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법사를 서천까지 호위한 공적으로 마침내 석가여래에 의해 '투전승불'에 올라
#세월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신(神)은 세월을 모른다. 아니, 세월이 없다. 오고 감이 없는 불멸(不滅)인데 그따위 거추장스런 게 있을 턱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들은? 그네들은 세월을 겪고 그 흔적을 기록하되 느끼지 못 한다. 그렇다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아니다. 그저 생겨먹은 게 그럴 뿐이다. 신도 아닌 것이, 풀ㆍ짐승도 아닌 것이, 우리 인간만이 세월에 울고 웃는다. 문득 나이를 생각하는 나이가 되면 동시에 허무(虛無)가 찾아온다. 인생이 짧은 게 덧없고 서럽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도 등장하는 한탄이다. '슬프도다, 내 인생이 이리도 잠깐이라니(哀吾生之須臾)!' 한탄이 깊으면 원망이 생기고, 원망을 오래 끌면 망상(妄想)이 환상이 된다.
#세월의 허무를 탓하고 탓하다 못해 그 흐름에 거슬러 인간의 '총체적 욕심'이 만들어낸 캐릭터가 바로 《서유기(西遊記)》의 영웅 손오공(孫悟空)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고픈데 하지 못하는 걸 손오공을 통해 다 드러내고 실토하는 셈이다.
우선, 손오공은 죽지 않는 '불사신(不死身)'의 존재다. 미후왕(獼猴王)시절 수명이 다 돼서 저승에 가야 했을 때 자길 잡으러 온 저승사자들을 여의봉으로 때려눕힌 뒤 그대로 저승으로 날아가 난동을 부리고는, 염라대왕을 협박해 생사부(生死簿)에서 자신과 원숭이 요괴들, 그리고 요괴 의형제들의 이름과 수명을 지워 절대로 죽지 않는 몸이 됐다. 뿐만 아니라 이때 이름이 지워져버렸기에 저주(咀呪)조차도 안 통하게 됐다. 그는 또 천계(天界)에서 일할 때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는 복숭아 '반도(蟠桃)' 가운데 9000년 만에 익는 것들만 모조리 먹어 치운 것도 모자라 연회를 위해 준비한 온갖 산해진미는 물론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선단(仙丹)까지 훔쳐 먹어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 이르렀다. 덕분에 옥황상제의 조카 이랑진군(二郞眞君)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때도 평범한 창칼은 물론 신조차도 벨 수 있다는 옥추통검(玉樞統劍) 같은 보검, 심지어는 번개를 맞고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손오공은 힘도 장사여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項羽)조차 그에 비하면 태평양에 빠진 좁쌀보다도 못할 정도다. 그는 수미산(須彌山)과 아미산(峨眉山)을 가볍게 두 어깨로 받치고 뛰어다닐 완력의 소유자였다. 참고로 인도신화에 따르면 수미산은 바다 밑으로 8만 유순(由旬)*, 바다 위로 8만 유순으로 1유순이 대략 7~15km임을 고려한다면 총 높이가 112만 ~ 240만 km**에 달한다.
손오공의 또 다른 초인적 특장(特長)은 자신이 원하면 생물과 무생물 가릴 것 없이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둔갑시키거나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는 둔갑술이다. 스승 수보리조사(須菩提祖師)한테서 배운 72가지 둔갑술(遁甲術) 덕분인데, 맘만 먹으면 하늘 끝까지 닿는 크기의 거인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몸의 털을 뽑아 자신과 똑같은 분신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상대를 멈추게 하는 정신법(定身法)이나 불과 물속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돌풍을 일으키는 등 다채로운 도술을 구사할 수 있다. 특히 서천(西天)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아예 태양과 달의 운행을 멈출 정도로 어마어마한 도력을 지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손오공하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근두운(筋斗雲)과 마음대로 늘이고 줄일 수 있는 여의봉(如意棒)이 아닐까.
서유기 원전엔 손오공이 스승 수보리조사 앞에서 깝치는 장면이 나온다. 오공이 제 실력을 보여준답시고 공중제비를 몇 바퀴 돈 다음 대 여섯 장(丈ㆍ한 자의 열 배로 약 3m)을 튀어올라 구름을 잡아타고 한 식경(食頃)쯤 날아다니다 돌아와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쭐거렸다. 이를 지켜본 수보리조사가 "이놈아 고작 그 걸 하고 구름을 탄다고 뻥 쳤냐?"며 혀를 끌끌 차고는 "무릇 신선들이라 하면 땅바닥을 한 발로 툭 차고 가볍게 구름에 오르거늘 네 놈은 공중제비를 몇 번이나 하고서야 겨우 오르지 않았더냐!"고 질타했다. 그런 다음 제대로 된 '한 수'를 전수했으니 이게 바로 손오공의 특허 교통수단인 '근두운'이다. 그런데 근두운은 우리가 잘 아는 배트맨의 '배트카(Batmobile)'나 쾌걸(快傑) 조로(Zoro)의 '토르나도(Tornado)'처럼 부르는 즉시 나타나는 구름이 아니다. 만화영화에서 "치키차카 치키쵸~"하며 나타나는 구름에 올라타는 장면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낯선 얘기일 테지만 근두운은 공중제비로 구름에 올라 단숨에 10만8000리(里)를 가는 기술이다. 한자로 공중제비를 '飜筋斗(번근두)'라고 하는데 '筋斗'는 '跟頭'로도 쓰니 '跟(발뒤꿈치 근)'와 '頭(머리 두)'의 위치가 바뀐 모습***, 즉 물구나무 선 자세이고, 이를 '뒤집(飜)'는 기술이란 뜻이다. 1리(里)가 4km로, 순식간에 43만2000km를 가는 셈이니 빛보다도 빠른 속도다. 번갯불이나 부싯돌에 튀는 '번쩍!'을 뜻하는 전광석화(電光石火)가 오히려 느려터질 지경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하니 손오공은 진짜 대단하지 않은가?!
여의봉 역시 무게는 약 13,500근(斤: 약 8.1t) 으로 매우 무거운데 부서지거나 흠이 나지 않고, 한 번의 충격으로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신물(神物)' 로 늘리거나 줄이는 등 크기·모양을 바꿀 수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아주 성능이 끝내주는 AI와 3D 프린터(3D Printer)가 결합된 형태로, 원하면 뭐든지 즉각 만들어내는 '환상 머신'의 서유기 버전이다.
한편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서천까지 무사히 호위한 공적으로 마침내 석가여래에 의해 '투전승불(鬪戰勝佛)'이 됐는데, 이로써 한낱 원숭이에서 부처님이 된 입지전적 존재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불교의 가르침(涅槃經)을 입증****했으니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인간을 포함한 중생의 궁극적 로망을 이뤘으니-.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里)인 대유순, 60리인 중유순, 40리인 소유순이 있다.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의 4배가 넘으며 태양의 지름(140만 km)보다 크다.
***우리말의 '곤두박질'이 여기에서 나왔다.
****孫悟空이란 이름 자체가 '空, 無, 虛를 깨달은 원숭이'란 뜻이다. 스승 수보리조사가 원숭이를 뜻하는 '猢猻(호손)'의 猻자에서 외모는 살리되 짐승스러움(犭)을 떼어버린 '孫'으로 성을 삼고, 제자들의 항렬인 '悟'를 돌림자로 해서 이름(法名)을 지어 준 것이다.
#허무한 세월이 하도 야속하고 허무한 나머지 대체만족을 위해 지어낸 캐릭터가 손오공이라면 그것으로도 부족해 아예 인간세상과는 다른 '신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도 뭐든지 할 수 있고 이뤄지는 그곳-, 우리는 그런 곳을 '이상향(理想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향은 천국과 같은 '신들의 세계'와는 다르다. 다분히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원리'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상향하면 멋진 세계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사실 이상향은 인간의 무모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표식이다. 꿈꾸는 건 자유이고 인간의 '본캐'가 아니던가.
꿈같은 세상을 탐하는 건 양(洋)의 동·서가 따로 없다.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비롯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제임스 힐턴(James Hilton)의 샹글릴라(Shangri-La)**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제나두(Xanadu)***, 장자(莊子)의 무하지향(無何有鄕)****,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武陵桃源)*****, 허균(許筠)의 율도국(栗島國)****** 등등.
*이상향을 다른 말로 '별천지(別天地)'라 한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의 구절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꽃 떨어져 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다른 하늘 다른 땅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에서 유래됐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숨겨진 낙원.
***콜리지가 쓴 미완성 시 '쿠불라 칸(Kubla Khan)'에 나오는 동양적 이상향. 원나라 쿠비라이 칸의 여름 궁전이 있던 상도(上都)가 대상.
****소요유(逍遙遊), 응제왕(應帝王), 지북유(知北遊) 등 여러 곳에 나오는 말로 '무위자연의 도가 행해질 때 도래하는, 생사가 없고 시비가 없으며 지식도, 마음도, 하는 것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이자 어디에도, 아무 것도 없는 이상향'이다.
*****위진남북조 때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곳으로 '적서의 차별이 없고 탐관오리가 없어 모든 백성이 행복해 하는 이상사회'로 그려져 있다.
#이상향은 분명히 '욕망 덩어리' 인간들이 인생무상의 처절한 절망 끝에 빚어낸 허구이다. 그런데 곰곰이 속살을 들여다보면 '완전 뻥'인줄만 알았던 그곳에 신기하게도 현대의 첨단 과학이 흐르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근대에 창작된 것보다 특히 옛날 버전에서 그렇다는 점이다. 우리 속담에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게 있다. 황해도(黃海道)평산읍(平山邑)에 있는 가맛골, 즉 부동(釜洞)이라는 마을에 옛날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고 전해지는 선암(仙巖)이란 너럭바위와 난가정(欄柯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곳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 속 깊이 들어갔다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가니 길이 점점 넓어지고 훤해지면서 눈앞에 두 백발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꾼은 무심코 서서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돌아갈 시간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세워 둔 도끼를 집으려 했는데 아뿔싸, 도끼자루가 바싹 썩어 있는 게 아닌가. 참말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마을로 내려왔는데 이번엔 더 기겁할 일이 눈앞에 펼쳐 있었다. 마을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한 노인을 만나 자기 이름을 말하자, 노인은 "그분은 저의 증조부 어른"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바둑 한 판 보는 사이에 인간 4대 1백여 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버린 것이다.
이 같은 얘기는 북한지역 강원도 내금강(內金剛) 사선대(四仙臺) ,전남 승주(昇州) 선암사(仙巖寺) 등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으며 전설로도 일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원형은 6세기경 간행된 『술이기(述異記)』에 나오는 진(秦)나라 왕질(王叱)의 설화(爛柯亭傳奇)이다. 나무꾼 왕질이 절강성(浙江省) 상류 구주(衢州)의 석실산(石室山)*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겪은 얘기로 평산 설화와 줄거리가 같다. 다만 왕질이 겪은 시차(時差)가 수백 년으로 더 길 뿐, 이곳에도 난가정이란 지명이 있다.
*지금은 설화의 유명세에 따라 '란커산(爛柯山)'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석교산(石橋山)이라고도 한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권3 탑상(塔像)편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에 대표적인 한국형 '환몽(幻夢)설화'가 나온다. 강원도 세달사(世達寺)*의 승려 조신(調信)이 주인공으로, 그가 명주(溟洲) 날리군(捺李郡)**에 있던 절 장원(莊園)의 관리를 위해 파견돼 일하던 중 그곳 태수 김흔(金昕)의 딸에게 깊이 매혹됐다. 그는 낙산사 관음보살을 찾아가 그녀와 결합하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관음보살 앞으로 가서 원망하며 울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서 갑자기 김 낭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환하게 웃으며 "일찍이 스님을 뵙고 마음에 품었으나 부모 명으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따랐으나, 이제는 스님과 한 무덤에 묻힐 인연이 되고자 왔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조신은 크게 기뻐하며 둘이 함께 고향으로 달아나 부부로 자녀 다섯을 두고 40여 년을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점점 재산을 다 잃고 극빈 상태로 전락해 가족이 10년 동안 구걸하며 떠돌아다니다 큰아들(15세)이 굶주림으로 죽어 길가에 묻는 가하면 작은 딸(10세)이 개에게 물려 울며 돌아오는 등 고초가 이어지자 절망한 나머지 부부는 헤어지기로 했다. 아내가 말했다. "예전의 기쁨이 지금 고난의 뿌리였습니다. 아름다움도, 사랑도 다 덧없어요.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 헤어져 서로 그리워하는 게 낫겠습니다. 인연은 사람 마음대로 안 되니, 이제 헤어집시다." 조신도 동의하고 아이를 둘씩 나눠 키우기로 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저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하는 당부를 끝으로 두 사람이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길을 떠나려는데 조신이 꿈에서 깨어났다. 쇠잔한 등불이 가물거리고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얗게 세어버렸다. 마치 50~60년을 살며 한평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듯 온몸에 피로와 무상함이 스며들어 세상사에 뜻이 사라지고 재물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또한 자기 앞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조신이 돌아가는 길에 꿈속에서 큰아이를 묻은 곳에 들러 땅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조신은 미륵상을 물에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세달사로 돌아와 소임을 내려놓은 뒤,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며 살았다.
*원문에는 '세규사(世逵寺)'로 돼 있는데 발굴 등을 통해 '逵'는 '達'의 오류로 밝혀졌다.
**지금의 낙산사(洛山寺)근처
#이상향에선 한 점 불편한 게 없고 오로지 즐겁고 행복할 뿐이다. 인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모아놨고 운영되는 게 이상향이고 그렇지 못하면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에선 인간세계보다 시간이 늦게 간다. 앞에서 보았듯이 행복할수록 도파민이 많이 나오고, 그러면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상향이란 일종의 '타임머신(Time Machine)'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바둑 한 판 보는데 인간세상에서의 수백 년*이 흘러간다. 왕질과 조신이 다 경험한 일이다. 아인슈타인(Einstein)의 '특수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에 따르면 속도 등 여러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미래로의 시간여행은 가능하다**는데 우리 조상님들은 진즉에 상상 속에서나마 이를 구현했다. 그렇다고 선조들께서 과거로 돌아가 자기의 조상들과 딱지를 치고, 구슬 따먹기를 하고, 술래잡기를 하는 법은 없다. 이 역시 첨단 현대물리학에서 과거로의 여행이 불가능한 논리로 드는 '할아버지의 역설(Grandfather Paradox)'***이란 인과율(因果律: Causality) 모순과도 부합한다. 뭐 동양에선 워낙 어르신을 모시는 '효(孝)' 분위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상향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순식간에 몇 백 년 앞으로 달려는 가도, '빠꾸(back)로' 가는 법은 없다. 이와 함께 무릉도원(武陵桃源) 등에서처럼 입구가 '좁은 동굴'을 지나야 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역시 현대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 여행을 가능케 하는 원리인 '웜홀(Wormhole)'****을 닮고 있지 않나. 아 ,이 얼마나 멋들어진 발상이며 '구라(口羅)'인가.
*평산 선암에서의 사건을 보면 나무꾼이 바둑 한판을 구경하는데 든 시간이 3시간 정도로 치면 4대 120년은 105만 여 시간이니 속세보다 35만 배나 빠른 속도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한 뒤 돌아온 셈이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흐르는데 이 때 생기는 '속도에 의한 시간 지연(Time Dilation)'으로 미래로의 편도 여행이 가능하다.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정지해 있는 물체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른다. 만약 우주선이 빛의 속도로 여행한 뒤 지구로 돌아온다면, 우주선 속의 시간은 짧게 흘렀지만 지구의 시간은 수십 년이 흘러 있을 것이다. 이는 '미래로의 편도 여행'에 해당하며 현대과학으로도 그 효과가 관측 입증되는 실제 현상이다. 하지만 현재 기술로는 빛의 속도를 내는 게 사실상 어려워 실제 미래 시간여행도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과거로 가 조상을 죽이면 자신이 태어날 수 없어 그 (살인)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시간여행의 논리적 모순'을 말하는 비유다.
****웜홀은 서로 다른 두 공간을 잇는 가상의 통로 개념이다. 벌레(Worm)가 사과에 파놓은 구멍을 통과하면 더 빠르게 반대편으로 갈 수 있다는 비유에서 나온 영지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Einstein-Rosen Bridge)'라고도 불린다.
#시간의 물리적 흐름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가 뇌의 인식을 새롭게 하여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극복할 수는 있다. 핵심은 새로운 정보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새로운 도전과 학습: 매년 새로운 취미, 외국어, 기술 등을 배우는 도전적인 활동은 뇌에 강력한 새로운 자극을 주어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고 시간을 느리게 느끼도록 만든다. 또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여행하거나 평소 가보지 않던 식당에서 새로운 메뉴를 시도하는 등의 작은 변화도 뇌에 신선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와 함께 이미 경험했던 일이라도 '오롯이 경험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순간의 감각과 감정에 충분히 머무르면 뇌는 그 기억을 더 생생하고 길게 기록한다고 한다. 이러한 신경계 건강을 위한 적극적인 태도는 시간을 심리적으로 확장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한자어로 '득과차과(得過且過)'란 게 있다. 그럭저럭 지낸다는 뜻이다. 그냥 설렁설렁 시간을 보내다보면 시간이 빨리 가고 별로 뚜렷하게 하는 일없이 세월만 축낸다. 늙는 게다. 그러니 나이가 들었다 싶으면 지레 겁먹고 뒷방차지 행세 말고, 외레 아무 일이나 선머슴처럼 달려들지는 못할망정 만만한 거 한 가지라도 붙잡아 몰두할 일이다. 무정한 세월이 쉴 새 없이 흘러도 늙을 새 없이 지내면 진짜 늙지 않는다!
#시인들만큼 인생의 고뇌와 허무를 제대로 느끼고, 폐부를 찌르는 감성으로 짚어내는 이는 없지 싶다. 북송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적벽부(赤壁賦)'*에서 함께 뱃놀이하는 손님(客)과 대화를 통해 인생허무의 본질을 얘기하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갈파하고 있다. 객이 " 하루살이 같은 삶을 천지에 부치니 넓디넓은 바다 한 가운데 한 알갱이 좁쌀이러니, 인생이 짧은 게 슬프다(寄蜉蝣於天地,渺蒼海之一粟, 哀吾生之須臾)"고 한탄하자 "어떻게 보느냐(觀之)의 문제"라며 고견(?)을 들려준다. 강물은 흘러가되 계속 이어지니 일찍이 간 것이 아니고(逝者如斯 而未嘗徃也), 달이 차고 이지러지지만 아예 없어지거나 크게 자라지 않듯이(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모든 걸 변한다고 보면(自其變者而觀之) 천지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의 존재(則天地曾不能以一瞬)요, 변하지 않는다고 보면(自其不變者而觀之) 만물이나 우리네나 모두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존재(則物與我皆無盡)라고 강조한다. 소선생(蘇者)은 "인생이란 어차피 그런 거니 인상 째푸리지 말고 받아들이면 심관이 편하고 나날이 즐겁다"며 정신승리라도 할 것을 주문한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가 '송시(Carmina)'에서 말했다는 "까르페 디엠(Carpe Diem )!"과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태백 성님께서 일찍이 만고의 절창(絶唱) '장진주(將進酒)'를 통해 교시하셨지 않나. 잘 난 놈이나 못 생긴 놈이나 조반(朝飯)머리에 새까맣던 머리발이 해질 무렵 눈밭이 돼버리는 게 인생 아니냐(朝如靑絲暮成雪)며 뭔 쪼깐한 꺼리라도 생기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걍 질펀하게 놀아제끼라고(人生得意須盡歡).
삼신할매가 나를 점지해 세상에 냈을 때는 다 써먹을 구석을 맹길어 뒀을 테니(天生我才必有用), 휘영청 달을 맞아 빈 술통 들고 주접떨지 말고(莫使金樽空對月) 살진 양을 골라 삶고, 찌고, 갈비에 꼬치도 마련하고, 트리플 한우로는 육회에다 안심 등심 너비아니로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설랑(烹羊宰牛且爲樂) 기본으로 폭탄주 백 잔에 낱잔으로 이백은 해야 할 것(會須一飮三百杯)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면서 너는 하늘이 낸 놈이니 어차피 술판 벌여 노는데 억만금을 써버려도 '원가(原價)' 생각에 하늘님이 틀림없이 다시 벌충해줄 것(千金散盡還復來)이라고 '가스라이팅'한다.
원래 '장진주(將進酒)'는 위(魏)나라에서는 '평관중(平關中)'이라 해서 조조(曺操)가 동관(潼關)전투에서 마초(馬超)ㆍ한수(韓遂)를 정벌하고 관중을 평정하는 내용이고, 오(吳)나라에서는 '장홍덕(章洪德)'이라 하여 손권(孫權)의 덕을 칭송한 것이며, 양(梁)나라에서는 '석수편(石首篇)'이라 해서 수도를 평정하고 동혼( 東昏ㆍ南齊 4대 왕, 東昏侯 蕭寶卷)을 폐위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원래는 공적이거나 국가에 관련된 일을 읊었던 가곡(歌曲)이었는데 우리 이태백 성님이 이런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무애(無碍)한 인생관에 맞춰 별호인 주선(酒仙)답게시리 음주의 미덕을 읊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인생의 허무를 초극(超克)케 해주는 둘도 없는 벗이자 시공(時空)을 넘나드는데 절실한 '광속(光速) 우주선'이었으니까. 술 석 잔이면 지극한 도(大道)에 두루 통(三杯通大道)하고, 한 말을 들이키면 무릇 자연과 한 몸이 되는 경지(一斗合自然)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리오.
#시간은 행운과 고난의 통로이기도 하다. 둘은 따로 따로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다니기도 한다. 혈관을 타고 도는 염증과 백혈구와 같이. 꾸준하게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백혈구가 늘어나 활발하게 염증 사냥을 하듯이 덕을 쌓고 선행을 많이 할수록 시간을 타고 흐르는 재난을 무기력하게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고난과 행운을 똑 같이 겪어도 행운보다 고난이 더 세게 각인된다. 일곱 번의 행복보다 세 번의 불행이 기억을 사로잡아 더 진하고, 더 오래 남는 까닭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의 정체이다. '好事'보다 뒤에 오는 '魔'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호사는 호사로 한껏 즐기고, 마가 찾아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는 주문으로 자기를 최면(催眠)하는 일이다. 어차피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말이다. 정신이 승리해야 진정한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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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