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밭에서 커다란 놈을 골라 호박잎 책보를 통째로 '미수꾸리'한 그 시절

음력 7월을 초추(初秋), 신추(新秋)라 한다. 본격적인 가을은 아니지만 이미 진즉에 입추(立秋)를 보내고 백로(白露)를 거쳐 미구에 추분(秋分)에 이를 테다.
예전 같으면 백로 무렵이면 미랭(微冷)이지만 저녁이면 선선한 기운이 돌기 시작해 방울벌레에다 귀뚜라미가 추야곡(秋夜曲)을 연주하고, 이 소리에 오동잎은 소리 없이 뜨락에 내려 앉아 먼 곳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를 맞을 일이다.
한데, 요즘은 춘분이 코앞인데도 한밤중에조차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칠월 '개우랑' 해에 황소 뿔이 녹는다더니 꼭 그 짝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부터 찔끔거리며 낌새를 보이던 하늘이 기어코 뚫렸다. 달력은 9월하고도 중순을 넘겼으니 분명 가을이어야 하건만 하늘을 뚫고 쏟아지는 빗줄기는 아직 여름을 고집하고 있다. 티 없이 맑고 짙푸르러야 할 그곳에 한여름에나 볼 법한 먹장 기운이 꽉 들어찬 가운데 사흘째 세차게 쏟아진다. 오죽하면 재해경보가 계속 이어진다. 처서에 비(處暑雨)가 오면 쌀독이 휑해진다는데 처서가 지난 지 한참인데도 이러니 정말 걱정이다.
늘 비가 문제다. 아예 안 내리거나 턱없이 적게 내려도 그렇고, 미처 감당하지 못 하게 많이 내리거나 정작 쓸모가 없을 때 객 적게 쏟아져도 그렇다. 비가 없으면 살 수 없는데. 비가 문제라는 건 비 자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어찌 할 수없는 영역, 곧 하늘에 대한 절규이자 푸념이다. 좀 알맞게 해주시지…원.
비는 하늘의 뜻이다. 거부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멋대로 당겨올 수도 없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비가 온다'고 하지 않고 '비가 오신다'고 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 사회에선 '우자(雨者)'가 '대본(大本)'일 수밖에 없으니 최소한 이 정도의 공경은 마땅한 예의이리라. 어릴 적에 하도 들어서 귀에 인이 박힌 표현이라 지금도 불현듯 깍듯한 존댓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주위에선 구닥다리라고 놀리지만 어쩌겠나 나의 물림인 것을.
#농사철엔 적절하게 비가 내려야 풍년이 든다. 특히 초복을 즈음해선 벼가 성장을 시작하는 때라 논물이 넉넉해야 충분히 자라는 데 좋다. 그런데 한 해 동안 가장 무더운 더위가 시작되는 초복이 되면 강한 햇볕이 대지의 물기를 날려버려 가뭄이 들고 심할 경우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버리고 만다. 물이 충충해야 할 논바닥이 거북 등이라니. 타들어가는 논바닥을 보는 농부의 속도 바짝 타들어 가게 되고, 이때 하늘을 우러러 원망 반 기원 반의 푸념이 곳곳에 넘쳐난다. "에라이 션~한 소내기 한줄기 맞고 죽어도 좋으련만…."
하늘에 사무쳤을까, 홀연 느닷없는 소나기가 흩뿌리고 지나간다. 해가 여전한데 내리는 비니 여우비가 분명하지만 한소끔이라도 보탬은 될 듯싶다. 조금 지나 또 한 차례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다. 아까보다 쏟는 양이 많다. 빠삭빠삭하던 농심에도 물기가 어리고, 뿜어내는 담배 연기를 타고 근심도 연해진다. 초복 날 한 소나기는 고방 그득한 구슬보다 낫다!
#여름철에는 특히 소나기가 자주 내린다. 그것도 내리는 때나 장소가 울퉁불퉁 도시 가늠이 안 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이 별안간 시커메지면서 여기 번쩍 저기 번쩍 우레가 들어 요란한 천둥과 함께 빨랫줄 같은 빗줄기를 쏟아 붓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별 소리도 없이 회초리 같은 빗줄기 떼가 이리 저리 몰려다니며 손바닥만큼씩만 적시고 사라지기도 한다. 밭에 나란히 붙어 있는 고랑인데도 이쪽 고랑엔 흥건한데 저쪽 고랑은 뽀송뽀송 말짱하다. 허둥지둥 앞마당에 널어놓은 보리 멍석을 거두기 무섭게 장독 뚜껑을 덮으려 뒤뜰로 달려가 보니 항아리 주둥이에 이슬기조차 어림없기 일쑤다. 그러기에 '여름 소나기는 밭고랑을 두고 다툰다.'느니 '오뉴월 소나기는 닫는 말 한쪽 귀는 때리고 한쪽 귀는 놔둔다.'는 등 곁말이 즐비하다.
#비가 오시면 온 동네가 분주했다. 논의 물꼬를 살펴야 하고 혹시 큰 비라도 오실지 모르니 논두렁이 쥐구멍으로 허실되지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야 했다. 밭고랑에 물이 차면 작물들의 뿌리가 곯을세라 물돌을 쳐줘야 하고, 아침저녁이 다르게 크는 오이와 호박, 가지 등을 늙탱이가 되기 전에 따와야 하니 집집마다 손이 달려 난리가 따로 없다. 더구나 멀쩡하던 하늘에서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에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해 돌아치는 발소리에 온 마을이 쿵쿵 거렸다. 엊그제 잠깐 볕이 든 사이를 틈타 어렵사리 타작한 보리를 말리는 멍석하며 지붕에 널어둔 고추, 호박고지, 뿌리째 뽑아 마당귀에 대충 쌓아둔 콩·팥 단 더미, 여름 땔감으로 그만인 밀짚과 보릿짚 등 비를 피해 집안으로 거둬들이거나 있는 자리에 통째로 가려 덮거나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일손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으니 맘만 급해 속이 바싹 탄다. 이럴 때 꼬맹이들도 나름 제몫을 해야 하는데 행여 말귀를 냉큼 알아채지 못하고 더듬대거나 굼뜨게 굴었다간 대번 벼락같은 불호령을 맞기 일쑤였다.
워낙 급할 때는 생으로 비를 맞으면서라도 돌아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마다 비를 가리기 위한 장비(?)를 챙겨 나섰는데 이 또한 간단치 않았다. 말이 장비이지 고작 우산 예닐곱 개와 우비를 대신할 비료부대, 비닐쪼가리 몇 장이 전부였지만 우리 집의 경우 열 명이나 되는 식구들 것을 일일이, 그것도 한꺼번에 챙기기란 여간 번잡한 일이 아니었다. 집안의 상 어른이신 할머니께선 장에 가실 때를 빼곤 출타를 않고 농사에 매달리셨던 까닭에 비가 오신대도 평상시 차림대로 베적삼에 맥고자를 쓰시고 논밭으로 가시거나 정 뭣하면 밀짚모자 위에 비닐로 고깔처럼 덮고 쪼갠 비료부대를 숄처럼 어깨에 두르는 게 전부였다. 요즘 같으면 간단히 우비 한 장이면 끝날 일이지만 우리 계에선 당시 그게 최선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바깥일을 맡아 하던 일꾼의 우장(雨裝)도 거의 비슷했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의 형편이 기중 난 편인데도 그랬다.
#모기 주둥이가 돌아간다는 처서(處暑)를 훌쩍 넘어 서늘한 기운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지났는데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통에 한여름에나 있음직한 사건을 하나 겪었다. 코드명은 '우산 실종'-.
얼마 전 충주에 사시는 작은 형님네를 뵈러 다녀오다가 그만 가자고 간 우산을 잃어버렸다. 버스터미널에서 출발 직전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들렀다가 서두르는 바람에 세면대 위에 둔 채 나온 것이다. 아뿔사! 차에 오르자마자 생각이 번쩍하고 들었지만 버스기사님 왈, "이미 출발 시각이라 회수가 불가"하단다. 매몰찬 표정에 무정한 응대가 마냥 섭섭해 투덜댔지만 "그러길래 조심하라니깐…."하는 아내의 '쿠사리'에 이내 쭈그러들고 말았다.
하지만 집에 오기까지 걸리는 세 시간 가량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모른다. 그 뒤로도 며칠은 그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도통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뭐 사나이가 쪼잔하게스리 고까짓 우산 하나 갖고 그러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겐 어릴 적 우산 때문에 겪었던 일들이 소중하면서도 한편으론 서러운 기억으로 오버랩 되는 '사건'이기에 그렇다. 우산이란 그렇게 평생을 두고 내겐 귀물(貴物)이다.
#아버지께선 면사무소 공무원이셨고, 서울에 유학 중인 큰 형을 빼곤 나머지 5남매가 모두 학교에 다녔으니 비 오시는 날 아침이면 늘 우산 때문에 집안이 시끌벅적했다. 아버지께선 여느 시골 사람과는 달리 거의 매일 양복 정장차림으로 출근을 하셨기 때문에 우산도 쇠로 된 살에 헝겊으로 덮어 만든 검정색 박쥐우산으로 구색을 맞춰 폼을 잡으셨다. 하지만 우리 남매들에겐 비닐우산이 주어졌다. 하지만 어쩌다 아버지가 새로 우산을 장만하시는 날이면 헌 우산을 두고 눈치가 오고가곤 했는데 결국은 응석이 한창이던 막내들 차지가 됐다. 중간인 셋째 형과 넷째인 나는 언제나 개털이어서 나중엔 으레 우리 차례는 없다고 체념했다. 그런데 비는 늘 바람과 짝을 이루는 탓에 비닐우산은 끄떡만 해도 뒤집히고 살이 부러지는 등 '부상'을 당해 온전한 놈이 있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선 20 리 떨어진 의정부에 가실 때마다 새 우산을 서너 자루씩 사다 쟁여놓곤 하셨다. 당시엔 솥과 냄비는 물론 고무신발도 고쳐서 쓰던 시절이라 상대적으로 고급 축에 끼던 박쥐우산은 당연하고 비닐우산도 이 '만능 수리쟁이'의 신세를 지고나면 한참을 더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신같은 솜씨라 해도 어차피 재생품이라 티가 나(비닐까지 땜빵을 했으니!) '신삥'과는 댈 게 못 됐다. 여기에서도 우리 몫은 새 것인 적이 없었다.
#꼬맹이들한테 비가 오시는 날 학교에 가는 건 고역이었다. 맨 날씨에도 시오리 넘는 길을 걸어가노라면 다리가 뻐근하고 지겨운데 하물며 비바람을 뚫고 가는 길이니 오죽했을까. 지금 헤아려 봐도 곱절은 힘들고 멀게 느껴졌을 게 분명하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낭떠러지 고갯길을 넘어 아름드리 밤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선 마찻길을 따라 십리쯤 간 다음 '강다리뻘'이라 불리던 모래벌이 있는 큰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냇물이 그만고만 하면 징검다리를 이용하고, 물이 많이 불었으면 한 칠백 걸음 정도 위쪽에 있는 신식 콘크리트다리를 건너 다시 '행길'을 오리 넘게 걸어야 했다.
특히 마지막 코스인 행길은 춘천~서울 축선(軸線)과 의정부~서울 축선을 연결하는 중요한 군사작전도로로 육이오 난리를 겪은 뒤 왕복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신작로, 또는 행길이라 불렀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군대 트럭들이 오가는 바람에 사고위험이 큰 곳이었다. 그래서 등교 때는 각 마을마다 학생들이 모여 상급생 향도(嚮導)의 인솔아래 한줄 '나래비'로 길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차 조심에 온 신경을 써야 했다. 당시엔 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전교생(400여명)가운데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나머지는 죄다 책보를 메고 다녔다. 사내애들은 오른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등 뒤로, 계집애들은 허리에 각각 두른 다음 앞으로 고를 지어 맸다. 그런데 비가 내리면 사정이 달라졌다. 책과 공책이 젖으면 낭패 아닌가. 그런데 우비는 고사하고 쬐끄만 몸뚱이 하나 넉넉하게 감쌀 만큼 널찍하고 변변한 비닐 막조차 없었으니….
그러니 어쩌겠는가, 궁여지책이라도 써야지. 우선 언젠가 행길 가에서 주어 꼬불쳐 뒀던 비닐쪼가리로 책과 공책을 둘둘 감아 책보에 싼 다음 둘러메고, 그 위에 긴 삼태기처럼 접은 비료부대를 머리 위에서부터 등 뒤로 내려 쓰면 마치 오줌을 싸서 소금을 얻기 위해 키를 쓴 모습이 되는데 바람에 벗겨지지 않도록 가슴팍과 허리춤을 끈으로 묶어 주면 1차 채비는 끝난다. 그리곤 또 우산을 쓰는데 얼굴과 윗도리만이라도 온전히 가리면 좋으련만 살이 몇 개씩 부러진 게 태반이어서 그냥 우산을 썼네 하는 시늉에 그치는 게 매번 겪는 일이었다. 새 우산을 넉넉하게 쟁여놓을 형편은 애저녁에 그른 것이고, 또 어쩌다 새 것이 생겨도 어른들 차지이지 금세 망가트릴 게 뻔한 애들한테 돌아올 리 만무하니 등굣길에 애들 손에 쥐어주는 건 언제나 성하지 않은 우산일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이들은 어차피 책만 성하면 되니 거추장스럽기만 할뿐 비 가림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산 쓰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비 오시는 날 아침이면 집집마다 비 한 방울이라도 덜 맞게 하려는 엄마와 한사코 그냥 가겠다고 떼쓰는 꼬맹이들의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이러저러 해도 아침의 '우산전쟁'은 늘 성화같은 모정(母情)의 승리로 끝나기 마련이라 꼬맹이들은 엄마가 '앵기는' 비닐우산을 쓰고 내키지 않는 출발을 하곤 했다. 하지만 부어터진 얼굴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열 발자국도 못 떼어 거센 비바람이 심술을 부리면서 덮쳐 우산을 뒤집어 버리니 그나마 붙어 있던 살마저 몇 가닥이 또 부러진다. 꼬맹이는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고는 망가진 우산을 가지런히 수습해 한손에 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죽기 살기로 달리면 그만큼 빨리 갈 수 있고, 비도 그만큼 덜 맞을 테니까. 다른 애들도 비슷한 처지라 한 아이가 달음박질을 시작하자 전염된 것처럼 죄다 따라서 내닫는다.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마다 망가진 우산들이 쌓이게 마련이지만 절대로 내다버리는 법이 없다. 집으로 가져가 모아뒀다가 나중에 만능수리쟁이 아저씨가 오면 고쳐 쓰거나 다른 우산 수리에 부속품으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또 대꼬챙이로 된 우산살은 잘 다듬으면 겨울철 연을 만들 때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우산 덮개인 비닐도 성한 부분들을 인두로 이어 붙이면 꽤나 넉넉한 비닐보자기를 만들 수 있고, 좀 더 시간과 공을 들이면 멍석 크기로 천막까지 꾸밀 수 있는 '자원'이었다. 이러니 아무리 망가져 제 수명을 다 했다 해도 여전히 쓸모가 쏠쏠한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 오시는 날 학교에선 망가진 우산을 놓고 조금이라도 덜 상한 놈과 바꿔치기 하다 들켜 꼬맹이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다툼을 막기 위해 우산마다 비닐 덮개에 이름을 바느질로 표시해두는 치밀함(?)도 그 시절 흔한 풍경이었다. 한편 박쥐우산은 꼬마들한테는 언감생심 넘볼 수없는 정도로 귀한 것이어서 '폐품'이라도 비닐우산과는 격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 재질 자체가 질긴 천과 쇠이기 때문에 비싼 몸이라 망가진 놈을 해체해 나오는 부속품들도 그만큼 값어치를 인정받아서 오만가지를 다 받던 '짠물' 엿장수도 한 자루에 양은 쟁개비와 같은 값을 쳐줬으니까 말이다. 특히 박쥐우산의 덮개 천은 여러 장을 모아 모아 꿰매서 바지를 만들면 검정색이라 때도 덜 타고 오래 입을 수 있어 인기가 있었다.
#요즘 초등생들이 같은 또래의 우리 친구들이 비 오시는 날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안드로메다' 쯤에서 온 외계인으로 알고 놀라 자빠질 게 분명하다.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로 산이야 들이야 쏘다니느라 손발에 팔다리는 물론 상판대기까지 시커멓게 그을린 데다 머리는 절반이나 기계충에 먹혀 뚫려있고, 목덜미나 팔다리 등 어느 구석에 몇 군데일지 모르게 헌데가 수두룩한 모습도 그러려니와 책보를 두른 위에 비료부대를 욱여 썼으니 영락없이 '노틀담의 꼽추'를 방불케 하는 기괴한 형상이었음에랴! 간난 애 때부터 인물이 훤해 '백동(白銅)부처'라고 불린 동생은 아무 차림을 해도 태가 났지만 나 역시 기럭지만 멀대 같이 훌쩍 했을 뿐 도무지 옹골찬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엉성한 약골이라 스스로 보기에도 꺼벙한 게 영 아니었다. 어떤 애들은 징거미 똥구멍 같은 콧구멍에서 인중을 타고 입으로 흘러들어가는 누렁코를 사시사철 주구장창 달고 다니는 터라 훗날 코미디언 '영구'를 선구적으로 입증한 지구인으로 이 행렬에 끼어 거시기한 장면을 보탰다. 그런데 사내애들만 그런 게 아니라 계집애들도 머리만 단발머리로 깡충할 뿐 보기가 섭뜩하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다 각자 씩둑꺽둑 멋대로 망가진 우산을 쓰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리오.
이런 모습을 한 행렬이 비바람이 몰아치고 우중충한 날 아침부터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쏟아져 나와 어떤 한 곳(학교다!)으로 몰려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지금도 날씨가 궂고 빗방울이 한둘 듣기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아려오는 기억이다.
#우리 시골뜨기들은 언제 어디서건 별안간 큰 비와 맞닥뜨려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번개가 쳐도 키가 큰 어른들부터 차례 한다는 헛똑똑이 개똥학설(?)을 굳세게 믿는 탓에 비바람 속을 헤집고 다니는 걸 겁내기는커녕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하도 쏘다녀서 어디쯤에 무엇이 있는지 빠삭해서 그때그때 대응도 척하면 척이었다. 그러니 하굣길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져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여섯 살쯤이면 누구나 농번기에 막걸리 심부름을 하게 되는데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면 몸뚱어리야 물에 빠진 생쥐가 될지언정 주전자에 빗물이 들어가면 술맛이 싱거워질까봐 쑥 잎을 뜯어 주전자주둥이를 틀어막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생이지지(生而知之)마냥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굣길 문제인 만큼 술 대신 책을 젖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려면 책보에 빗물이 스미는 걸 막을 수 있는 걸 찾으면 되는데 널찍한 이파리가 필요하다. 호박잎, 오동잎, 토란잎이면 일단 크기는 합격이지만 각각 장단점이 있음을 잘 안다. 우선 호박잎은 주위에 쌔고 쌘 재료라 구하기는 쉽지만 잘 찢어지고 잎 면에 가는 털이 까실거려 작업하기가 다소 불편하다. 또 오동잎은 두께도 괜찮고 질감도 쓸 만하지만 나무가 흔치 않고, 있다고 해도 가지치기를 해 잎을 얻기 위해선 올라야 하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토란잎은 겉면이 '비로도'같아 빗방울을 또르르 굴러 내리게 하기 때문에 방수력(防水力)이 비닐에 못지않고 두께와 질기기도 괜찮아 기중 훌륭한 재료다. 그래서 소나기를 만나면 일단 근처에 있는 호박잎을 서너 장 따서 책보를 겹쳐 싼 뒤 덩굴로 칭칭 동여 매 방수를 한 다음 꼭 껴안은 채 가까운 토란밭으로 튀면 된다.
토란은 집집이 키우는 작물이라 쉽게 찾을 수 있다. 토란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커다란 놈으로 골라 호박잎 책보를 통째로 가려두고, 몇 장을 더 따서 연밥 만들듯이 책보를 '미수꾸리'한다. 이때 필요한 끄나풀은 토란대의 껍질을 벗겨 쓰면 깔끔하다. 급한 대로 책보를 쌌으면 이번엔 머리와 얼굴을 가릴 고깔을 만들 차례다. 큼직한 놈을 서너 장 따서 잎자루를 떼어낸 다음 가는 나뭇가지를 바늘 삼아 누비방식으로 꿰매면 승무에 쓰는 고깔처럼 되니 비모자로선 그만이었다. 매를 만난 꿩처럼 아랫도리는 젖거나 말거나 머리와 얼굴만 챙기는 게 쑥스럽기는 하지만 귀중한 책과 얼굴이라도 건질 수 있으니 어디냐. 그렇게 하고 집에 가면 할머니께서 홀딱 젖은 게 안쓰러워 하시면서도 한편으론 신통하다는 표정을 짓곤 하셨다.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