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2:05 (금)
LG 두 회장의 간소한 장례… 사회에 신선한 충격
LG 두 회장의 간소한 장례… 사회에 신선한 충격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12.22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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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타계 구자경 명예 회장의 빈소조차 알리지 않고 영결식도 생략
2018년5월 서거한 구본무 회장 올 1주기행사는 20분간 사내추모로 대신
구본무 생전 발자취 새삼 주목…초우량 LG기반 마련하고 조용히GS 분리

구자경 LG그룹 명예예회장이 지난 14일 타계했다. 이렇다할 영결식도 없이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빈소가 차려진 병원도 알리지 않았고 조문은 가족과 경영진 등으로 제한했다. 1년 반 전인 2018년 5월20일 그의 큰 아들인 구본무 LG그룹회장이 서거할 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 5월 20일에 치러진 구본무 회장 1주기 추모식도 조용하고 간소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예회장이 지난 14일 타계했다. 이렇다할 영결식도 없이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빈소가 차려진 병원도 알리지 않았고 조문은 가족과 경영진 등으로 제한했다. 1년 반 전인 2018년 5월20일 그의 큰 아들인 구본무 LG그룹회장이 서거할 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해 치러진 구본무 회장 1주기 추모식도 조용하고 간소했다. 사신은 고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구본무 회장이 생전인 1999년 담소를 나누는 장면/LG제공.
구자경 LG그룹 명예예회장이 지난 14일 타계했다. 이렇다할 영결식도 없이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빈소가 차려진 병원도 알리지 않았고 조문은 가족과 경영진 등으로 제한했다. 1년 반 전인 2018년 5월20일 그의 큰 아들인 구본무 LG그룹회장이 서거할 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해 치러진 구본무 회장 1주기 추모식도 조용하고 간소했다. 사신은 고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구본무 회장이 생전인 1999년 구자경 회장이 세운 충남 천안 연암대 인근의 농장에서 담소를 나누는 장면/LG제공.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비 공개리에 열린 추모식은 20여분 만에 끝났다. 생전에 격식을 멀리하고 소탈했던 그의 성품을 감안했다. 두 LG회장 부자(父子)가 보여준 금도와 절제는 재계는 물론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구본무 회장은 아버지보다 1년여 빨리 세상을 따났지만 평소에 아버지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구본무 회장이 남긴 경영행보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고(故) 구본무 회장은  오너 3세 회장으로 23년간 재직했다. 소리없이, 그러나 눈에 띄는 여러 경영 발자취를 남기고 떠난 기업인이다. 그는 창업회장 조부 구인회와 2대 회장 아버지 구자경(94)이 거의 반세기(48년) 동안 닦아 놓은 그룹을 이어 받아 21세기에 걸맞게 LG를 탈바꿈 시켰다.

그는 비록 성품은 소탈했지만 기업 경영과 기업인의 사회적 역할이란 면에서는 다른 어느 오너 기업인도 하기 힘든 큰 울림을 남겼다. 사람들은 곧잘 그를 ‘따뜻한 집념의 승부사’로 기억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과 머릿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은은한 인격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구본무는 1995년 2월, 50의 나이로 LG그룹 3대 회장에 취임했다. LG를 향한 그의 포부는 당시 취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저는 LG를 반드시 ‘초우량 LG’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해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고 저력입니다.” 이때부터 그는 23년 동안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뚝심 있게 ‘초우량 LG’ ‘1등 LG’를 추구했다.

구인회가 창업한 LG그룹은 삼성그룹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다시피 해온 유서 깊은 재벌 가문이다. 그러다 보니 LG는 보수적이었다. 사시(社是)도 ‘인화(人和)’였다. 진취적인 사업 전개보다 돌다리도 두들겨가며 안전하게 사업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았다. 갓 50대에 취임한 젊은 회장 구본무는 ‘초우량’과 ‘1등’을 앞세우며 그룹에 결기와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인화’를 소홀히 한 건 아니지만 21세기 글로벌 기업 환경에 걸맞은 시스템 구축과 차별화된 사업 운영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회장 취임 직전의 구본무 부회장이 그룹 내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 붙인 일이 바로 오랫동안 써온 ‘럭키금성그룹’이란 그룹명(CI)을 ‘LG'로 바꾸는 일이었다.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며 기어코 관철했다. 새 CI는 취임 한 달 전인 1995년 1월에 공식 선포됐다. 글로벌 기업 경영이 일반화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선견지명이요 이유 있는 뚝심이었다.

구본무 회장 재직 23년의 성과는 지난 5월 추모식 때 잘 정리돼 소개됐다. 그는 LG를 전자·화학·통신 등 3대 업종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시켰다. ▷2차 전지 사업과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TV 등 디스플레이 사업을 키워낸 끈기와 집념의 리더십-20여 년 간 연구개발 투자 견인 ▷2003년 대기업 최초로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지주회사체제 전환을 통해 선진적 지배구조 구축-IMF 외환위기가 계기 ▷새로운 기업문화인 ‘LG Way’ 선포-아버지 구자경 회장 시절 제정한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의 기반 위에서 ‘정도 경영’과 ‘일등 LG’를 추구 ▷생전 마지막까지 공사 현장을 수시로 찾았던 마곡 사이언스파크 가동(2018년 4월/4조 투자)-‘글로벌 LG’의 거점 ▷2015년 ‘LG의인상’ 제정 및 2013년 ‘화담숲’ (곤지암 사립수목원) 개장 등이다.

구본무 회장이 재임 중 동업자 허 씨 가문과 구 씨 형제간 계열 분리라는 대사를 별 다른 잡음 없이 이뤄낸 것도 그의 큰 공적에 속한다. 한국 재벌들이 재산 분할을 놓고 툭하면 골육상쟁을 벌여 온 만큼 귀감이 될 만하다. 이로 인해 2000년대에 새로 탄생한 그룹이 GS, LS, LIG, LF 등이다. 구본무는 1994년 매출 30조 원대에서 2000년대에 GS, LS, LIG, LF 등을 계열분리하고도 2017년 160조 원대 매출을 올리는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같은 기간 해외 매출도 약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키워내 내수 중시 그룹을 글로벌 그룹으로 변모시켰다.

그가 2016년 12월 ‘국정농단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남긴 말도 울림이 컸다. “전경련은 대기업 친목단체로만 남고 헤리티지 재단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앞으로도 정권이 요구하면 돈을 낼 생각이냐”는 청문 의원의 질의에 “그러지 않도록 법을 만들어 달라”고 역 제안해 해당 의원의 말문을 돌리게 했다.

2017년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그는 작년 5월 20일 서울대병원에서 타계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큰 울림을 남겼다. 부자이지만 연명 치료를 마다했고, 조화나 외부인 조문을 정중히 거절한 채 3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장례 방식도 경기 광주 곤지암 화담숲 인근에서 수목장으로 이뤄졌다. ‘화담(和談)’이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라는 의미로 구본무 회장의 아호이기도 하다.

회장직 수행 중에도 그는 탐조(探鳥)와 야구 취미, 자연 사랑을 실천해 소탈한 인간미를 그대로 드러냈다. 2000년 국내 최초의 그림 조류 도감인 ‘한국의 새’를 펴냈다. ‘한국의 민물고기’란 원색 도감도 1주기에 즈음해 출판(LG상록재단)됐다. 1990년 야구단 LG 트윈스(구 MBC 청룡)을 창단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야구광이었다. 1997년 설립한 공익재단 LG상록재단을 통해 ‘화담숲’이란 수목원을 경기 광주에 조성해 우리 숲 생태계 복원을 꿈꾸기도 했다.

LG 경영권은 구본무 타계 다음 달 그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4세 구광모(당시 40) 회장에게 넘어갔다. 원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구원모)이 취임 한해 전인 1994년(20세)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자 2004년 동생(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아들을 양자로 입적해 승계가 이뤄졌다. 구본무 회장 가족들은 중증 노환을 앓고 있던 구자경에게 구본무 회장의 서거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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