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8 20:08 (수)
◇ 칠레 현지취재 여록= '示威는 현재 진행형'
◇ 칠레 현지취재 여록= '示威는 현재 진행형'
  • 산티아고 (글ㆍ사진)=성태원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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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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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잠잠하던 시위는 지난해말 다시 점화… 시위 격렬해지자 장갑차서 물대포
"지하철 30페소(50원)인상 아닌 30년 빈부격차 떄문" 개혁 요구 시위문구 눈길
구조적 빈부격차 골 깊어져 '南美 우등국가'흔들… '우파 정권'의 앞날도 불투명
사진설명
칠레 시위는 수도 산티아고에서 시작돼 전국 곳곳으로 번졌다. 사진은 지방 항구도시 뿌에르토 몬트 버스터미널 앞 도로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들 모습.

말로만 듣던 칠레 시위 현장을 목전에서 지켜볼줄을 미처 몰랐다. 칠레 정정(政情)의 불안정과 배경을 취재하려고 산티아고로 날라갔지만 시위가 한 풀 꺾인 뒤였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20일 오후 7시쯤. 지구 반대편 칠레 수도 산티아고 현지에서 취재 8일째 되던 날이었다. 산티아고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승용차 편으로 숙소로 돌아가던 중 나는 시위 현장과 정면으로 맞닥트렸다.

오도 가도 못하고 차 속에 갇힌 채 눈앞의 시위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방통행 도로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광장 인근에서 시위가 재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많은 차량들이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한참 후 역주행이란 모험 끝에 가까스로 현장을 벗어나긴 했지만 흥분과 공포의 시간을 보냈다.

우파정권의 위기인가.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산티아고 라 모네라 대통령궁 모습. 우파 대통령인 그는 집권 1년 반만에 발발한 폭동 수준의 시위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경비대원 옆에 가족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 10월 중순 발발한 칠레 시위 사태는 폭동 수준으로 발전하며 11월까지 이어지다 12월 들어선 소강상태를 보였다. 내가 방문했던 12월 중순에도 비교적 조용했다. 계절적으로 여름 휴가철에 접어든 데다 두 달 간 이어진 시위가 숨고르기에 들어간 때문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이날 시위로 사태가 끝난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칠레인들은 물론 전 세계가 알게 됐다.

시위대와 진압 경찰 당국이 뒤엉킨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경찰 장갑차에서 내뿜는 물대포와 최루탄 가스가 시위대를 공격하자 시위대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들은 줄지어선 차량들 사이로 어지럽게 왔다 갔다 하며 몸짓, 손짓을 했다. 자신들의 시위에 동참해 달라는 뜻처럼 보였다. 후선에 집결해 있던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거나 갖은 소리를 내며 저항했다. 대부분 복면을 하거나 마스크를 쓴 상태였다. 등에 북을 둘러맨 시위대원은 ‘둥~둥~둥’ 연신 북을 쳐댔다.

동상
산티아고 시내 이탈리아 광장에 위치한 마누엘 바케다노 장군(남미태평양전쟁 영웅) 동상에 시위대의 각종 구호가 빼곡히 적혀 있다. 우리의 광화문 광장 격인 이곳은 칠레 시위의 메카로 불린다.

일단의 시위대는 건물 입구에 내려진 철제 셔터를 마구 흔들어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게 했다. 한국의 시위 현장에서 보아 온 모습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칠레는 다수 백인(독일·이탈이아·스페인계 약 60%)과 혼혈족(약 31%), 원주민(약 3%) 등으로 구성된 나라다. 그래서인지 시위에서도 우리와는 다른 남미 특유의 열정과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3개월을 넘긴 시위로 27명이 죽고 약 3천명이 다쳤는데 그중 수 백 명이 경찰 고무총탄에 의해 실명 위기에 빠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 같으면 정권이 넘어가고도 남을 만한 국민 피해인데 칠레 정부는 굴러가고 있었다.

“칠레 너마저...” 이번 칠레 시위를 놓고 남미 이웃 국가들은 물론 세계 여러 곳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경제와 사회, 정치 등 여러 면에서 남미 모범국이자 안정된 나라로 치부됐던 칠레마저 “이대론 못 살겠다. 살 수 있게끔 제도를 개혁하라”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줄 몰랐다는 얘기다. 좌파 포퓰리즘 끝에 나라가 거덜 난 베네수엘라, 한때 경제 강국으로 치부되다 주저앉은 아르헨티나, 중진국 함정에 빠져버린 이빨 빠진 남미 맹주(盟主) 브라질 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칠레만큼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왠일이냐”는 뜻이다.

칠레에는 상대적으로 독일계 백인이 많아 남미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사회가 합리적으로 굴러가고 안정돼 왔다는 얘기를 현지에서 들었다. 또 칠레인들은 좀 힘들어도 웬만하면 참는 편이며, 계산에 빨라 이 정부가 아니다 싶으면 좌파든 우파든 선거를 통해 갈아치운다고 한다.

그런데 칠레 국민들은 집권 1년 반 밖에 안 된 중도 우파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에 대해 퇴진 또는 탄핵을 요구하고 나선 것을 보면 당장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년 이후와 노후를 기탁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연금, 아파도 병원 가기가 겁나는 의료 보험, 경제적 약자들의 공부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교육제도, 소득에 비해 턱없이 비싼 물가와 공공요금, 너무 심하게 벌어진 빈부격차 등이 폭동 수준의 시위 사태를 몰고 온 것이다.

시위대들은 시내 곳곳에 “30페소가 아닌 30년(때문)”이라는 문구를 보란 듯이 써놓았다.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 상당) 인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커져만 간 사회적 불평등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소강상태에서 벗어난 듟한 칯레소요 현장을 지난해 말 현지취재중 직접 목격한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칠레 산티아고 라 모네다 대통령 궁 앞의 헌법 광장에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 대통령 동상 앞에 선 성태원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비운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선거를 통해 칠레에 사회주의를 처음 탄생시킨 정치가였다.

일각에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200여 년 동안 백인계 중상류층과 서민층 사이에 줄곧 쌓여 온 계급 문제가 이번 시위를 통해 폭발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피녜라 대통령은 우파 대통령답게 공공요금을 슬금슬금 인상하고 세금을 올리다가 서민들의 큰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제 시위대 요구에 맞춰 연금과 의료보험, 교육제도를 고치려면 재정에 압박이 오고 부자 증세를 추진하면 기득권층의 반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수습책을 내놓았지만 사태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전해졌다.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우파)과는 다른 좌파적 조치를 요구받고 있어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궁금해 칠레에 이민 와서 40년 넘게 산 교포 기업인 한분을 산티아고에서 만나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번 사태는 터질 게 결국 터진 것”이라며 “그래도 칠레인들은 계산이 빠르고 극단적인 좌파 포퓰리즘 만큼은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일이 칠레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칠레와 칠레인을 신뢰하기 때문에 종국에는 사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습될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체류 내내 사태 수습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구조적으로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골이 너무 깊고 복잡하게 얽힌 데다 그 역사도 오래 돼 한꺼번에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레 서민들의 개혁 열망은 그 어느 때 보다 강해 보였다. 시위대가 건물 외벽에 써둔 “칠레는 깨어났다.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는 구호가 그런 점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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