중의 포부’와 그의 ‘세계경영 포석’은 이와는 별도로 경제 역사적 가치는 물론 경영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지 않다.

그가 누빈 세계는 그의 원대한 구상에 혀를 내둘렀다. 일부 세계 언론들은 왜 그를 ‘칭키스칸’으로 불렀을까. 유럽, 특히 동유럽인들은 ‘칭키스칸 포비아’를 지니고 있다. 단숨에 광할한 중앙아시아를 거쳐 헝가리까지 쳐들어온 칭키스칸의 말 발굽소리에 치를 떨어야 했던 그들이다.

김우중은 세상이 변하는 것을 한발 앞서 간파했다.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부터 동유럽에 공을 들였다. 폴란드에 ‘대우FSO’란 자동차 업체를 현지정부와 공동출자로 세우자 세계자동차업계는 깜짝 놀랐다.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체제가 출범했지만 세계의 블록경제는 강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곳곳에 대우의 거점을 확보했다. 조그마한 나라의 한 기업이 당시 400군데에 해외 현지법인을 갖춘 것은 어찌보면 기적이었다.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동유럽,아프리카을 돌아 미국과 남미에도 대우의 깃발을 꽂았다. 김우중은 이를 위해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고 차 안에서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특별한 공식행사가 없으면 수행원 없이 옷가지를 챙기고 호텔안에서 양말을 빨아 다음날 신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워크 홀릭’으로 만들었을까.

김우중은 스스로 수면시간을 정하는 사람이었다. 의자에서 쪽잠을 자면서 세계를 누볐다. 1분을 하루같이 쓰면서 전세계 400군데 해외법인을 세워 세계경졍의 큰 그림을 그렸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훗날 후배기업인들의 글로벌경영의 길잡이가 됐다.
김우중은 스스로 수면시간을 정하는 사람이었다. 의자에서 쪽잠을 자면서 세계를 누볐다. 1분을 하루같이 쓰면서 전세계 400군데 해외법인을 세워 세계경제의 큰 그림을 그렸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훗날 후배기업인들의 글로벌경영의 길잡이가 됐다.1989년 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300만부 이상이 팔려 젊은이들의 도전에 영감을 주었다.

김우중은 이 물음에 대답을 내비친 적이 있다. 그는 2014년 한 모임에 참석해 “평생 앞만 보고 성취를 향해 달려왔고, 그것이 국가와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거기에 반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실제 김우중 회장 주변의 사생활 스캔들은 거의 없었다. 술을 멀리했고 골프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치지 않았다. 그가 말한 대로 ‘1분을 하루처럼’ 쪼개 썼다. 그의 일상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공장인 우즈베키스탄의 대우자동차가 문을 열 때다.

그는 아침에 호텔 부페 식당에서 자신이 접시에 담아온 햄과 베이컨, 심지어 현지 특유의 음식마저 깨끗하게 비웠다. 기자는 “아침 밥맛이 왜 그리 좋을까. 세계 도처를 다니다 보니 세계 입맛에 최적화됐을까”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협상과 거래에 온 에너지를 소비하는 바람에 잘 먹어야했다고 한다.

두 차례 과기처 장관을 지낸 정근모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는 김우중 회장의 혜안에 가슴이 뜨거웠다고 한다. 현재 건재한 고등기술연구원은 김우중 회장이 세웠다. 하지만 김 회장은 ‘대우’란 이름을 빼라고 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고등기술원은 대우그룹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산업계가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대우를 재계 일각에선 다른 눈으로 볼 때였다. 그런 시선에 대해 김 회장은 사뭇 다른 대응을 했다.

김우중은 유럽에 가면 하루에도 몇나라를 들렀다. 소형전세기를 빌려 타고 다녔다. 그는 왜 그렇게 일을 하냐는 물음에
김우중은 유럽에 가면 하루에도 몇나라를 들렀다. 소형전세기를 빌려 타고 다녔다. 그는 왜 그렇게 일을 하냐는 물음에 "우리경제와 미래세대에게 다 도움이 되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골프는 시간이 많이 걸려 치지않았고 술을 삼가했다. 일 이외의 잡음이나 스켄들이 날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사실 대우는 창업보다는 기업 인수를 통해 사세를 키웠다. 대한전선과 새한자동차를 사들여 각각 대우전자와 대우자동차를 세웠다. 김회장의 세계경영 안목이 접목되자 그 두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창업노력이나 기술 없이 무임승차한다는 힐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기술 수준은 그리 내세울 것이 없었다. 우선 생산라인을 기반으로 선진기술을 익혀야 했다. 앞선 기술을 터득할 때까지 생산기반을 갖추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경제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그 때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국기술을 베끼거나 등 넘어로 배웠다. 그래서 상표없는 제품을 많이 수출하고 있었다. 차이는 있겠으나 그 방식에서 현대나 삼성도 자유로롭지 않다. 실제 정주영 회장은 “기술이 없다고 사업을 못하나. 그런식으로 하면 언제 선진국을 따라잡나”라며 경영진을 다잡았다.

여하간 1967년 창업한 대우는 IMF 직전에 재계서열 2위자리에까지 올랐다. 창업 30년만에 삼성과 LG를 제쳤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은 재계 리더격인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IMF사태가 터지자 김 회장은 우리 경제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갔다. 달러 가치가 오른 만큼(IMF이후 1달러는 1900원대까지 치솟음) 한 해에 수백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올려 몇년 안가 IMF를 졸업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보고했다. 그러나 김우중과 대우에 대한 새 정권의 시선은 싸늘했다. 대우는 대그룹 해체 1호 타깃이 됐다. 앞서 언급 했지만 대우의 확대 지향적 경영에 조종이 울렸다.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 경영’을 했다는 조롱이 나왔다.

IMF직후 김우중은 대우전자와 막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던 삼성자동차와의 빅딜, 대우자동차에 대한 GM의 투자유치에 공을 들이며 대우그룹의 자금난 타개에 힘을 쏟았다. 사우디의 큰 손 알 왈리드 왕자와 협력를 모색하는 등 자신의 세계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다각적인 수습책을 모색했다. 하지만 한번 선 정부의 대우해체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IMF(국제통화기금)을 쥐락펴락하는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돌아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GM은 나중에 대우자동차를 어렵지 않게 인수했다. 허리띠를 졸라맨 우리나라는 김 회장이 예상한 대로 3년 만에 IMF의 지원체제를 벗어났고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쾌거를 이루며 ‘하면 된다’는 우리의 의지를 다시금 세계에 보여줬다. 대우의 주요계열사의 명맥은 아직도 살아있다. 건설과 자동차, 조선은 지금도 대우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몰락한 대기업의 간판이 남아있는 것은 김우중이 쌓아 올린 세계경영의 그늘은 그만큼 짙기 때문이 아닐까.

대우가 몰락하자 김우중은 조국을 떠났다. 7년여간 세계를 유랑했다. 2005년 귀국한 그는 법의 심판을 받았다. 추징금 17조원에 8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2007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후 공개활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최근엔 베트남에서 청년기업가들을 육성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고 옛 대우맨들의 저녁모임에 나와 “우리가 한 일이 과연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는가”라는 요지의 토로를 했다는 말만 전해 질 뿐이다.

그 때 대우에 메스를 들었던 정책당국자들은 대우해체를 지금도 정당하고 신속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자원과 기술이 보잘 것 없던 시절에 세계를 자신의 사업 무대로 만든 그에게 돌아온 차가운 세평에 아마도 김 회장은 가끔씩 몸을 떨었으리라.

또 나라에 IMF의 무거운 짐을 안긴 죄인이라는 주홍글씨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1989년 발간된 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당시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다. 300만부 이상 팔렸다. 그들의 도전 정신에 불을 붙였다. 김우중은 “사람이 안되는 일은 없다”고 했다. IMF직후 벤처 바람이 분 이면에는 ‘김우중 키즈’들이 적잖았다. 우리는 그래서 대우그룹의 몰락 자취에서 김우중의 기업가정신은 건져 내야한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업보국의 일념과 그가 뿌린 세계경영의 씨앗은 나중에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영에 물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우중 성취’는 빛이 발했지만 ‘김우중의 기업가 정신’은 재평가할 때가 아닐까. 기사 머리에 ‘김우중 전(前)회장’이라고 쓰지 않은 이유는 그의 기업가정신 만큼은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경제DNA에 숨 쉬고 있다고 믿고 있어서다. 경제가 어렵고 기업인들이 움츠린 요즘, 제2, 제3의 ‘김우중의 꿈’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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