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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근대 숙박시설 '손탁호텔'과 '이화학당'의 인연
첫 근대 숙박시설 '손탁호텔'과 '이화학당'의 인연
  • 글= 고윤희ㆍ 사진=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12.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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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시건축전시관)

을사늑약 체결과 아관파천 현장 등 기록한 '貞洞건축역사 박물관'
조선과 대한제국 정치ㆍ외교 중심 건물의 발자취 한 자리에 정리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맞아 조선총독부 체신국자리 헐어 개관

고려를 무너뜨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두명의 부인을 뒀다. 고려의 유력한 무관으로 주로 함경도에 머물면서 첫 부인 한씨와 살다가 공무로 개성출입이 잦아지면서 둘째 부인 강씨를 만났다. 그래서 함경도 고향에 있는 부인을 향처(鄕妻)로, 개성에 있는 강씨를 경처(京妻)로 불렸다.

서울 중국 정동에 있는 영국 성공회 성당건물을 배경으로 보이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전경. 조선총독부 체신부 건물터였던 이자리를 헐어 3.1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3월28일 개관됐다. 실제 사진과 조감도 형식의 사진을 합쳤다. 사진합성=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영국 성공회 성당건물을 배경으로 보이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전경. 조선총독부 체신부 건물터에 지었다. 3.1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3월28일 개관됐다. 실제 사진과 조감도 형식의 사진을 합쳤다. 사진합성=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조선이 건국이 되면서 첫 왕비자리는 둘째인 신덕왕후 강씨에게 돌아갔다. 첫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강씨의 등극은 조선초기 피비랜내 나는 골육상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훗날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건국의 디딤돌을 놓은 만큼 자신에게 세자의 자리가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강씨는 자신이 나은 어린 두 아들 중 한 명을 세자에 앉히려고 정도전과 정략을 맺고 기어코 방석을 세자에 올렸다.

이를 눈치챈 이 방원은 강씨가 병사한 2년 후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을 죽이고 조정을 장악한다.  이성계는 경처이자 왕비인 강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그의 능을 도성안에 조성하도록 했고 지금의 덕수궁 주변에 정릉(貞陵)을 만들었다.

서울시는 일제 잔재인 조선총독부 체신국 건물을 철거하면서 기둥을 서울 광장 인근에 남겨뒀다. 아픈 과거를 잊지말자는 의도다.
서울시는 일제 잔재인 조선총독부 체신국 건물을 철거하면서 기둥을 서울 광장 인근에 남겨뒀다. 아픈 과거를 잊지말자는 의도다.

하지만 이방원은 조선 3대 왕에 오르자마자 이 정릉을 지금의 정릉(서울 성북구 소재)으롱 옮겼다. 릉의 석물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광교)의 다리 복구에 사용하는가 하면, 나머지는 중국 사신이 와서 머무르는 숙소인 태평관을 짓는 데 써버렸다. 얼마나 강씨를 미워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정릉이 있던 자리가 오는날 서울 중구 정동(貞洞)이다. 풍수가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동은 구한말 다시 조명을 받는다. 러시아,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공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면서 대한제국의 정치와 외교 중심가로 떠 올랐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와 미국공사관, 이화여고, 배재학당이 이 부근에 자리를 잡으면서 미국문화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통로역할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과 고종이 한때 거처를 옮겼던 러시아 공관이 주변에 있어 정동은 격동의 역사를 지켜봤다. 이 정동에 한 때 위치했던 근대 건물의 자취를 살필수 있는 공간이 있다. 서울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3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왼켠에 위치해 있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19 )이다.

이 전시관은 서울시가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잔재였던 옛 국세청 별관 건물(조선총독부 체신국 터)을 헐고, 그 자리에 정동의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는 작업의 하나로 설립한 전시관이다. 국내 최초로 설립된 도시건축 분야 전문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지상1층, 지하3층(연면적 2,998㎡) 규모로 지상층에 시민광장을 조성하고 지하 3개 층을 전시관으로 나눠 설계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3월28일 문을 열었다. 주로 이 곳에선 서울도시건축의 변천과정과 기획전시행사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한말 지어진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오른쪽 탑 부분만 남아있다. 명성왕후 민비가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이 공사관으로 들어가 조정의 일을 봤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구한말 지어진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오른쪽 탑 부분만 남아있다. 명성왕후 민비가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이 공사관으로 들어가 조정의 일을 봤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그중  지하통로엔 ‘정동의 역사적 건축물'의 자취를 담은 역사문화 전시관이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이는 미묘한 '북핵 외교전'은 구한말 국제정세와 맞물려 지난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 곳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고 가려졌던 역사적 자취를 기억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광화문 앞 육조거리가 중심지였다면, 대한제국 시대에는 경운궁(현덕수궁)을 중심으로 정동 일대가 정치,외교의 한 복판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移胷)하면서 정동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지로 떠 올랐다. 주요 건물의 옛 사진과 함께 건물마다의 역사적 배경 설명을 붙여 '역사 공부'의 장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초상화)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璹源殿)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직전에 가장 먼저 신축한 서양식 건물이다.

손탁 호텔이 내부모습. 외교밀사역을 했던 독일인 여자 손탁에게 고종이 땅을 하사헸고 그 곳에 지은 국내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다. 당시 정도일대에 있던 주한 외교사절과 대한제국의 관리들이 주요 이용했다고 한다.
손탁 호텔이 내부모습. 외교밀사역을 했던 독일인 여자 손탁에게 고종이 땅을 하사헸고 그 곳에 지은 국내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다. 당시 정동일대에는 외국 대사관이 밀집해 있었고 거기서 근무하는 주한 외교사절과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들이 주요 이용했다고 한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위해 지어진 건물로 외국 귀빈들과의 교류를 사용됐던 돈덕전(惇德殿)도 눈길을 끈다.

중명전(重明殿)은 대한제국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고종의 서재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로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은 본래 조선 시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월산은 인수대비의 큰 아들이었으나 동생인 자을산대군에 밀려 세자가 되지 못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면서 점차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정식 궁호가 붙여졌다. 이후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이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고 경운궁에 머물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으로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안에 여러 근대적인 건물을 갖춰 꺼져가는 나라의 명운을 붙잡던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많은 건물과 다리등이 헐어졌거나 훼손됐다.

중명전(重明殿)은 대한제국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고종의 서재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로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중명전(重明殿)은 대한제국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고종의 서재로 사용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로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그래서 최근 문화재청은 경운궁의 제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작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그 가운데 석조전 (石造殿)은 1910년 고종의 집무실 겸 외국 사신들을 맞는 접견실로 지어진 곳으로 덕수궁 인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지금은 자취가 없어졌지만 이 덕수궁안에는 구름다리(雲橋)가 두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경운궁과 옛 독일공사관 터와 연결됐다. 아관파전 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의 틀을 잡기 위해 궁의 영역을 확장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옛 독일공사관 터를 사들여 궐밖 관청과 연결하는 통로도 만들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은 서울 건축가협회가 위탁 운영을 한다.1~2층은 기획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달초 열린 전시의 한 장면.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은 서울 건축가협회가 위탁 운영을 한다.1~2층은 기획전시와 세미나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6일꺼지 열린 '2019 젊은 건축가상'전시회 모습.

 다른 하나의 운교는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했다.  두 다리는  아치 모양으로 된 석교다. 아래 2개의 출입로가 있었는데 한쪽에는 전차가, 한쪽에는 사람이 다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두개의 구름다리는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  경희궁은 좁은 경운궁을 대신해 외국 손님을 맞이할 때 필요한 관병식(요즘같으면 정상외교의 공식의전행사)등의 장소로 활용됐다

특히 정동에는 구한말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던 러시아공사관이 있었다. 이른바 '아관파전 (俄館播邐)'의 장소로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2월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르네상스식 건물로 6•25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탑 부분과 지하층만 남아 있다. 탑의 동북쪽에서 경운궁까지 이어지는 지하 비일통로가 발견됐다. 

손탁호텔은 1902년 프랑스 태생 독일인 손탁(Sontag)이 세운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손탁은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K.)를 따라 내한했다. 그녀는 명성왕후의 외교 밀사역을 맡기도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으로부터 정동 29번지에 있는 가옥(현 이화여자고등학교)을 하사받았다.

 손탁은 1902년 이 자리에 2층짜리 서양식 호텔을 지었다. 바로 '손탁호텔'이다. 2층에는 귀빈실이, 1 층에는 일반 객실과 식당 및 커피숍이 있었다. 귀빈들이 머물만한 변변한 숙박 시설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손탁호텔은 국내외 주요인사들은 물론 주한 외교시절의 공식 • 비공식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1917년 건물 부지가 이화학당으로 넘어가면서 잠시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22년에 헐렸다.

정동과 세종대로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북쪽으로 2분가량 걸으면 세종대로가 나오는데 이 거리가 바로 조선의 주요 관청이 있던 6조거리이다. 사진은 6조 거리의 관청 배치도를 보여주는 그래픽.
정동과 세종대로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북쪽으로 2분가량 걸으면 세종대로가 나오는데 이 거리가 바로 조선의 주요 관청이 있던 6조거리이다. 사진은 6조 거리의 관청 배치도를 보여주는 그래픽.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현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경운궁안에 있었으나, 1913년 지금의 도시건축전시관 자리인 태평로 1 가61 번지에 새로 세워졌다. 이후 1929년 육상궁(裝祥宮)으로 옮겨저 현재는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 철궁(七宮)에 안치됐다.

 이밖에도 정동일대와 정동과 가까운 곳에 밸기에,영국,독일,프랑스 등의 공관이 들어서 정동은 대한제국의 외교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환구단(圜丘壇)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원형의 제단으로 '환단(圜壇)'이라고도 한다. 1897년 10월 고종은 남별궁(南別宮, 소공동 87-1 번지)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환구단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에 남별궁이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면서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을 허물고 그곳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현재 환구단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호텔이 세워져 있지만, 다행히 1899년 환구단 뒤 편에 3층 8각 건물로 세운 황궁우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석고(石鼓)와석고 대문이 남아 있다.

이곳 정동에서 북쪽으로 2분여 올라가면 세종대로가 나온다. 국가의 정무(政務)를 나누어 맡아보던 육조거리다. 그래서 이 곳 정동과 세종대로 일대 그리고 종로 육의전은 우리나라 정치경제와 외교의 중심지로  그 위상을 지켜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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