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4:25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2) '기획원의 힘'부활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2) '기획원의 힘'부활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5.25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철 發進'마무리되자 '경제부처 휘어잡기' 위해 제도 정비에 칼 빼들어
자유누리던 부처 반발 의식해 속전속결…'불도저 왕초'의 방식도 재활용
경제장관회의 정례화ㆍ국정과제 내세워 수시호출ㆍ 포철 사업도 직할로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쓰루는 자신이 활개 칠 무대를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경제‘팀장’으로서 스스로 그 무대와 장치를 마련하였다.

부총리 취임 후 종합제철 건설사업을 발진시키는 작업에 전력투구하느라 6~7월이 정신없이 지났다. 8월은 한일각료회담 등을 통해 포철건설에 대한 일본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느라 지나갔다. 그가 경제팀장 부총리로서 활개 칠 무대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제2의 기획원 전성시대를 열기 위한 제도 재정비는 관계 부처가 집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 전에 급속히 이뤄졌다. 특히 ‘국제신사’, ‘호인’으로 불리던 박충훈 부총리 체제에서 자유를 누리던 개별 부처들이 그 장악의 주 대상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왕초의 방식들을 업그레이드해 재활용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부족하면 새로운 장치를 마련하거나 다른 부처 장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거친 수법 동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 부총리는 특유의 회오리 바람식으로 일을 몰고 갔다. 업무에 정통한 데다가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었고 또 심술과 험구가 보통이 넘는지라 경제부처들도 얼마 안 가서 순종하는 자세를 보였다. …… 김 부총리가 상사로 모셨던 장기영 부총리와는 일하는 방식도 달랐고 사이도 안 좋았지만, 경제팀장으로서 경제부처를 확실히 휘어잡고 일을 몰고 간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장 부총리가 큰 배포와 분위기로 밀고 간다면 김 부총리는 면도칼 같은 논리와 날카로움으로 난제를 하나씩 풀어갔다.”

쓰루는 박충훈에 의해 순화된 왕초의 총괄 조정 시스템을 이어받았다. 박 부총리 때 유명무실해진 경제장관회의를 정례화하고, 또 과제별로 수시로 관련 장관들이 만나는 왕초 때의 녹실회의를 부활시켰다.

박 부총리 때 상공부에 넘겨준 석유화학 부문 육성은 그대로 상공부의 관할로 남겨두되, 종합제철 건설 등 박통의 숙원사업은 기획원의 관할 업무로 계속 남겨두었다.

왕초 때와 유사한 부처 총괄 조정 시스템에, 예산 철에는 주요 부처 장관과 그 스태프로 하여금 기획원에 와서 예산 요구의 근거를 설명하게 하는 ‘예산심사회의’를 신설해 ‘악명’을 높였다. 날이 갈수록 경제 부처에 대해 제왕적 지휘자와 같은 그의 존재감은 강해져갔다.

부총리가 되기 전 정치권에 대한 쓰루의 생각은 여느 ‘산업화의 역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야 할 것 없이 ‘각종 민원사업으로 나라 살림을 해치는 사람들’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좋게 보아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는 정도였다.

196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제 3차 IECOK(대한 국제경제협력체)는 한국정부의 포철 건설 지원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 당시 김학렬 경제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 회의에 박충훈 부총리와 함께 참석했다.
김학렬 부총리는 박충훈에 전 부총리에 의해 순화된 왕초의 총괄 조정 시스템을 되살렸다. 박 부총리 때 유명무실해진 경제장관회의를 정례화하고, 또 과제별로 수시로 관련 장관들이 만나는 왕초 때의 녹실회의를 부활시켰다. 사진은 196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제 3차 IECOK(대한 국제경제협력체)에 참석하기위해 당시 김학렬 경제수석(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박충훈 부총리(오른쪽)와 함께 프랑스로 출국하는 장면.

경제수석을 거쳐 부총리가 되면서 그는 큰 변화를 보였다. 우선, 남의 눈에 띌 정도로 국회의원에게 고분고분해졌다. 정책 담당자로서 자기 하고 싶은 소리, 해야 할 얘기를 당당하게 (모나게) 하더니, 이제는 경제부처의 수장으로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일단 ‘존경의 염(念)’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기자의 눈에 오죽 그 변화가 놀랍고 재미있었으면 그가 달라졌다는 게 신문 가십 기사의 주제가 되었겠는가.

“개회식 아침 국회에 나타난 김학렬 부총리는 여야 의원들의 축하 악수 공세에 밀려 마냥 즐거운 표정. 면도날 부총리가 쇠뭉치 종합제철과 씨름을 벌일 자신이 있느냐는 어느 의원의 익살에 덧붙여 ‘재(才) 부총리라고 하니 솜씨 좀 봅시다’는 말이 연거푸 쏟아져 나오기도. 이병희 (여당) 공화당 총무는 면도날에 배짱까지 세다고 하니 한 판 칠 만한 사람이라고 조크. 여기에 김 부총리는 한껏 몸을 낮추고 ‘성심성의껏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만을 연발.”

누구에게도 굽혀본 적이 없는 깐깐한 성격이었지만 대통령, 즉 정권의 정치적 입지까지 고려해야 하는 부총리가 되면서부터는 국회에 대해서 자신을 한껏 낮추고 국회의원들과 적극 교분을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부총리로 취임하고 나서 언행도 훨씬 신중해졌다. 험구도 거의 쓰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래서 그의 부총리 재임 초 언론은 ‘쓰루까지 변하는 것 보면 부총리 자리가 대단한 모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김학렬 자신이라는 게 중평. ‘돌풍 장관’의 이미지는 ‘신중 장관’으로 변색되었고 그의 유명한 험구와 독설도 상당히 순화되었다. …… 그래서 기획원 주변에서는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새 학설이 유포될 정도.”(매일경제 1969년6월12일자)

부총리 쓰루는 특히 정계나 언론계와의 관계에서 그토록 자신과 어긋나던 왕초를 닮아갔다. 그런 ‘뉴 쓰루’에 대해 ‘정통 관료 차관이 정치인 부총리로 탈바꿈’한 결과로 보는 시선들이 많다. 소위 ‘불도저 부총리(正)+면도날 차관(反) = 정치인 쓰루 부총리(合)’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 부총리 취임 이후 대국회 관계가 원만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데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한편, 언론을 충분히 활용한 점, 또 현장과 실무자를 직접 챙기면서 관료적 위계질서를 신경 쓰지 않았던 점 등도 장 부총리의 업무 스타일과 닮은 꼴이었다.” (경향신문 1969년 7월7일자)

“김 부총리께서 재무장관까지는 그냥 직업 공무원이었는데 부총리가 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스위치했습니다. 그 변신이 아주 빨랐어요. 그래서 ‘역시 수재!’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책 '육성으로 드는 경제기적')

이는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이제 부총리까지 되었으니 (좋은 의미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애써 조언한 결과였다. 또한 쓰루 자신의 (경제수석으로 청와대에서 2년 반 와신상담하며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자발적 변신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소신을 굽히지 않던 차관 시절에 비하면 부총리 쓰루는 완연한 정치인이었다. 그의 청와대 수석 시절의 깨달음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