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리지서 이어지는 도로에서 ' 빙하 격류 ' 등 알래스카의 속살 감상
에스키모는 고래·물개를 잡았고, 인디언은 내륙에서 '순록 사냥' 살이

▪북위 64도의 군사도시 페어뱅크스
알래스카 제1일의 도시는 앵커러지이고 제2의 도시는 페어뱅크스(Fairbanks)입니다. 앵커리지에서 600㎞ 내륙에 있는 페어뱅크스는 북위 64도, 바로 북극권(북위66.7도) 밑에 위치해 있어서 하지(6월21일)가 되면 해가 지평선 밑을 잠시 맴돌다가 다시 뜨니 여름철 백야를 보게 됩니다.
하지를 기념하여 야구경기가 한밤 중에 시작하고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는 '미드나잇 세일' 행사도 벌어집니다.
페어뱅크스 인구는 약 5만 명, 일반 주민이 2만5천 명이고, 나머지 군인 및 군속과 그 가족을 합쳐 2만5천 명입니다. 군인은 육군이 1만 명 그리고 공군병력이 약 5천 명이니 군사도시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북쪽에, 그리고 러시아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이 도시는 냉전시대 소련의 미사일 공격을 가장 먼저 탐지해서 요격하는 임무를 띤 전략요충지였고 지금도 그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1986년 당시 페어뱅크스엔 약 400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한국에 근무하던 미군들이 국제결혼으로 얻은 배우자와 그 가족들들로서 근무지 이동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기지촌 비슷한 한인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페어뱅크스는 푸르도베이에서 시작하는 대유송유관이 남쪽 발데즈항 터미널까지 연결되는 중간지점으로 송유관 시설의 관리 보수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합니다.
▪순복음교회 밴과의 인연
자동차를 타고 이 먼 도시에 2박3일간 여행을 하게 된 이유는 군사시설이나 송유관 구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에스키모 언어를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와 미리 약속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캠퍼스의 구장회 교수는 동국대 영문과 출신으로 인디아나 주립대에서 언어학 박사를 받은 후 1960년 후반 이곳에서 에스키모 언어에 매달려 연구한 학자였습니다.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를 잇는 약 600㎞의 '파크스하이웨이'를 대학원생 김정화 씨와 렌터카를 빌려 타고 달렸는데 당시 구경했던 알래스카 풍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통량이 적은 알래스카에는 고속도로가 없었습니다. 하이웨이는 2차선 포장도로였고 겨울동안 얼어붙었던 아스팔트가 깨진 노면을 보수하느라 군데군데 공사구간이 있어 속력을 낼 수 없어서 10시간 넘게 운전했습니다.
빙하가 녹아 격류가 흐르는 데날리국립공원을 비롯하여 침엽수림과 자작나무 숲이 펼쳐지는 알래스카의 속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몇십 분 달려도 도로 위에서 자동차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혼자 운전했다면 불안감에 온몸이 위축됐을 분위기였습니다.
페어뱅크스를 200여㎞ 앞두고 밴 한 대가 우리 차를 추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내 눈을 끈 것은 그 밴의 측면에 큼직하게 쓰여진 한글 문자였습니다. '페어뱅크스순복음교회'. "여기에도 한국 교회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순복음 교회 차를 100여 m 앞세우고 뒤쫓아갔습니다.
그렇게 페어뱅크스에 도착하여 예약한 모텔을 찾아갔는데, 모텔 옆에 순복음교회 간판이 달린 단층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쫓아가던 밴이 마당에 세워져 있었고 운전자가 낚시 도구와 그물통을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교회 목사님이었습니다. 나의 취재 얘기를 들은 그는 몹시 반가워하며 교회 건물로 안내하더니 라면을 끓여 저녁 대접을 하며 페어뱅크스 생활을 들려줬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앵커리지보다도 훨씬 남쪽에 위치한 도시 스워드 근처 해변으로 낚시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페어뱅크스에 사는 한국인 중에는 여름에 700㎞ 남쪽까지 낚시를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의 장거리 자동차여행 욕구는 좁은 국토에서 살다가 해방감을 만끽하는 방법의 하나인 듯했습니다.
▪ 구장회 박사 ― 에스키모 언어 문화 연구에 18년
이튿날 구장회 박사를 만났습니다.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캠퍼스는 언덕 위에 있는 지구상 최북단의 대학이라고 구 박사가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2층 건물로 안내했는데 들어가 보니 2층 귀퉁이에 '한국문화연구원'이라는 나무로 된 한글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미국에 한국을 올바르게 알리고 한국학을 키우기 위해 어렵게 설립했다"고 연구소를 세우게 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캠퍼스를 돌아본 후 학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며 구 박사가 18년간 연구한 에스키모족과 그 언어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점을 바로 잡아야겠다며 꺼낸 첫 마디가 "이글루(igloo)는 에스키모의 집이 아니다"는 말이었습니다. 에스키모는 전통적으로 고래 뼈로 벽을 세우고 이끼와 짐승가죽을 덮어 집을 만들어 살았으며, 이글루(얼음집)는 겨울철 사냥을 할 때 눈보라를 피하는 임시 대피소였다는 것입니다.
에스키모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는 전 세계에 20명 남짓. 구장회 박사의 연구는 험난했습니다. 그 넓은 알래스카에서 육로로 접근할 수 없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생활 언어를 녹음하고 분석하며 문화를 익혀야 했습니다.
에스키모족은 몹시 배타적이어서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녹음기를 숨기고 대화를 하다가 들켜 스파이로 몰린 적도 있고, 냄새가 강한 물개 기름에 젖은 여인에게 술을 사주고 음성을 분석하기 위해 목을 만져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 나는 음식을 거절하다가 마을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알래스카는 땅도 넓지만 원주민도 에스키모족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인디언 종족이 존재하며 문화와 언어도 다양하다"고 말했습니다. 에스키모와 인디언은 전혀 다른 종족이었고, 언어도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에스키모는 해안을 따라 고래·물개를 잡았고, 인디언은 내륙에서 순록을 잡아 살아왔습니다.
구 박사는 또 "에스키모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이 눈(snow)인데, 눈을 지칭하는 단어만도 무려 33가지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새로 내리는 눈, 땅에 닿자 녹는 눈, 달밤에 내리는 눈 등 시간과 상태에 따라 독립된 단어가 사용된다는 겁니다.
그는 1980년대 초 베이징 학술대회에서의 일화도 들려주었습니다. 한 중국 학자가 다가와 "혹시 에스키모족이냐?"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구 박사가 "한국인 학자"라고 밝히자, 그 중국인은 "미국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러 알래스카로 유배되었느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소련의 시베리아 유배 이미지를 알래스카에 투영한 것이었습니다.
▪에스키모 대학생의 절규 "물개 잡으며 살고 싶어요"
알래스카의 석유 붐은 원주민의 생활도 바꾸어놓았습니다. 원주민에게 일정한 땅을 떼어주고 석유 로열티에 의한 배당금이 나오면서 더 이상 사냥만으로 생계를 이어가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 박사는 에스키모의 본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에스키모 학생을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공부에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교수 지도에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찾아와 고백했습니다. '바다가 그립고 물개를 잡으면서 살고 싶어 도저히 공부를 못하겠습니다.' 그는 끝내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구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래스카가 미국에 편입된 것이 과연 원주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석유가 가져온 풍요에도 불구하고, 에스키모의 삶의 중심에는 여전히 바다와 눈, 그리고 물개가 있었습니다.
문명이 약속하는 번영이 인간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을까요.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는 그 물음에 묵묵히 자기 방식으로 답하고 있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