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금리는 연 30%가 넘어 은행 저축보다 회사에 꿔주는 게 훨씬 이익
명동엔 100개 이상의 사채 중개소…고리 사채 의존기업 상황 점점 악화
300억원의 사채에서 숨통이 트인 현대는 '자동차와 조선소 투자'에 속도

보기와 달리(?) 정 회장은 주량이 많지 않았다. 생맥주를 좋아했고, 양주도 즐겼으나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 특히 예술인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즐겼다.
1972년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정 회장을 술자리에 불렀다. 그 자리에는 김진만 당시 공화당 원내 총무가 함께 있었으나 거의 독대나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은 용기를 내서 꼭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사채를 동결해 주십시오."
당시에 현대건설뿐 아니라 국내 기업 대부분이 사채를 많이 썼다. 특히 현대는 자동차에 투자하는 게 많아 '명동 사채의 90%는 현대가 쓴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아무리 친해졌다고 해도 대 통령에게 사채를 동결해달라는 부탁은 자칫 관계를 깰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사채를 갚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선소나 자동차나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현대의 사리사욕만 채우겠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를 살려주십시오."
정 회장은 말 그대로 읍소를 했다고 한다.
술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내가 정 회장에게 선물을 드리지요."
이 이야기는 당시 정 회장이 비서에게 들려준 내용을 옮긴 것 이다.
그리고 8월 2일 밤, 3일부터 모든 기업사채를 동결한다는 '8·3 조치'가 발표됐다. 명목은 제도권 금융을 잠식하고 있던 지하 금융, 즉 세금을 내지 않던 사채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현대는 당장 300억 원의 사채에서 해방됐다. 숨통이 트인 현대는 자동차와 조선소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었다.
8·3조치는 정부가 국민의 사유재산을 간섭한, 큰 사건이었다. 이 조치가 오로지 정 회장의 읍소를 받아들인 박 대통령의 선물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경제 성장에 따라 기업은 늘어났는데 금융 기관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제도권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 기업은 사채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사채 금리는 연 30%가 넘었다. 은행 금리보다 10%P 이상 높으니 은행에 저축하는 것보다 회사에 꿔주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명동에는 100개 이상의 사채 중개업소가 있었다.
고리 사채에 더욱 의존하게 된 기업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절반 정도가 부실기업으로 분류됐다. 71년 6월에는 전경련 회장 단(회장 박용완, 부회장 정주영)이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기업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김종필 총리와 김학렬 부총리, 남덕우 재무장관이 배석했으며 정부 차원에서도 사채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정부에서도 '사채 동결'이라는 극약 처방까지는 주저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정 회장이 감히 사채 동결을 입에 담았고, 고민하던 박 대통령의 결단을 끌어냈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어쨌든 정 회장은 8·3 조치를 박 대통령의 선물로 받아 들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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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