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1 20:27 (화)
에디슨과 손잡고 동아시아서 처음 전깃 불 켠 대한제국
에디슨과 손잡고 동아시아서 처음 전깃 불 켠 대한제국
  • 김승희ㆍ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lukatree@daum.net
  • 승인 2019.12.0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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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의 전기박물관)

고종황실서 한성전기 세워 '전기ㆍ전화ㆍ전차' 3종 개혁 日보다 앞서
위탁경영 美경영인의 '회계부정'과 국운 기울어져 근대화 노력 물거품
박물관엔 고종의 전기사업 의지와 '전기ㆍ통신'강국 씨 뿌린 자취 남아
조선황실은 일본 보다 앞서 전등사업을 펼쳤다. 1887년 3월 고종황제가 집무를 보던 건청궁에 전등이 켜지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세계적인 발명왕 에디슨이 기술자를 보내 전등을 켰다. 자료=한전.
조선황실은 일본 보다 앞서 전등사업을 펼쳤다. 1887년 3월 고종황제가 집무를 보던 건청궁에 전등이 켜지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세계적인 발명왕 에디슨이 기술자를 보내 전등을 켰다. 자료=한전.

1887년 3월6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등이 켜진 날이다. 당시 고종황제가 거처하며 나랏일을 보살피던 경복궁 안 건청궁에서 밝혀졌다. 전기를 발생하는 발전기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불빛이 나오자 궐내 상궁들은 줄행랑을 놓았다고 한다.전

전기 공급이 원할하지 않아 전등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자 이를 ‘도깨비 불’이라며 무서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전등사업은 고종 황제가 당시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꼽은 일이다. 강대국 틈새에서 자주적인 국가의 기틀을 세워야한다는 상징적인 개혁작업이었다. 고종황제는 당시 첨단 기술인 전등사업으로 나라의 긍지를 높이고자 했다.  실제로 건청궁의 전깃불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앞섰다. 동양에선 처음 전깃불을 사용했다.

고종황제는 에디슨에 전기사업 독접권을 줬고 전기 기술자의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에 온 미국인 기술자에게 급료를 지급한다는 고종황제의 전교이다. 왼쪽에 서력으로 쓰여진 날자에서 고종의 개방개혁 의지가 엿보인다. 사진(전시품 촬영)=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고종황제는 에디슨에 전기사업 독접권을 줬고 전기 기술자의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에 온 미국인 기술자에게 급료를 지급한다는 고종황제의 전교이다. 왼쪽에 서력으로 쓰여진 날자에서 고종의 개방개혁 의지가 엿보인다. 사진(전시품 촬영)=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1879년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전구를 발명하고 불과 8년 만의 일이다. 조선은 미국과의 수교 이듬해인 1883년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보빙사 ((報麝使·사절단 )를 미국으로 보냈고 그 곳에서 민영익을 전권공사(대표단장)로 한 사절단은 발전된 서양 문명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특히 그들은 밤에도 밝게 빛나는 전등에 놀라움을 표하고 현지에서 에디슨이 운영하는 전등회사를 직접 견학했다.

조선에 돌아와 고종황제에게 이를 보고하자 고종황제는 주저함이 없이 에디슨 전등회사에 전기등 설비를 요청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전기도입에 나섰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고종은 혁신과 개혁에 팔을 걷었다. 대한제국은 일본보다 앞서서 1887년 전깃불을 켰고  1899년 중앙은행(대한천일은행)을 설치했다.  일본보다 한 발 앞서 1899년에 수도 서울에 전차를 놓았다

에디슨은 조선의 전등사업에 큰 관심을 표했다. 조선을 기반으로 아시아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넓힐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뉴욕주재 조선명예종영사인 프레이저를 통해 전기사업의 독점을 조선황실에 요구 했다.
에디슨은 조선의 전등사업에 큰 관심을 표했다. 조선을 기반으로 아시아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넓힐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뉴욕주재 조선명예종영사인 프레이저를 통해 전기사업의 독점을 조선황실에 요구 했다.

1896년엔 전화를 놓아 일본을 감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때 뿌려진 씨가 오늘날 우리나라가 휴대전화 생산과 통신분야의 세계강국으로 올라서는 토대가 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에디슨이 파견한 미국인 전기기술자가 에디슨에게 '경복궁의 전기설비는 동양에서 가장 훌륭하다
에디슨이 파견한 미국인 전기기술자가 에디슨에게 '경복궁의 전기설비는 동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보냈다.

  발명왕 에디슨도 조선에서의 전등사업이 아시아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넓힐수 있는 기회를 여겨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선과 전등시설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고 기술자 업튼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 업튼이 에디슨에게 보낸 보고서의 일부 내용이  한전아트센터 3층에 있는 전기박물관(서울 서초구 효령로 72길)에 전시돼 있다.

  업튼은 이 보고서에서 “경복궁안의 전등시설이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설비”라고 보고했다. 또 뉴욕주재 조선명예총영사인 프래이저가 조선에 푸트공사에게 에디슨이 조선에서 전등전화서업을 독점랄수 있도록 요청한 전문도 바로 옆에 보인다.

그만큼 에디슨도 조선 전등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특히 고종황제가 미국 전기 설비업자에게 급료를 지급한다는 전교(傳敎)가 전시돼 있다. 이 전교에는 날자표시를 음력이 아닌 서력(西曆)으로 쓰여져 있어 고종황제의 자주적 개혁의 면모가 엿보인다. 고종황제는 내친김에 황실이 단독으로 출자한 황실기업인 한성전기를 세워 전기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뉴욕주재 조선명예총영사인 프레이저는 조선주재 대사관에 에디슨이 독점적으로 조선에서 전기사업을 할수 있도록 외교노력을 하라며 보낸 전문.
뉴욕주재 조선명예총영사인 프레이저는 조선주재 대사관에 에디슨이 독점적으로 조선에서 전기사업을 할수 있도록 외교노력을 하라며 보낸 전문.

 이를 국민계몽과 민생의 복지사업으로 여겼다. 1898년 1월 26일에 설립된 한성전기는 서울 시내의 전차와 전등은 물론 전화사업을 펼쳤다. 근대경영에 낯설었던 횡실은 미국인 콜브란(Collbran)에게 경영을 맡겼다. 요즘말로 말하면 공기업인 종합전기통신업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어 2월1일에는 서울 남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홍릉에 이르는 전기 철도(전차) 건설에 착수했다.

 이어 10월 17일부터 서대문~홍릉간 6마일(약 10km)의 단선궤도 부설과 가설 공사를 시작해 두 달 10일만인 12월 25일에 준공했다. 이를 위해 전기를 공급할 동대문발전소를 12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겨울기간 동안 완성하였다.

한성(서울)시내에 전자를 놓기위해 전력을 공급할 동대문 발전소를 세웠다. 사진은 당시 발전소의 모형도.
한성(서울)시내에 전자를 놓기위해 전력을 공급할 동대문 발전소를 세웠다. 사진은 당시 발전소의 모형도.

한성전기는 또 1901년 6월 17일 덕수궁에 전기를 공급한 데 이어 그해 6월말 서울 진고개에 있던 일본인 상가 600 가구에 상업전기를 공급해 서울 한복판의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그런데 한성전기의 경영에 빨간불이 켜졌다. 경영을 위탁받은 콜브란은 근대식 기업경영 경험이 일천한 황실를 많이 속여 회사의 재무상태가 나빠진 것이다. 급기야 황실이 자체 회계감사를 통해 그의 비리를 지적하자 미국공사 알렌까지 나서서 콜브란의 재산권을 보호해야한다며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서울시민들은 '전차 안타기 운동 을 벌이는 등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1904년 1월 5일에는 미국 해병대까지 동원돼  한성전기의 외곽경비를 하면서 황실에 압력을 가했다. 이 무렵 러일전쟁(1904)이 일어나는 등 국제정세가 요동을 치자 고종황제는 75만엔을 더 내놓아 콜브란과 합자회사인 한미전기를 설립해 분쟁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콜브란은 다시 조선을 배신한다. 일본의 조선침략 행보가 빨라지자 상황이 불리해진 것을 깨달은 그는 한미전기의 경영권을 내놓았고 이를 일한가스회사가 1909년 6월에 인수했다. 결국 고종황제는 투자한 돈을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

고종이 출자해 설립한 황실기업 한성전기는 일본인이 주로 거처하는 한성의 진고개에 전기를 공급하는 상업용 전기사업을 펼쳤다. 사진은 당시 진고개 거리를 환화게 비추는 가게의 전기불의 모습.
고종이 출자해 설립한 황실기업 한성전기는 일본인이 주로 거처하는 한성의 진고개에 전기를 공급하는 상업용 전기사업을 펼쳤다. 사진은 당시 진고개 거리를 환화게 비추는 가게의 전기불의 모습.

이후 중소규모의 전기회사가 우후죽순처럼 전국에 걸쳐 생겨난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일본인에 의해 개항지인 부산, 인천 등에 전기회사가 차례로 세워졌다. 이어 대도시권과 중요 소도시에도 전기회사가 줄이어 설립돼 1930년대 초에는 80여 개의 전기회사가 난립할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자본에 의해 의해 세워진 전기업체가 있었으니 바로 개성전기다. 1917년 1월에 지역주민과 김심호(僉心浩)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일치 단결하여 경영을 잘했다. 전기요금도 가장 싼 모범전기회사로서 칭송이 자자했다. 전기사업이 전국에 걸쳐 붐을 이루면서 규모의 면에서도 전기사업은 일대 도약을 한다. 1929년 12월 일본인 기업가 노구찌(野口蓮)는 북한지역의 부전강에 총 22만3천Kw의 대규모 수력발전소를 건설한데 이어 발전설비용량 60만kw규모의 수풍수력(水豊水力)이 세워졌다. 수풍발전소는 콘크리트댐으로 축조되고 동양 최초의 220KV급 초고압 송선설비를 갖춰 당시 세계 전력 법계를 놀라게 했다.

남쪽지역에도 대규모 발전소가 건립된다. 영월화력발전소는 강수량이 적은 갈수기에 수력발전의 공백을 메워줄 보조용 발전소로 건설됐다. 설비용량 10만7,000kW로 건설된 남한 최대의 발전소로 1937년 10월 1호기(7|000kW)준공에 이어 1938년 1월에 2호기(2만5,000k별)가 설치됐다. 그러나 시운전중 진동이 발생하는 문제점이 드러났고 영월탄전의 탄질이 나빠 정상적인 가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한성전기의 사옥 모습. 조선황실은 미국인 콜브란에게 경영을 위탁했으나 그의 경영비리가 발견돼 경영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난다. 이 때 미국 해병대가 동원돼 한성사옥의 경비를 서며 조선황실을 압박한다.
한성전기의 사옥 모습. 조선황실은 미국인 콜브란에게 경영을 위탁했으나 그의 경영비리가 발견돼 경영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난다. 이 때 미국 해병대가 동원돼 한성사옥의 경비를 서며 조선황실을 압박한다.

1930대에 들어서면서 난립한 전기회사간 통폐합 작업이 이뤄진다. 전기요금이 제각기 다르고 전기사업이란 공익성이 훼손되는 경영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는 '전기사업령|을 발동하여 80여 개의 전기회사를 ▲경성전기▲남선전기▲서선전기(西鮮電氣)▲북선전기(北鮮電氣)등 4개로 통합시켰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자 남북이 분단되자 남한에는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의 세 전기회사가 남았고 미국 군정청은 일본 경영자들로부터 경영권을 회수했다.

이때 한반도 전체 발전시설의 약 88%가 북한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남한은 북한에서 전력을 받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얼마 후 북한은 전기요금을 물자로 갚도록 요구했다. 남한은 1차분을 인도하고 2차분을 준비하던 중에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북한은 남한 송전을 중단해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얼마후 6.25전쟁이 일어나 우리 나라 전력시설이 60%가량이 파과되고 말았다. 급한대로 전력를 생산하는 배인 발전함을 미국에서 긴급 도입했다. 이 배는 부산, 인천 등 큰 항구에 정박해 중요기관과 시설 등에 전력을 공급했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전아트센터 3층에는 전기박물관이 있다. 2001년 개관한 이 박물관의 전시 안내인은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전아트센터 3층에는 전기박물관이 있다. 2001년 개관한 이 박물관의 전시 안내인은 "전시공간을 리모델링하는 방안을 주진중"이리고 말했다.

5.16군사혁명으로 들어선 새 정부는 주요 전기업체 3사를 묶어 1961년 7월 1일자로 한국전력을 발족시켰다. 한국전력은 이후 전력개발 장기계획을 수립했다.규모가 커진만큼 회사의 신용으로 외국차관을 들여 올 수 있게되어 대규모 발전소 건설자본을 갖추게됐다.

마침내 1964년 4월 1일을 기해 해방 후 19년만에 우리 나라는 전력 기근에서 벗어났다. 무제한 송전시대가 열렸다. 이어 1968년 10월 31일에는 최대전력이 100만kw대를 돌파함으로써 경제개발의 초석을 다지는데 이바지하는 산업이 됐다. 특히 1979년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전국의 도서 벽지까지 전기를 공급했고 이 때 전기보급률은 98%에 달했다. 단군이래 마을을 지키던 호롱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한전은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자력 건설을 강력히 추진했다. 마침내 1978년 4월 고리1호기 58만7천kw를 준공해 "제3의 불" 원자력시대를 열었다. 고종이 전기불을 들여온지 꼭 91년만에 우리나라는 전력선진국의 토대를 쌓아 에너지 자립시대를 열었다. 또 한국전력공사는 1982년 1월 1일 특별법인으로 등록해 재무구조 개선의 기틀을 마련한데 이어 1989년 국민주 2호로 기업을 공개했다. 2005년 변전설비용량 2억KWA의 시설을 갖춘 세계적 전력회사로 발돋움했다. 2016년 [포브스 글로벌 200]에서 글로벌 유틸리티 분야 세계 1위기업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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