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도시 '자존심'에 '상처'…글로벌 패션 질서와 소비 문화의 균열 신호탄
옷이 싸고 빨리 나오니 쓰레기 생성도 빨라…쉬인의 폭풍 질주를 누가 멈출까
중국의 초저가 패션 브랜드 '쉬인(shein)'이 11월 5일 패션의 도시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 중심가 베아슈베 백화점(Le BHV Marais)에 오프라인 상설 매장을 열었다. 이날 파리 시청앞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경찰이 배치돼 인파를 통제하고 주요 매체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백화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긴 줄을 선 고객들은 '저렴한 가격에 최신 유행 상품을 살 수 있다'며 쉬인의 파리 입성을 반겼다.
다른 한편에선 '부끄러운 줄 알라', '페스트 패션, 그 대가는 우리가 치른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쉬인 개점 반대 시위를 벌였다. 또한 때를 같이하여 BHV 백화점에서 유명 브랜드들이 철수했다. 브랜드 패션의 백화점 철수는 쉬인 입점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된다.
세계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중국 초저가 브랜드 쉬인을 향한 열광과 거부가 팽팽히 맞선 것이다. 쉬인의 프랑스에서의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초저가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브랜드가 파리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존심에 금이 갔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패션의 도시 '자존심'과 초저가 '전투복'의 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따지고 보면 쉬인의 파리 입성은 단순한 패션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아니라 글로벌 패션 질서와 소비문화의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2008년 중국 난징에서 크리스 쉬(Chris Xu)가 설립한 쉬인은 광저우 의류 도매시장 등에서 제품을 조달해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로 출발했다. 이런 쉬인이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이 아닌 프랑스 파리에 입성했다는 것은 빠른 속도·저렴한 가격·데이터 기반 생산만으로도 '패션의 성지'를 흔들 수 있다는 도전장이다. 전통적인 '창작의 도시' 파리에 '기술적인 수요 예측의 도시'를 등에 업은 쉬인이 들어온 것이다.
쉬인은 하루 6000개 이상의 신제품을 검색·반응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한다. 디자인을 실시간으로 조정하고, 생산 최소 단위를 50~100벌로 시작해 반응이 좋으면 즉각 추가 주문한다. 즉 '기술적인 수요 예측'에 기초한 생산방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옷은 상의 하나에 5000원, 원피스는 1만7000원에 판매된다. 말 그대로 초저가다. 이 때문에 쉬인을 '패션 기업'이라기보다 '알고리즘·데이터 기업'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쉬인의 성공은 패션의 중심축이 예술에서 데이터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해석된다. 쉬인의 파리 오프라인 진출은 이런 패션의 흐름을 확인해주는 사건이다.
패션의 변혁을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들이다. 겉으로는 '패스트 패션이 패션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비판하지만, 쉬인의 파리 공습은 그들에게 '브랜드 역사만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경고라는 점을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다음 세대를 이끌 Z세대는 럭셔리보다 '실험적이고 빠른' 스타일을 선호하고, 쉬인의 지배 영역인 온라인 구매에 익숙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럭셔리는 여전히 오프라인 중심 유통이고, 가격 상승이 불가피한 구조다. 결국 쉬인의 파리 입성은 패션 생산방식의 변화, 디자인 주도권의 이동, 소비자 가치 기준의 전환, 미적 권력의 변화, 패션 수도의 의미 변화 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대 전환적 신호다.
그러나 쉬인은 등장 때부터 많은 문제를 품고 있었다. '값이 싸면 환경 부담이 커진다'는 명제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패스트 패션은 화석연료 기반의 빠른 물류로 인해 단위 제품 당 탄소 배출을 높일 수밖에 없다. 쉬인의 환경 관련 문제는 '(값이) 싸기 때문'이 아니라 '속도 때문'이다. 속도가 기본 철학인 쉬인의 제품들은 너무 저렴해서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소비'를 조장한다. 옷이 너무 싸고 너무 빨리 나오니 쓰레기 생성 속도도 빨라지고, 환경에 미치는 부담은 구조적으로 가속된다.
중요한 것은 쉬인의 약진이 프랑스나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쉬인이 2024년 6월 한국에 공식 진출한 이후 2025년 1월 월간 활성 이용자(MAU)가 약 45만명에서 175만명으로 3.9배 증가한 것으로 보도됐다. 8월에 206만명, 11월에는 282만명으로 급증했다.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세운 한국에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더위, 때 아닌 폭우 등 불규칙한 기후변화가 이미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폭우와 폭염이 더 이상 자연의 변덕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해온 '속도'의 대가다. 쉬인의 폭거를 막을 유일한 힘은 소비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쉬인의 질주를 멈추게 할 마지막 브레이크는 정부도, 브랜드도 아닌, 우리 소비자의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