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업 '77년'의 종근당이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회사 사료(史料)가 하나 있다. 바로 1956년 특허국으로 받은 상표등록증이다.
그런데 이 상표등록증에 나와 있는 마크를 보면 창업 초기 회사 심벌이 '종'(鍾·현재마크)이 아니었다. 스위스 국기나 적십자 심벌과 비슷한 모양의 마크다. 회사 이름이 궁본약방(41년)에서 종근당약방(46년)으로 또 55년엔 '종근당제약사'로 바뀌었지만 회사심벌은 아직 종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고 이종근 회장이 1941년 창업한 후 최소 약 20년 가까이 종 마크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모로 선정된 지금의 종 마크는 1969년 사명을 ㈜종근당으로 개칭한 뒤 본격적으로 사용됐다.종근당의 사명 변천사도 눈길을 끈다. 이종근 회장은 일본 강점기 때 '궁본(宮本) 약방'을 창업했는데 '궁본'은 당시 일부 이(李)씨들이 일본식으로 개명한 성씨였다. 즉 궁본약봉은 이씨약방이었던 것이다.여기서 궁본(미야모토)이라는 뜻은 '궁(palace)의 뿌리'라는 의미여서 조선을 창업한 전주 이씨 집안을 가리킨다.
또 종근당은 이 회장 형제의 돌림자가 쇠 북 종자여서 그렇게 지어졌다는 설도 있고 이 회장이 종의 청아한 소리와 새벽 아침을 깨우는 종의 이미지를 좋아해 그렇게 작명했다는 해석도 있다.
여하간 이종근 회장의 '종 사랑'은 각별했다. 평생 이어졌다. 신약연구와 세계제약 시장 판도를 가늠하기 위해 해외에 갈 때마다 이 회장은 꼭 종 모양의 각종 외국 제품을 수집해 들여왔다. 6백50여점이 이 회장의 호를 딴 고촌(高村)기념관에 전시돼있다. 김호산 종근당고촌재단 팀장은 "값이 나가거나 문화재급으로 분류될 만한 종은 없지만 모두 이 회장의 손때가 묻은 것이어서 종근당은 사보(社寶)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근 회장은 1993년 대전 세계Expo를 기념해 신라 성덕대왕 때 만든 신종(일명 에밀레종)을 모델로 삼아 제작한 '엑스포대종'을 정부에 기증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 종의 제막식을 6개월 앞두고 서거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다. 엑스포 대종의 10분의 1 크기 모형은 종근당 사옥에 전시돼 있다.
충남 당진의 빈농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한학 수학에 이어 보통학교 졸업후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철공소 견습공-정미소 쌀 배달부-약품외판원 등으로 기회가 닿은 일자리를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 약품 외판원을 하면서 열악한 국내 의료보건 현장을 뼈저리게 느껴 약관 22세 나이에 약방간판을 내걸었다. 거의 빈손 창업에 가까웠다. 41년 마포구 아현동 282-4번지에 둥지를 틀었다. 말이 약방이지 4평 크기에 불과해 상비약 몇 가지를 놓고 팔던 상점수준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실한 태도로 신망을 얻기시작해 약방사업이 번창했고 특히 1948년 자신의 약 가게에서 팔던 활명수가 가짜라는 사실에 놀라 직접 약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1961년엔 97일 동안 세계 16개국의 선진 제약업체를 방문해 항생제의 생산의 꿈을 키웠다. 이후 4년만인 1965년에 국내 처음으로 항생제 합성에 성공했다. 당시 그가 해외 출장 현장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손글씨로 정리한 메모와 출장 스케줄이 고촌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이어 1980년에 결핵치료제를 세계 4번째로 독자 개발해 신약의 수출길을 열었다.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 이종근 회장의 책상위에는 손글씨로 만들어진 '결핵약품 매출동향 보고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의약품 원료의 독자생산에 생애를 걸었던 이 회장은 1993년 2월 서거했다. 그는 평소에도 "의약 원료를 못 만드는 회사는 제약사가 아니다"라며 연구진에게 의약품 원료의 국산화를 독려했다. 종근당과 계열사의 의약품 매출은 4000억원 규모이다. 이중 절반 이상은 수출에서 벌어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