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1 20:27 (화)
◇영화속 경제사(4)'블랙먼데이' 2편비교㊦국제공조의 힘
◇영화속 경제사(4)'블랙먼데이' 2편비교㊦국제공조의 힘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11.20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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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주가대폭락에 미국과 일본등 주요국 중앙은행 신속대처
플라자 합의 이후 '弱달러'가 힘 못쓰자 흉흉한 소문이 증시 강타
역할 다른 '두 악당' 내세운 '월스트리트'영화는 권선징악의 결말

영화 <월스트리트>의 엔딩을 보면 이 영화가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내러티브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주인공인 두 악당이 등장한다. ‘나쁜 악당 게코’와 ‘착한 악당 버디’다. 처음에는 의기투합해 일을 하다 의견 충돌이 생기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갈림길에는 중소 항공사 블루스타가 있었다. 둘은, 이 회사를 인수하자는 데까지는 의견이 같았다. 하지만 인수 뒤 계획이 달랐던 게 문제. 아버지가 회사 노조위원장이었던 버디는 회사 인수 후 직접 경영을 통해 성공적인 경영자로 거듭나려 했던 반면 돈에 혈안이 됐던 게코는 인수 뒤 ‘회사 쪼개 팔기’로 ‘현찰’을 쥘 속셈이었다.

게코에게 중요한 것은 단연 ‘돈’이었다. 경영진이고 근로자고 노조고 보이는 게 없었다. 회사의 번영 따위는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처음부터 회사를 인수할 때까지만 버디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버디는 분노했다. 결국 게코의 적(敵)과 손잡고 그의 계획을 무산시킨다. 그럼으로써 회사도 살리고 근로자와 노조도 살린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주가조작’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결국 감옥행이다. 그러나 가벼운 처벌로 끝난다. 더 중요한 범죄자를 밀고하면서 형량을 낮추는 ‘플리 바게닝(Plea Bargaining)’을 통해서다. 그는 게코를 밀고하고 증거까지 잡아 경찰에 도움을 준다. 나쁜 짓 하던 두 악당 모두 감옥에 갔지만 ‘착안 악당’ 버디는 ‘나쁜 악당’ 게코에 비해 약한 처벌을 받는다. 게다가 회사도 살고 노조도 산다. 이 정도면 권선징악의 형식을 골고루 갖춘 셈이다.

게코와 버디가 벌였던, 이 같은 공격적 M&A와 기업 쪼개팔기 등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생각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서 얘기했듯, 금융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실물경제에 대한 보조적인 것이었다. 감히 대놓고 기업의 존폐를 위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금융의 자본주의 궤도 이탈’이었다는 점도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이 같은 ‘이탈’ 현상은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예시한 기업사냥꾼 외에 외환시장 및 선물시장의 과도한 자기 확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1987년 위기 발생의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환경을 제공한 것’일 뿐이었다. 1987년 주식시장의 붕괴와 관련된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 1980년대 들어 미국 증시는 활황이었다. 1982년 다우존스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은 뒤 단 한 번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85년에는 1500포인트를 기록했고 1987년 초에는 2000포인트를 넘어섰다. 주가는 계속 올라 1987년 7월에는 2500포인트를 넘은 적도 있었다. 이 같은 활황세는 분명 레이건 정부와 FRB의 정책 덕이었다. 레이건 정부의 금융시장에 대한 통제 완화와 세금 인하, 그리고 1982년 FRB의 금리 인하. 이들은 국내외 큰돈이 미국 증시를 찾는데 결정적 계기로 작동했다.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주가조작혐의로 사무실에서 체포되는 보디 폭스(위)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주가조작, 자금세탁, 마약 등 다수의 혐의로 감옥행 버스를 탄 조던 벨포트(아래). 영화에서 이들 모두는 플리 바게닝으로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동료를 밀고하고 형(刑)을 경감받았다.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주가조작혐의로 사무실에서 체포되는 보디 폭스(위)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주가조작, 자금세탁, 마약 등 다수의 혐의로 감옥행 버스를 탄 조던 벨포트(아래). 영화에서 이들 모두는 플리 바게닝으로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동료를 밀고하고 형(刑)을 경감받았다.

그러나 1987년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미국 곳곳에서 “대공황이 올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증시 호황에도 경기가 ‘끝물’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던 터에 2년 전 있었던 ‘플라자합의’에도 미국 경제의 어려움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탓이다. 플라자합의로 달러 약세라는 ‘수단’은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목표’였던 무역적자는 오히려 더 심화됐던 것이다. 게다가 감세정책이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이론도 좀처럼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플라자합의 이후 추진되던 약(弱)달러 정책이 훼손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화의 강세로 어려움을 겪던 독일이 플라자합의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급했다. 1987년 2월 22일 다시 선진 6개국(G6) 재무장관을 소집했던 것도 조급함의 결과였다. 장소는 프랑스 루부르궁. 이곳에서 미국은 “달러 값을 현 상태에서 유지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루브르 협약’으로 불렸던 이 합의는 분명 1985년 성공적으로 치룬 플라자 합의를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실질적인 협력을 받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달러 약세 기조 유지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엔화 강세에 눌린 미국이었다. 그럼에도 달러 값 안정을 위해 독일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독일에 보기 좋게 걷어차인 미국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선진국간의 불화, 미국의 경기 하락 조짐은 증권가에 대불황의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87년 주가 폭락의 원인은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금융계의 전반적인 환경 변화와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 그리고 국가 간 공조 실패 등의 결과였다. 지난 글 ㊤과 ㊥편에서 우리는 위기의 원인과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봤다. 이제 그 결과를 알아볼 차례다. ‘결과’에 대한 초점은 하나로 모여진다. 왜 1987년 위기 때 세계경제는 1930년대처럼 파국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여기에 경제위기가 갖는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쇄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위기를 맞은 뒤 미국 정부의 대응을 보자. 미국은 위기 발생국이었다. 언제 어떻게 이 위기에 대응하느냐가 위기의 심화와 파급을 막아주는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부 입장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투자자와 국민 전반의 불안한 심리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위기 상황에서의 불안 심리는 자칫 새로운 위기를 촉발시키는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한 푼이라도 손해를 덜 보겠다는 ‘주식투매’와 돈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뱅크 러닝(Bank Running)’은 위기를 속수무책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경제는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심하면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진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1987년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블랙 먼데이 관련 기사.
1987년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블랙 먼데이 관련 기사.

1987년 위기 당시 미국 정부의 노력은 상을 줄만 하다. 권력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과 경제 경제책임자인 재무장관의 솔선수범이 눈에 띈다. 미국 재무부는 사실 블랙 먼데이 발생 전주부터 불안의 징조를 느끼고 있었다. 이글 ㊤편에서 설명했듯 그 이전 한 주 내내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금요일 주가는 무려 108.36포인트 하락했다. 당연히 투자자는 물론 국민 전반적으로 위기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이날, 금요일, 베이커 재무장관이 직접 TV에 출현해 국민을 안심시켰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당일 주가폭락은 가벼이 볼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예견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가가 너무 올랐다는 사실을 전문가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황해 하거나 동요될 필요가 없음을 설파했다.

그는 발표 뒤 바로 유럽으로 날아갔다. 애초 있었던 일정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미국 증시가 대폭락했다.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터졌던 것이다. 이날 주가폭락으로 백악관도 재빠른 대응을 보였다. 월요일 뉴욕 증시 폐막 후 피츠워터 백악관 대변인은 “레이건 대통령이 주가 폭락 사태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고 전하고 “그러나 미국 경제는 견실하며 따라서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국민을 진정시켰다. 베이커 장관도 급거 귀국을 서둘렀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경제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FRB도 위기 차단의 중요한 방파제 구실을 했다. FRB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의장의 행동을 보자. 1987년 8월 11일 취임했으니 취임 후 꼭 두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초짜’이니 실수도 우려됐을 법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날 그는 하루 종일 주요 금융계 인사들과 통화하며 의견을 수렴하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일부 인사는 “며칠 더 상황을 파악하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그는 당장의 일이 시급하다며 그에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했다. FRB 부의장 맨리 존슨(Manly Johnson)은 뉴욕증권거래소를 폐쇄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그린스펀은 이 역시 묵살했다. 투자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거래소를 다시 살리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시장에 구두개입을 시작했다. 그는 다음날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FRB는 국가의 중앙은행으로서 빈틈없이 책임을 수행할 생각”이라며 “경제와 금융체제를 위한 유동성 지원에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여차하면 돈을 풀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는 자서전에서 “시장이 계속해서 제 기능을 발휘해 주기만 한다면 현금으로 기업들을 지탱해 줄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은 애초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결국 그는 대량의 국채를 매입해 시장에 120억 달러라는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한편 기준금리를 0.75%포인트나 내려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해소했다.

2013년 12월 ‘올해의 최고 투자가’로 꼽혀『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칼 아이(CahlC.Icahn).하지만 1980년대 그는 악명을 떨쳤던  기업사냥꾼이었다.
2013년 12월 ‘올해의 최고 투자가’로 꼽혀『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칼 아이(CahlC.Icahn).하지만 1980년대 그는 악명을 떨쳤던 기업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위기의 원인과 전개, 그리고 극복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동력(動力)을 봐야 한다. 바로 ‘국가 간 공조’다. 이것이야말로 경제 안정의 지름길이요, 그 반대인 국가 간 갈등은 위기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2019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중국과의 갈등이 세계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국제 간 공조는 위기의 전개 및 극복과정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1987년 위기 당시에는 바로 이 부분에 높은 점수를 줄만 하다.

일단 위기의 전개 과정을 보자. 사실 주가만큼 전염성이 강한 병도 드물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감기가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1987년 경제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뉴욕증시의 폭락은 곧장 일본과 영국에도 파급됐다. 도쿄에서는 20일 오전 장에서만 닛케이 다우존스가 무려 1873포인트 떨어졌고 런던에서는 하루 사이 12%가 떨어졌다. 주요 나라 주가는 모두 폭락 상태. 파리는 9.7%, 시드니는 25%, 싱가포르는 20% 하락했다. 어느 나라든 ‘최악’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누구나 1929년 대공황의 악몽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세계경제는 곧장 ‘패닉’으로 줄달음칠 듯 보였다. 단 시일 안에 이 불안과 공포를 잠재울 수 없다면 우려 속 ‘대공황’은 현실로 드러날 것이 뻔했다. 특히 1929년 증시 폭락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은행에 찾아가 예금을 인출하려 했던 ‘뱅크 러닝’의 재현이 두려웠다. 미국은 물론 영국이나 일본 등 주요 나라들은 30년대 대공황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위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불안 심리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이 대목에서 각국 정부의 대응은 박수를 받을 만 했다. 일단 일본을 보자. 수상인 나카소네가 직접 나섰다. 그는 “이번 주가 폭락은 1929년과는 결코 다르다”는 요지로 긴급 성명을 발표했고 미야자와 대장상은 즉각 각종 주가부양책을 내놓았다. 영국의 로손 재무장관도 특별성명을 통해 투자가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영국 경제의 성장률이나 국제수지 동향을 봤을 때 모든 면에서 견실하다”며 “그러니 불안한 미국 경제에서 파급된 월스트리트의 혼란에 전혀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다. 다른 나라들도 위기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독일은 금리 인상 결정을 5일 만인 20일 전면 백지화시켰고 거의 동시에 그린스펀 의장도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7.5%였던 재할인율은 6.75%로 낮아졌다.

이처럼 1987년 주가폭락과 그로 인한 경제위기는 극히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을 맺었다. 1987년 내내 블랙 먼데이의 유령이 따라다녔지만 또 다른 위기나 폭락은 경험하지 않았다. 두 달 후 연말 폐장 시 주가지수는 1938.83포인트. 10월 19일보다 200포인트, 전 해 말에 비하면 40포인트가 오른 수치였다. 이로써 많은 전문가들은 1987년의 주가폭락을 ‘위기’가 아닌 ‘해프닝’으로 간주하려는 경행이 있다. 투자자들의 일시적 불안 심리에 따른 주가 폭락이었으며 수 일 내로 극복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각국 정부 및 중앙은행의 신속하고 올바른 대응, 그리고 주요 나라 간 성공적인 공조가 위기의 심화와 확산을 막았다는 데 동의한다. 1987년 주가폭락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우리가 본 두 편의 영화도 ‘해피엔딩’이다. 영화 <월스트리트>는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내러티브를 갖는다고 했다. 큰 악당은 큰 벌을 받고 작은 악당은 작은 벌을 받았다. 선한 회사와 노동자는 해체되지도 쪼개지지도 팔리지도 않았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도 마찬가지다. 주가조작에 사기에 돈세탁에 마약에 불법 매춘을 일삼던 악당 조던 벨포트 역시 큰 벌을 받았다. 감옥에 가고 이혼 당했다. 그 역시 플리 바게닝 제안을 받아들였고 함께 불법을 자행했던 지인과 동료, 회사 직원을 몽땅 팔아먹었다. 그 결과 그는 형량이 36개월로 감면됐고 나쁜 짓 했던 악당들 대부분이 감옥행이었다.

영화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실제 월스트리트에서도, 모두는 아니겠지만, 많은 악당이 망했다. 영화 <월스트리트>에 자극을 줬을 법한 사건 하나를 예로 살펴보자. 1986년 11월 월스트리트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른바 ‘금융계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5년 5월 미국의 대형 증권회사 메릴린치 사에 날아든 익명의 제보 편지 한 장에서 시작된다. “기업 브로커 두 명이 기업 인수 정보를 빼내 비밀리에 주식을 사 들인다”는 내용이었다. 조사에 착수한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제보가 사실임을 확인했고 브로커 두 명을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 뒤에 월스트리트의 거물 아이반 보스키(Ivan Boesky)가 있었기 때문이다. SEC는 보스키에게 무려 1억 달러의 벌금을 요구했고 수세에 몰린 그는 이후 3개월간 동료나 부하 직원들의 비밀 전화를 녹음해 연방법원에 넘겨줬다. SEC는 이 같은 ‘충성’의 대가로 보스키에게 단지 ‘5년짜리 최고형 하나’하는 선물을 줬다. 최고형 4개, 도합 20년을 형무소에서 살아야 했던 브로커에 비하면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그런데 사건은 거기서 종결되지 않았다. 보스키의 제보에서 금융계 거물들이 줄줄이 걸려들었던 것이다. 칼 아이컨(Cahl C. Icahn)은 당시 미국의 거대 항공사인 트랜스월드 에어라인스(TWA)를 인수해 실제 경영을 담당했고 80억 달러를 동원해 USX(과거 US 스틸)의 인수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거물 중 거물. 보스키는 1985년 아이건과 함께 걸프 앤드 웨스턴 인더스트리의 주가를 조작했다고 실토한데 이어 당시 드렉셀 번햄 램버트의 경영자 마틴 시겔이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했으며 그 대가로 70만 달러를 줬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이어 시겔은 또 자신에게 정보를 팔았던 금융인들을 불었다. 투자회사 키더 피바디의 전(前) 부사장이었던 티머티 테이버와 당시 부사장이었던 리처드 워그턴, 그리고 골드만 삭스의 중역 로버트 프리먼 등이 줄줄이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이 중 티머티 테이버나 마틴 시겔은 각각 33세와 38세 등 모두 30대여서 스톤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법하다.

지난 30여 년간 월스트리트의 변모를 보면 일단 ‘선이 승리한다’는 해석이 옳았던 것처럼 보인다.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부도덕성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거대 자본은 기업 대신 새로운 먹이를 찾아 다녔고 결국 국제 환 투기꾼으로 모습을 바꿨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 국제 외환시장을 점령하며 한 나라의 국가경제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부도덕성이 늘 새로운 형태로 모습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 기회에 우리는 월스트리트가 일반 기업을 넘어 한 나라, 그것도 영국이라는 선진 강대국을 넘어뜨렸던 대사건을 보며 월스트리트의 진면목을 알게 될 것이다.<4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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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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