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도 처음엔 난색…국제 철강업계"건설해도 적자의 늪 벗어나지 못해"
건설TF팀은 외국책 끼고 연일 밤샘 작업… 한일각료회담전 일본 설득이 관건
선진국들이 모두 손을 든 마당에 한국이 자본과 기술을 구할 수 있는 곳은 한국의 최대 철강 수입국인 일본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이 수입하는 철강의 80%는 일본 제품이었다.
국교를 정상화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일본에서 포철 건설에 필요한 자본(차관)을 들여올 구석은 대일청구권자금뿐이었다.
그러나 청구권자금은 1965년 이후 10년 동안 어느 부문에 얼마가 쓰일지 이미 한일 간에 공식적으로 합의해놓은 바 있었다. 그 용처에는 포철 같은 사업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자금을 포철 건설에 돌린다는 것은 바로 농어촌개발(이나 중소기업 육성)의 지연을 의미했다.
박통에게 농촌에 쓰일 청구권자금을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으로 돌려야 한다는 건의를 한 것은 쓰루였다. 박통의 농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청구권자금 전용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결국 박통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쓰루의 나라경제를 위한 충정 어린 진언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며칠을 두고 두 번, 세 번 진언하는 쓰루의 충정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막 부총리로 임명한 쓰루, 박통 자신이 포철 건설을 제대로 추진하라고 청와대에서 내보낸 그가 자신의 명운을 걸고 덤벼드는 일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청구권자금 5억 달러의 약 4분의 1(1억 2000만 달러)이 포철 건설 한 사업에 투입되었다. 아무리 그가 애지중지하는 국책사업이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많은 달러를 모두가 안 된다고 아우성인 단일 건설사업에 투입하기로 한 것은 박통으로서는 자신의 명운을 건 결단이었으리라.
국제철강 커뮤니티와 일본이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반대하는 요지는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업의 규모(철강 생산 60만 톤)로 보나, 사업에 따르는 비용(금리 등 경영 여건,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유지 등)으로 보나, ‘처음부터 적자가 나고 적자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어서 결국 빚만 쌓이게 된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에 필수적인 기술 협력은 민간 철강회사가 결정할 사항이지,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이 아니다’는 입장이었다.
쓰루는 일본 비협조의 그 두 가지 핑계를 해소하기 위해 관민 양동작전을 폈다. 정부(포철 TF팀)는 경제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토록 했다. 제철 규모를 늘려 규모의 경제를 갖게 하고, 도로·항만 등의 건설 지원을 확대하여 포철 제품의 경제성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도록 했다. 민간(박태준 등 포항제철팀)은 일본 철강회사들로부터 기술 협력을 받아내는 데 집중하게 했다. 쓰루는 8월 말 도쿄에서 열릴 예정인 한일각료회담을 승부처로 삼았다.
명동의 YWCA 사무실을 빌려 철야 작업을 밥 먹듯이 하는 전담반은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기획원 장관실에 들러 경과보고를 해야 했다.
한일각료회담이 다가오면서 쓰루가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잦아졌고, 실무팀 보고의 빈도도 높아져갔다. 그는 '종합제철소가 경제성이 있으려면 최소한 103만 톤 규모가 되어야 한다는데, 그러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가? 그 돈으로 103만 톤을 만들었을 때 가격 등에서 국제 경쟁력이 있는가? 만약 경쟁력이 확보되지 않는 경우, 국제 경쟁력이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제철 수요는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서부터 ‘공장 건설을 하는 데 장애가 무엇인가? 원료 확보는 어떻게 하는가? 건축자재 수송에 문제는 없는가?’ 등등의 실무적인 사항까지 철저하게 보고를 받고 검토하고 해결책을 고민했다.
보고받는 그가 어찌나 날카롭게 허점을 집어내는지 모두들 지옥 훈련하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한다. 한 달 동안 TF팀으로 일하고 기획원으로 돌아온 노인환(훗날 전경련 부회장, 국회의원) 공공차관과장은 “정말 죽을 고생을 했다”면서 외국 책을 갖다 놓고 최신 제철 공장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철이 만들어져 나오는지부터 철저하게 공부했다고 TF팀 생활을 전했다.
한 달간의 철야 작업으로 TF팀은 1969년 7월 말, 포철신사업계획서(‘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제철공업개발에 관한 보고서’)를 그에게 제출했다. 그는 이를 정부의 계획으로 확정 공표했다. ‘철강 생산 규모는 100만 톤으로 한다’, ‘건설과 그 후 경제성 확보를 위해 정부가 지원에 만전을 기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신사업계획 확정 후 포철 TF 팀은 바로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한일각료회담이 열리기 전에 일본의 관계자들을 상대로 로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