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국경과 인접 … 운남의 소수민족 틈 바구니서 한족의 문화 뿌리 내려
중국 농촌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도서관 눈길…1만권의 희귀 고서적 소장
8시 반경 호텔로비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제까지 호텔 아침식사 가운데 가장 입맛에 맞는다. 버섯, 숙주 그리고 다른 녹색채소요리가 아주 훌륭했다. 죽도 만두도 맛이 좋았다.
간밤에 편안한 잠을 잔데다 아침식사도 만족스러워 이곳 텅총에서의 일정도 아주 순조롭고 풍성할 것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식사 후 호텔직원으로부터 텅총 시내의 대체적인 관광포인트에 대해 설명을 듣고 길을 나섰다. 우선 발길이 향한 곳은 시내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에 있는 來鳳산 공원이었다.
이 산은 텅총의 녹색 보석으로 불리기도 하는 국가삼림공원의 하나이다. 원래 두 개의 화산분화구가 합쳐져서 盾狀형태의 화산으로 모양이 봉황을 닮았다 하여 來鳳산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숙소에서 시내버스 2-3정거장 정도의 아주 가까운 거리로 충분히 걸어갈 만한 곳이었다.
산입구까지 가는 길이 산책하기 좋은 길이었다. 등산로 초입에 거대한 수목이 거의 하늘을 가릴 정도로 뒤덮고 있고 이들 수목이 진한 향을 발산하는 아주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숲이 많이 우거져 녹색이 온 세상을 가득 뒤덮고 있는 텅총의 풍광은 동절기 고국의 산하와는 크게 대비되었고 한겨울에 푸르런 녹음을 맘껏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산길을 수십여분 올라가면 來鳳사란 절이 나온다. 이절은 오랜 과거 운남 땅이 남조국이라는 독립 왕조일 때 龍鳳祠란 사당이었다가 명왕조에 來鳳사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절은 외부의 방문객이 거의 없어서 고즈넉한 분위기에 차분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불당에는 미얀마의 화교들이 기증했다고 하는 옥불상이 공봉되어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절을 둘러보고 산의 정기를 한껏 들이마신 후에 다시 산을 내려왔다.
절을 내려온 후 발길은 시내 중심의 疊水河 폭포관광지로 향했다. 래봉산에서 시내의 폭포로 이어지는 길도 노변에 굵고도 큰 열대의 수목이 하늘을 가릴 듯 울창하게 줄지어 서 있고 깊은 산에서나 느낄 법한 숲의 향기가 코끝으로 전해져 온다.
자료에 의하면 시내 중심지역에 폭포가 있는 것은 중국대륙을 통털어 이곳 텅총이 유일하다고 한다.
폭포수 관광구역 입장료는 20위안이었다. 도심 내에 상당히 큰 규모의 자연폭포가 있다는 것이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진다. 숲길을 걸으면서 떨어지는 폭포의 우렁찬 물소리도 듣고 주변의 자연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는 첩수하 폭포는 여행객들이 가볼만한 곳이었다.
폭포공원을 나와 버스를 타고 화순 화교마을로 갔다. 불과 3정거장이었으나 이 구간의 한 정거장은 도심과 외곽지역의 연결지역이어서인지 도심의 3-4정거장에 맞먹을만큼 제법 긴 거리였다.
입구에 화교마을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패방이 세워져 있다. 소수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운남에서 이곳 화순은 한족의 옛마을로 이름이 높다.
화순고진에 한족이 모여살기 시작한 것은 명조 초기 군둔과 민둔이 설치된 이후라고 한다. 운남 지역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으로 전란이 잦았고 지역의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서 마을(鎭)을 설치했다. 이곳에 주둔한 병사들은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병사로 지역을 방위해왔다. 이른바 軍屯이 형성 발전하게 된 주요 배경이다.
그러나 병사들만의 도시로는 군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병력 주둔을 뒷받침하기 위한 백성들의 이주가 필요했다.
주로 사천과 강남 그리고 중원 등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온 백성들이 이곳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이 마을 발전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들과 주둔 병사들의 후예가 바로 지금의 화순 주민들이다.
왕조시기 도시의 발전은 정치적인, 경제적인 이유 이외에 변경지역에서는 바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도시가 등장한 것이 바로 이런 케이스일 것이다. 내지의 한족들은 이주 후에 이 지역의 거친 땅을 개간하고 자손을 낳아 기르며 대대로 삶을 이어가면서 주변의 소수민족지역과는 구별되는 한족 문화를 온존 발전시켜왔다.
초기 이곳에 정착한 한족들은 비록 생활이 어려워 이곳으로 이주해왔지만 교양수준은 상당히 높았다고 자료는 전해주고 있다. 이들의 후손들은 민간주택이나 각종 공예, 촌락의 구조 등에서 중원의 전통 한족문화를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
그들은 또 한족문화의 바탕 위에서 외래 문화인 남아시아문화와 동남아시아 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내륙변경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외래문화의 수용 흔적은 마을에 남아있는 주택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략적으로 이곳의 주택 가운데 10%를 좀 넘는 1백여채의 주택은 청대의 주택이고 고대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또 마을거리를 산책하면 남아시아의 풍격을 지닌 건축물도 제법 볼 수 있다는 점도 아주 이색적이었다.
이곳의 또 하나 인문적인 특성으로는 중국 서남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僑鄕(화교마을)이라는 점이다. 화순에서 미얀마와의 국경은 70km, 인도는 400km에 불과하고 화순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화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미국, 캐나다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민의 길에 나섰다고 자료는 설명해주고 있다. 화순의 인구는 6천여에 이르는데 해외에 이주한 화순인의 규모는 1만2천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순 출신 화교들은 해외 각지에서 큰 돈을 번 후 상당수가 귀국하여 그들의 주택과 사당을 새로 지었다. 이들 건축물은 획일적이지 않고 각각의 건물의 풍격이 달라 다양한 건축문화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텅총은 고대 사천, 운남지역과 미얀마 인도 등 남방으로 연결되는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이 반드시 거쳐가는 지역이었다. 현재 화순 출신의 화교화인은 미얀마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일본 캐나다 미국 등 10여개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요소로 텅총의 화순은 독특한 건축 풍격, 내지의 한족문화 그리고 미얀마와 인도 등의 남아 문화가 결합한 문화적 다양성과 아름다운 자연풍광으로 중국내에서도 이름높은 관광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화순마을의 입구에는 아주 큰 패방과 함께 여느 다른 古鎭과는 달리 마을에 들어가는데 입장료를 받는다. 입장료가 무려 80위안이다. 표를 구입하고 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방과 관련된 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엔 이곳에서 주로 미얀마 인도 등지로 오갔을 예전 마방들의 유물들이 많았다. 이들이 이동하면서 필요한 각종 생활용품과 마구들이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다.
화순은 미얀마와의 지리적 근접성 등의 요인으로 미얀마산 비취 원석을 가공, 판매하는 가게가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또 특징적인 것은 마을 내의 모든 길이 기본적으로 돌길이다.
돌길을 걸으니 진정 옛마을을 걷는 기분이 느껴지며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되돌아간 착각이 들기도 했다. 비취가게 이외에 화순화교마을에서 두드러진 것은 바로 수많은 객잔(여관)이다. 거의 대부분의 주택이 객잔영업을 하는 것 같았고 오늘 빈방이 있다는 팻말이 내걸려있다.
화순에서 주목할 관광포인트로 화순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중국 전체를 통털어 농촌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서관이고 도서관의 건축이나 정원 그리고 전체적인 구조가 아름답기로 이름높은 도서관이고 원래 장서가 1만여권이었고 상당수가 귀한 古典籍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장서가 13만여권에 이른다. 1924년 해외에 사는 화순 출신화교들이 돈을 모아 건설한 도서관이다..
민국시기 저명한 지식인인 호적 등의 題字도 볼 수 있다. 이런 도서관의 역사와 주민들의 의식을 감안해보면 이곳 화순이 비록 변경의 조그만 시골마을이지만 그 문화수준은 어느 도시에 못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화순 화교마을을 둘러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보행가로 가보았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각 도시의 보행가는 가장 번화한 지역이면서 동시에 켄터키 프라이드나 맥도날드와 같은 미국자본의 패스트푸드점이 있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곳 보행가에는 없다.
도시규모가 작아서일까? 이곳에 오면 커피라도 한잔 마실수 있을까 기대를 하고 왔는데 없어 좀 허탈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다. 모레 운남과 미얀마의 국경도시인 루이리로 가는 버스표를 80위안을 주고 사다. 시간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버스요금 등으로 미뤄보면 대리에서 이곳 텅총에 오는 시간보다는 적게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