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 연탄 아궁이에 뜨거웠던 '도전과 성취' 꿈 자취 한 곳에
강남개발업고 아파트 건설 붐… 잠실시영은 고가 아파트 변신
大入 최전선 종로 학원가 풍경…지나친 産兒제한의 그림자도
산업화의 상징인 포니 자동차 실물전시 …시민들 소장품 내놔
우리의 삶을 수십년째 짓누르고 있는데도 당췌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 있다. 부동산과 교육문제다. 여전히 아파트 사기는 삐듯하고 툭하면 바뀌는 교육정책은 우리 아이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후 독립한 나라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는 자부심도 이 문제 앞에만 서면 언제나 작아진다. 특히 부동산은 소득 양극화의 불쏘시개가 됐고 교육과 취업 문제는 ‘흙수저’와 ‘금수저’란 신조어를 낳았다.
어느나라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고 나라는 부강해졌다는데 여전히 ‘서울살이’는 녹녹치 않다.
세밑에 그 民生경제의 어제를 돌아볼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서울살이의 시계를 과거로 돌린 곳이 있어서다. 해방후 서울 삶의 현장을 모아둔 곳이다. 고단했던 일상을 고스란히 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낭만과 여유가 요즘보다 더 있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서울 7호선 지하철 태릉역입구역 6번출구에 나와 조금 걷다가 바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서울생활사박물관이 보인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2010년 북부 법조단지가 도봉동으로 이사가면서 한동안 방치됐던 법원 건물을 서울시가 리모델링으로 박물관을 꾸며 지난 9월 문을 열었다. 서울 서소문로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이다. 특히 이 박물관을 가득 채운 전시 유물 1천여 점은 대부분 시민이 내농았다. 그래서 더욱 생동감이 있다. 민생경제의 과거발자취가 가슴에 와 닿는다.
1층 입구에 들어서면 중년이라면 낯익은 포니택시가 실물그대로 반긴다. 그옆에는 기아자동차의 첫 승용차 모델인 브리사도 있다. 이 두 차량은 한국 산업화의 기폭제가 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7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은 머지않아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고 했다. 당시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기적처럼 80년대 후반부터 우리는 마이카시대를 열었다.
서울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직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 지방사람들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가만큼 어려웠다.
단칸 셋방이라도 얻으면 다리를 쭉 뻗고 사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하는 이가 많았다. 손에 입김을 불다가 집에 들어오면 가스레인지가 없던 시절에도 행복했다. 연탄 아궁이 위에 곤로를 놓고 별난 반찬을 다했다. 알람시계는 따로 필요 없었다. 한방중 연탄갈이 시간은 어김이 없었다. 그 때 쯤 해방촌에 걸린 남산의 달은 얼마나 고왔던지. 그 달은 고향도 비춰주었다.
70년 후반부터 아파트 붐이 일자 내집마련의 꿈은 저만치 다가온 것 같았다. 강남에 대규모 개발이 이뤄지면서 아파트 장만은 중산층의 상징이 됐다. 잠실 시영아파트(현 잠실 파크리오아파트) 준공식에 구름처럼 사람이 몰렸다. 반포 주공아파트는 이젠 서민이 아니라 웬만한 부자도 넘보기가 어려운 아파트가 됐다. 전세가격이 20억원 안팎이다. 이 박물관에 걸린 강남부동산중개업소 간판사진이 ‘강남불패’를 상징하는 듯하다.
지금은 강남구 대치동과 양천구 목동의 학원가를 떠 올리지만 강남개발이 되기전에는 종로일대는 학원다니는 학생들로 붐볐다. 80년대 신군부 정권은 과외금지란 극약처방을 했지만 사교육 시장은 지금까지 쪼그란든적이 없다. 학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 했다. 한 겨울 교실에서 식은 도시락은 데워 먹던 난로사진은 그 뜨거웠던 학구열을 말해주는 것 같다.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면서 서울의 몸집도 커졌다. 1949년에 현재 은평구와 강북구는 물론 서대문구 • 마포구 •종로구 • 성북구의 일부 지역을 흡수해 면적이 해방무렵의 2배인 268㎢로 늘었다. 1963년에는 더 확장됐다. 경기도에 속했던 광주군 • 양주군 • 시홍군 등의 전체 또는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됐다. 여기에 뽕나무 밭이 많았던 한강 이남(강남)이 대거 서울로 들어왔고 이후에도 몇차례 서울의 외연이 커지면서 현재 서울은 605㎢ 규모의 면적을 갖췄다.
그렇게 늘렸는데도 인구가 급증해 서울은 그야말로 만원이다. 버스 여차장이 곡예를 하듯 문을 닫고 발차하는 아찔한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서울 지하철 9호선을 타면 ‘70년대 만원버스’를 경험할수 있다. 학교 교실은 콩나물 시루같이 빼곡했다.
그래서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폈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사회 인프라시설이나 복지행정을 펴기에는 나라의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온 표어가 끔찍할 정도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그런데 이 표어는 요즘에 꼭 들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교육비와 주거비의 부담으로 ‘에듀푸어’를 낳고 있고 최근의 부동산 보유세 증가로 ‘하우스 푸어’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지나치다 싶을정도로 산아정책을 펴다보니 이젠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나라가 됐다. 아이를 낳을수 있는 여자들의 출산율이 1명도 채안된다. OECD국가중 꼴찌다. 성비(性比)불균형과 출산율 저하는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2004년부터는 출산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 선회를 했지만 지금생각하면 한 발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8월 통계청 조사결과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지난해 0명대로 진입했다. 이로써 한국은 인구 67만명인 중국의 행정자치 지역 마카오를 제외하면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한 ‘출산율 1명대 미만’ 국가가 됐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98명으로 출생통계 작성(197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여성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한 명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인구가 줄면 나라의 경제나 국력에 치명상이 된다. 부동산가격이 떨어지면 개인자산 규모가 쪼그라 들고 이에따라 구매력도 낮아져 경제활력을 찾기가 좀처럼 어려워진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날순 있지만 대학교 경영에도 직격탄이 된다. 벌써부터 지방대학의 재정형편이 악화돼 벛꽃피는 순서대로 지방대가 고사할 것이란 말이 나온다.
이래 저래 또 서울살이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주거와 교육정책은 100년을 내다보고 시행해야 하는데 정권이 바뀔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락가락해 정책의 신뢰가 떨어졌다. 이 두 정책에는 여야 정치권이 뼈대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합의라도 해야할 판이다.
그래도 서울서 3대이상 살고 있는 ‘서울토박이’들도 적잖다. 조선시대 한양의 거주인들은 북촌(북악산 아래). 님촌(남산 아래). 동촌(낙산 부근), 서촌(서소문 내외). 그리고 중촌(장교와 수표교)권 등으로 나눠 거주했고 권역별로 정치색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동서남북의 네 마을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문신), 남촌에는 무반(무신)이 살았다. 또 서촌에는 소론이 많이 살았고 북촌에는 주로 노론들이 살았다고 한다. 남촌에는 주로 남인이 살았지만 소론들도 일부 섞여 살았고 주로 무반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자녀교육을 내세워 상경한 시골 지주들이 계동이니 가회동 등 북촌에 개량 한옥을 짓고 살았다. 그 때 지방에서 맨손으로 을라은 시람들이 있다. 이들은 안암천 제방이나 신당동 같은 지역에서 ‘토막’이라고 물리는 허술한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직후에는 청계천과 해방촌에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서울생활사박물관 안내센터에서 일 하는 배세은씨는 "주말에는 1천여명의 관람객이 몰리고 특히 중장년층들은 지난날의 서울생활상을 돌아보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고 말했다.
건국후 서울은 비대해졌다.하지만 세계 어느나라의 수도 못지않게 사회인프라나 주거환경은 좋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서울의 삶은 고단하다. 이 패러덕스를 풀어야 후세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것이란 생각을 서울생활사막물관을 나서면서 떨칠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