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우 재무ㆍ이낙선 상공ㆍ오정근 국세청장 등과 '한솥밥'
경제부처 개각 염두에 둬 수첩에 적어둔 후보리스트 중 낙점
신임 장관이 배석한 자리서 부처 담당국장 혼내며 기강 잡아
1969년 10월 17일 삼선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77%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가해 그 3분의 2(65%)가 삼선개헌에 지지를 표했다.
4·19 혁명의 기억이 생생한 당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정은 오늘의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강했다.
야당과 언론의 저항도 극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그토록 높은 찬성률에 박통과 여당은 한껏 고무되었다. 집권 세력은 삼선개헌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정권에 대한 ‘명확한 지지’로 간주했다.
삼선개헌에 대한 강건한 지지를 확인한 닷새 후인 10월 22일, 큰 폭의 개각이 있었다. 그 개각으로 ‘진짜’ 쓰루 경제팀이 꾸려졌다. 6월의 개각은 박충훈 부총리를 쓰루로 교체한 1인 인사였다. 당시 박 부총리의 갑작스러운 사표로 일단 부총리 한 사람만 채워 넣었던 청와대는 대폭적인 개각을 ‘삼선개헌 투표’ 뒤로 미루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부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경제부처 장관들은 한 팀이라고 부르기에는 각자도생에 익숙한 노련하고도 막강한 장관들이었다. 한참 후배 내지 부하였던 쓰루가 부총리로 들어왔으니 한마음 한뜻으로 앞으로 내달리기엔 너무 중후했다.
10월의 새 경제팀은 쓰루와 박통, 그리고 정일권 총리 간의 교감 속에 꾸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총리가 되고 난 후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개각에 대비해 경제부처 장관 후보 리스트가 담긴 수첩을 늘 소지하고 다녔다.
그가 ‘조직’한 경제팀은 남덕우 재무장관, 이낙선 상공장관, 오정근 국세청장 등이었다. 이전 경제팀이 경륜과 관록의 됨됨이였다면, 쓰루팀은 패기와 추진력으로 충만한 인물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또 평소 그와의 인간관계로 보더라도, 그 팀은 그와 진퇴를 같이할 공동운명체였다. 이전 경제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새 경제팀은 잘 알고 있었다. 남 재무도, 이 상공도, 취임 제1성이 팀워크였다.
쓰루가 새 경제팀을 구성하기 전부터 재무장관이 교체될 것이라는 추측 기사가 빈번했다. 안정 속의 성장을 이루는 핵심적 정책 수단(통화량과 금리)을 관할하는 재무장관 남덕우는 금융정책을 통한 안정론자였다.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위원 활동하는 모습을 본 쓰루는 그의 정책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의 성공의 키를 쥐고 수출 확대를 진두지휘하는 상공부 장관 이낙선. 국세청장으로서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내자(세수) 동원에 혁혁한 공을 세워온 그와 쓰루는 ‘형제와 같은 우애’로 설명된다. 이낙선 씨 전에 상공장관을 하던 김정렴 씨는 현금차관 등 쓰루와의 ‘타협 불가능한 정책관의 차이’ 때문에 쓰루 경제팀과 같이하기 힘들었다. 그는 10월 개각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해, 대한민국 관료사에 전무후무한 봉직 기록으로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관료의 귀감을 구축했다.
미국의 원조가 실질적인 의미를 잃어가는 가운데 2차 계획의 성공적 추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내자의 핵심인 세수의 지속적 증대를 책임질 국세청의 오정근 청장. 박통과 같은 쿠데타 세력인 오 청장은 쓰루가 죽은 후 1974년, 쓰루 장자의 결혼식 주례를 설 정도로 양가는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 언론은 새로 짜인 쓰루 경제팀을 응원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김학렬 팀의 경제정책은 매우 오서독스(orthodox)한 방식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점이다. …… 남 재무의 이론이나 김 기획의 경제 문제에 대한 이론적 무기는 오서독스하다는 점에서 공통의 광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9월에 이미 연말 통화량 상한에 도달하고 있는 상황, 10%를 넘어선 물가상승률, 외환 수급계획의 적자 한도에 육박하는 경상수지 적자 등을 지적하면서 이들 경제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정 기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그리고 이들 문제가 단기에 해결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정부의 흔들림 없는 정책 추진과 국민의 인내를 주문하여, 안정을 위해 긴축정책을 펴야 할 정부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경제팀에 대하여 소신껏 안정정책을 추구할 것을 부탁하는 한편, 국민과 정부에 대해서는 확장주의의 병독이 모두 씻겨 나가고 안정정책이 그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하여 국민이 안정된 번영을 구가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70년대를 진정한 풍요의 시대로 만들 수 있는 길이라 확신한다.”
개각 사흘 후 10월 25일에 열린 ‘쓰루 팀’의 첫 경제장관회의. 그는 각 부처를 돌아가며 담당 국·과장들에게 질책을 가했다. 상공부 상역차관보는 거짓 보고했다고 호되게 꾸짖고, 재무부 외환국장은 외환 수급계획에 수출산업 시설재 도입자금을 포함하지 않은 행정 오류를 저질렀다고 기합을 줬다. 재무부는 또 서민 겨우살이용 석탄자금을 방출하지 않았다고 추궁했고, 농협은 고추를 방출했다고 보고하고는 실제로 방출하지 않았다고 퍼부었다.
신임 장관들은 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을 죽이고 자기네 국장들이 쓰루에게 처절하게 당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대학교수 출신인 남덕우 재무장관도 묵묵히 쓰루가 쏟아내는 지시를 메모에 옮겨 적기 바빴다.
쓰루의, 쓰루를 위한, 쓰루에 의한 경제팀. 그 팀은 쓰루가 1972년 초 췌장암으로 부총리직을 사임할 때까지 정확하게 2년 3개월 동안 그와 진퇴를 같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