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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의 첫 해외법인은 삼양사의 남만방적(주)
한국기업의 첫 해외법인은 삼양사의 남만방적(주)
  • 곽용석 이코노텔링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8.10.25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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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회장이 중국시장 겨냥해 1939년 만주에 설립, 현지이주 농민자녀 교육에도 팔걷어

우리나라 어느 기업이 처음으로 해외공장(법인)을 만들었을까. 삼성, 아니면 현대. 아니다. 삼양사이다. 1939년 삼양사가 중국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적(주)이다. 그해 12월26일 서울서 열린 이 회사 창립총회에서 수당 김연수 삼양사 창업 회장은 남만방적의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2차대전이 한창일 때다.

김연수 창업회장의 장남 김상홍 전 명예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만주일대를 돌며 농지개간을 통한 대규모 영농의 끔을 키웠다. 앞줄 가운데가 김 명예회장.사진=2004년에 발간된 삼양 80년사.
김연수 창업회장의 장남 김상홍 전 명예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만주일대를 돌며 농지개간을 통한 대규모 영농의 끔을 키웠다. 앞줄 가운데가 김 명예회장.사진=2004년에 발간된 삼양 80년사.

사업허가는 당시 일본이 만주에 세운 꼭두각시 정부인 만주국으로부터 받았다. 자본금은 1천만원이었으며 창립총회 직후 도요타에 방적기와 방직기 1000여대를 발주해 일본인 경영자들을 놀라게 했다. 만주 소가둔(蘇家屯)에 17만평의 공장부지를 마련했다. 남만방적 사업을 위해 그 때 식산 은행 등으로부터 받은 4천만원이 넘는 돈을 융자받은 것 만 봐도 김 창업회장의 사업 배포나 신용,재력을 가늠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경영인이었던 셈이다. 남만방적은 대규모 공장이었으나 생산인력이 모자라 애를 먹었다. 할 수 없이 국내에 있던 경성방직을 통해 사람을 뽑아 현지에 투입했고 착공 20개월만인 1941년 12월 공장가동이 이뤄졌다.  또 김 창업회장은 이 공장을 운영하면서 봉천 소재 동광중학교의 재담이사장도 맡아 교포자녀의 육영에도 팔을 걷었다. 동광중학교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 봉천지역으로 넘어온 교포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운영자금이 어려워 김 창업회장의 도움을 청했고 수당은 이를 흔쾌히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김사장은 형 김성수(인촌)의 제안을 받아들여 생산에 어려움을 겪던 경성방직의 경영정상화에도 앞장섰다. 경성방직은 인촌이 국산 광목의 생산을 목표로 설립됐으나 생각만큼 일이 안 풀렸다. 이에 김 창업회장은 제품생산에 매달렸고 기어코 브랜드 상품을 내놓았다. 그가 내세운 국산 광목 브랜드는 ‘태극성’, ‘불로초’이다. 특히 '태극성'이라는 브랜드를 보면 그가 얼마나 민족의 혼을 사업에 담았는가를 알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신문광고<사진>을 보면 태극기를 연상시키는 국기 모양에 별을 달아 태극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국내 첫 광목 브랜드인 '태극성'의 신문광고. 인촌 김성수는 경성방직이 설립해 국산 광목 생산에 나섰고 생산에 어려움을 겪자 동생 김연수 삼영사 창업회장에게 경영책임을 맡겼다. 사진=2004년에 발간된 삼양80년사.
국내 첫 광목 브랜드인 '태극성'의 신문광고. 인촌 김성수는 경성방직이 설립해 국산 광목 생산에 나섰고 생산에 어려움을 겪자 동생 김연수 삼영사 창업회장에게 경영책임을 맡겼다. 사진=2004년에 발간된 삼양80년사.

그 별자리에 지금의 팔괘를 넣으면 바로 태극기가 된다. 이 제품은 올이 굵고 일본산에 비해 값이 싸서 원가경쟁력이 있었다. 실제로 김 사장은 이 제품을 들고 봉천,대련 등 중국 동북 지역을 돌며 판매 루트를 확보했다. 그 때 만주 매하농장 사무소에서 찍은 사진에는 김 창업회장의 장남이자 삼양사 전 명예회장인 김상홍 회장(사진 가운데·2006년 작고)의 모습이 보인다.

형인 인촌 만큼이나 신학문에 목말라했던 김연수 창업회장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직후 김 창업회장은 1921년 시찰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다녀온 것을 계기로 ‘영농과 공업’이라는 두 갈래의 창업 의지를 불태웠다. 피폐한 농촌을 살리고 민족자본을 키워 나라를 살리겠다는 산업보국의 의지를 붙태웠다. 실제로 삼양사의 전신으로 1924년 설립된 삼수사(三水社·서울 을지로 1가)는 농촌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창구였다

. 1만8천석의 농토를 근대 영농기법으로 생산성을 올리고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유랑하는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꾀했다. 당시 일본은 토지 조사를 명목으로 한반도 전체 임야의 57%를 총독부 소유로 돌려놨고 특히 일본기업과 일본인은 모두 50만정보에 이르는 농지를 소유해 우리나라 농민들이 설자리가 매우 비좁았다. 삼수사는 가히 민족기업이라 불릴만한 회사였다.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승화시켰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이 낳은 결과였다.

삼수사는 본사를 서울 남대문로 1가로 옮긴후 4년만인 1931년 상호를 삼양사(三養社)로 바꾸었다. 물 수(水)는 흐른다는 뜻이니 기를 양(養)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주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김 창업회장은 상호변경에 발맞춰 세 가지를 길러야 한다는 사훈인 삼양훈(三養訓)을 발표했다. 즉 안분이양복(安分以養福·분수를 지키면 복을 기를수 있고)관위이양기(寬胃以養氣·욕망을 절제하여 그 기를 키우고)성비이양재(省費以養財·낭비를 삼가서 재력을 키운다)이다. 그 삼양사가 6년 뒤면 창업100주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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