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는 임금 탄신일 등의 조하의(朝賀儀)만 참여하는 명예직 부여
노욕 (老慾) 혹은 노추(老醜) 막던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갈수록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세대 갈등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지 꽤 됐다. 이 중 하나가 고령자 취업 문제다. 생계를 위해서라도 일을 하고자 하는 노인들이 늘어나지만, 취업 지옥에 시달리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한데 희한하게도 정치판은 여기서 비껴나 있다. 선출직, 그러니까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정무직 공무원들에겐 '정년'의 제한이 없는 듯 보여서다. 높은 사람의 뜻에만 맞으면 또는 드물기는 하지만 능력만 있으면 나이와 무관하게 감투를 쓰는 경우가 여럿이니 말이다.
조선시대는 그렇지 않았단다. 옛 그림을 소재로 출생부터 죽음까지 양반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옛 그림 속 양반의 한평생』(허인욱 지음, 돌베개)이란 책이 있다. 여기 '치사(致仕)'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일반적으로 일흔이 되면,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이를 '치사'라 했다. 이는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의 "대부는 70세에 치사한다(大夫七十而致仕)"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니 조금 웃기는 일이긴 한데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이든 벼슬아치를 '후퇴'시켰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치사를 한 '전관'들은 어떻게 대우했을까.
조선사를 조금 들여다보면 '500년을 버틴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정교한 제도가 있었던 것에 대해 놀라는 일이 있는데 '치사'와 관련한 경우도 그렇다. 우선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을 지내고 고령으로 물러난 '전관'에게는 예조나 그가 사는 고을에서 매달 술과 고기를 보냈다.
여기에 봉조하(奉朝賀)란 제도를 두어 예우했다. 이는 정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되, 정월 초하룻날 조신들이 임금에게 문안드리는 정조(正朝)와 임금 탄신일 등의 조하의(朝賀儀)에만 참여하도록 하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모두 15명의 봉조하를 두었는데 이조와 병조에서 나누어 임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치사를 요청하긴 했지만 정말 능력이 뛰어나거나 임금의 총애가 지극해서 놓치기 아까운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 이들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해 관직에 더 머물도록 했다. 조선의 헌법이라 할 『경국대전』에는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일흔 이상이지만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어 벼슬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조의 보고에 따라 궤장을 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궤는 괴목으로 만든 접이식 의자, 장은 문자 그대로 지팡이를 가리키니 실제 노령의 몸을 가누고 대궐로 오는 데 도움이 될 기구였다. 궤장과 함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반포하는 선교(宣敎), 사온서에서 만들어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인 선온(宣醞), 임금이 신하에게 풍류를 내려주는 일등사악을 함께 하사했다. 이런 궤장을 받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문의 경사여서 궤장연(几杖宴)을 열어 축하하고 했단다.
물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옛말에서 보듯 당시엔 그토록 오래 산 이도 드물었고, 당쟁이니 뭐니 해서 '정년'에 이르도록 벼슬살이를 한 이도 많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그런 제도가 있었다. 세대 갈등을 줄이기 위해 선조들의 이런 지혜를 빌리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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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