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8 14:35 (목)
[이만훈의 세상만사] ㉑ '별을 헤는 밤'이 그립다
[이만훈의 세상만사] ㉑ '별을 헤는 밤'이 그립다
  • 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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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5.08.2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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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들과 몽골 여행의 내 나름의 속셈은 '별 보기'였다
어려서부터 숱하게 별을 보고 자라 '그때 별'이 그리워
삶이 신산하고 강퍅해도 '별 보면' 외레 영혼은 맑아져
온갖 짜증, 성냄, 화딱지 짙은 어둠의 붓질로 지워진다
삶이 신산하고 강퍅할수록 별을 보아야 한다. 

'할머니가 문고리를 잡고 내다보시는데도/ 겨울밤은 왜 그리 무서웠는지요/ 두엄터에 시린 엉덩이 내놓고 용을 쓰다가 /쳐다보는 하늘에서 주먹 같은 별들이 쏟아지곤 했지요/ "아직 멀언" 하고 재촉하시던 할머니도 가시고/ 그 후로는 개울물처럼 흐르던 별빛도 잊고 살았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밝은 세상 누가 별을 그리워하겠습니까/ 두엄터에 밤똥 누며 자란 우리네 마음 속에나 / 잊혀질 듯 아득하게 남아 있지요'

강원도 양양이 고향인 이상국 시인의 '별' 전문이다. 참 맛있으면서 고마운 시다. 꼭 내 마음 같은 시를 내어 주는 시인이 더 고맙다.

시인은 또 다른 '별'에서 '별에서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며 '별을 닦으면 캄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고 했다. 그리곤 '별을 쳐다보면 눈물이 떨어진다'고 했다. 이 시인은 해방 이듬해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팔십 객이다.

무도(無道)한 세상-. 그러고 보니 요즘엔 감성을 먹고사는 시인들조차 별을 외면하는 듯하다. 아니, 누구는 잊고, 누구는 모르고, 누구는 무시하고 산다. 이상국 시인 말마따나 너무 밝은 세상이라 그런가. 하지만 어디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말 그럴까.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이네 뭐네 희떠운 소리를 해대며 그토록 잘난 체 하는 족속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지구별의 인총을 다 합쳐 봤자 저 은하수의 한 귀퉁이에 떨어진 은하방울만큼도 못한 주제다. 그런데도 고개를 들어 별을 우러르기는커녕 오두방정에 시건방을 떨어대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처럼 '별 볼 일 없는 듯'이 사니 세상에 천둥벌거숭이 천지다. 이 모두 별을 보지 않는 탓이다. 별 하나에 나 하나, 별 둘에 나 둘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던 윤동주(尹東柱)는 아닐지라도 별을 우러러 보며 자신을, 가족을, 친구를, 그리고 연관된 모든 것들을 꾹꾹 눌러가며 헤다보면 자신이 왜 별 아래 그 빛을 받아가며 사는지 손톱만큼이나마 알 수 있을 테다.

#얼마 전 고교 동창생들과 몽골 여행을 다녀왔다. 1년 전부터 계획한 것으로 한창 꺼들꺼들한 채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겪은 친구들과의 동행이라 기꺼이 동참했지만 사실 다른 속셈도 있었다. 별보기다. 친구와 별, 굳이 비중을 따지면 50대 50?

하여튼 우리는 죄다 촌놈들이라 어려서부터 숱하게 별을 보고, 별 아래서 살아온 터라 저마다 좋건 싫건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는 얘기다. 도시에 살면서 별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건 고향에 대한 진한 노스탤지어를 드러내는 일이다. 별들은 하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련만 하늘빛이 바뀌고, 동네가 바뀌고, 나도 그 때의 내가 아니니 별이란 늘 아련하면서도 애틋한 추억이고, 때론 아릿한 슬픔의 근원이기도 하니까.

하릴없이 흐르는 세월이야 그렇다 치고 별과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건 문명이러니 이놈을 떼어내면 그런대로 그 시절 별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나선 게 이번 여행이었다. 몽골 초원은 별보기의 대표적 성소(聖所) 중 한 곳으로 꼽힌다. 징기스칸공항에 내리자마자 100km를 달려 찾아간 바얀척드. 매년 몽골 최대 축제인 '나담'축제가 열리는 장소인 이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별을 보았다.

저녁을 먹고 게르에서 뒹굴대다가 새벽 3시 밖으로 나와 고개를 쳐들었다. 낯선 곳이라 방향을 잡기 위해 우선 북극성을 찾으니 이어 북두칠성이 쉬이 눈에 들어오고 카시오페아자리도 보인다. 가늠해볼 때 동북쪽 하늘이다. 고개를 휘이 돌려가며 천구(天球)를 훑으니 머리 위 하늘에 은하수가 흐른다. 아~얼마 만에 보는 은하수인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빛나는 견우성(牽牛星·Altair)과 직녀성(織女星·Vega)도 반갑다. 함께 간 친구 몇도 별을 보는 듯 거무스레한 실루엣을 움직거리며 두런거릴 뿐 온통 컴컴하게 잠든 초원의 한복판에 서서 한 시간여 별들을 경배하노라니 어느덧 어릴 적 고향 하늘이 머리 위에 와 있었다.

#자고로 월명성희(月明星稀)라고, 달빛만 밝아도 별을 보기 어렵다는데 우리 동네는 서울 근교인데도 내가 대학교 3학년 말에야 전기가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인가, 참 어릴 적 내 고향엔 별들이 무지무지 많이 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철이 새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밤하늘뿐만 아니라 우물과 웅덩이에도 들어와 있고, 개울에는 둥둥 떠내려가다 여울을 만나 부서져선 금빛으로 흘러 흘렀다. 특히 여름엔 땅거미가 깔리기 무섭게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올려다보면 밤하늘 한 복판으로 흐르는 은하수가 금세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고, 저 멀리 좁쌀만 한 것부터 시작해 콩알, 밤톨, 자두, 복숭아, 급기야는 수박만한 별들이 뒤죽박죽 섞여 공중에 뜬 채 몽환적인 쇼를 벌이곤 했다.

비가 오시지 않으면 매일 밤 보는 별이건만 질리지 않은 건 볼 때마다 다른 리듬을 타는 듯 그때그때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어느 쪽에선가 공중을 가로질러 선을 그으며 저만치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곤 개똥벌레불이니 아니니 티격태격하다 이튿날엔 그 또래 조무래기들과 함께 이 그놈을 찾겠다고 어림잡은 곳을 헤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누운 채 동생과 함께 밤하늘 별들을 꾹꾹 눌러 꼽아 가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을 헤다 까무룩 꿈나라로 가던 일이 어제인 듯 삼삼하다.

그런데, 겨울철 별은 여름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오라지게 추워서 그렇지 쨍한 밤하늘이 투명하게 맑아서 별을 보기엔 그만이었다. 겨울철 별보기는 대부분 '둑간 행사(?)'의 한 과정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화장실인 '뒷간'을 우리 계에선 '둑간'이라 했는데 한마디로 똥을 누러 오가는 길에 별을 보았다는 얘기니 그리 향기로운 기억이 아닐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시절엔 배 터지게 먹는 일도 없었는데 왜 그리 자주 둑간엘 들락거렸는지, 그리고 왜 꼭 야밤에 한번은 들러야 했는지 모르지만 엄동에 큰일 보기는 고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머리맡에 둔 자리끼가 탱탱 얼 정도로 추운 데다 둑간엘 가려면 안방에서 나와 대청마루와 부엌을 거쳐 뒤뜰에서도 감나무 옆 닭장을 지나야 했으니…. 더구나 정작 일을 보는 곳도 담장 위로 지붕까지 공간이 휑하니 뚫려있고, 문이란 것도 가마니를 뜯어 세로로 달아 이름만 지은 꼴이라 칼바람이 여린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훑는 지경임에랴. 하지만 하도 일상이 돼서 그런지 엉덩이를 깐 채 쭈그리고 앉아 일을 보노라면 워낙 급한 게 해결되는 것에 집중해서인지 추위조차 깜빡하곤 지붕 밑 틈새로 펼쳐져 있는 별들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맘 깊이 푹했다. 아직 별 이름은커녕 별자리가 뭔지도 몰랐지만 어린 대중에도 여름철보다는 엄청나게 별이 많다는 건 분명히 느꼈을 정도니까. 국민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겨울철이 아니면 사계절 익숙한 북두칠성과 북극성, 카시오페아 외에 삼형제 별이 뚜렷한 오리온은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고, 은하수도 겨울철에 더 화려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같이 풍성한 별빛 때문이었을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둑간 일을 마치는 대로 안방으로 되짚어 가다말고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 여기저기를 둘러보곤 했었으니-.

#나의 별 사랑은 노래로도 내 심장에 박혀 있다. 나 말고도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작은별'이란 동요를 배운지 60년 넘은 지금까지도 어린이처럼 부르는 내가 신기할 정도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

이 노래는 모짜르트가 프랑스 민요를 변주해 만든 곡조에 윤석중(尹石重)선생이 가사를 붙인 것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멜로디가 특징이어서 어린이들도 쉽게 배울 수 있다.

[* 원래 곡 이름은 '아, 어머니 들어 주세요'를 따른 12개 변주곡 C장조(12 Variations on a French song 'Ah, vous dirai-je, Maman' k.265)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Twinkle, Twinkle, Little Star'라는 가사를 붙여 부르며 인기를 얻었고, 이 때문에 '반짝 반짝 작은 별 변주곡'이란 이름이 붙게 됐다.]

요즘 같으면 한글은 엄마 뱃속부터 떼고 이미 유아원부터 영어도 자유자재로 쏼라 쏼라 대는 판이라 천치바보 소리를 듣고도 남을 일인데, 국민학교에 들어가 맨 먼저 배운 게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였던 시절이라 이렇게 간단한 동요마저 '고(高)학년'에 드는 4학년이 돼서야 배웠다. 이 노래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작은별'도 있는데 이 역시 애송하고 있다.

'반짝 반짝 아름다운 작은별들/ 구슬같이 어여쁘게 빛나요/ 저녁 하늘 달도 없이 캄캄한데/ 금강석을 깔아논 듯 반짝거려요 소곤소곤 사이좋게 노는 별들/ 무슨 얘기 그리 재미날까요/ 호랑 햇님 성난 얼굴 들기전에/졸지말고 어서 어서 놀다 가세요'

이 '작은별'은 앞의 노래와는 반대로 곡을 지은이는 그 유명한 홍난파(洪蘭坡)선생으로 분명한데 작사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홍난파 선생은 '고향의 봄', '퐁당퐁당', '햇볕은 쨍쨍' 등의 동요도 작곡했는데, 이 노래는 1929년 만들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적엔 배우지 않아 몰랐다가 여섯 살 아래 막내 여동생이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부르는 걸 듣고 익히게 됐다. 귀엽기 짝이 없는 여동생이 손동작과 함께 깜찍하게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그래선지 나는 모짜르트의 '작은별'보다 홍난파의 '작은별'을 더 좋아한다. 이번 몽골 별보기 때도 대여섯 번이나 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지금까지 별을 보면서 가장 황홀경에 빠졌던 것은 2008년 7월 초 백두산에서였다.

등산대를 이끌고 국내외 산을 다니면서 틈이 날 때마다 하모니카를 곁들여 우크렐레 연주로 대원들의 산행을 북돋워 '산상의 연주자'로 이름 난 산악인 윤치술 대장과 함께 했던 그 밤, 그 별들의 향연은 아직도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윤 대장이 한ㆍ중 수교 직후부터 백두산에 꽂혀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고 전문 트레커로 활동한 이래 '환갑(60번째) 트레킹'을 한다며 함께 가자고 초청해 따라나선 길이었다. 지금은 근처에 공항도 생겼고 육로 교통도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백두산은 한국인의 대(大) 로망인 '한민족의 성지'가 아닌가. 그러니 제대로 산행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산기슭을 놀이터 삼아 자란 촌놈의 배짱이라도 믿고 냉큼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 때는 바야흐로 백두산을 찾아 천지를 '알현(謁見)'하는 붐이 일고 있었고, 간단한 산행 후 천지에 이르는 이른바 북파(北坡) 코스가 일반적 옵션이었다. 하지만 윤 대장이 개발한 서파(西坡)코스는 중국 땅인 서쪽에서 올라 분화구의 울퉁불퉁한 가장자리를 오르내리며 천지를 오롯이 보고 느낄 수 있어 점점 인기가 늘고 있던 터였다. 특히 천지의 가장자리 트레킹은 북한 쪽 풍경도 한껏 눈으로 품을 수 있는데다 곳곳에 흐드러진 백두산 들꽃을 친견하는 호사까지 누리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우리는 서파에서도 더 남쪽부터 시작하는 남파(南坡)코스를 택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리오. 남파코스는 북한과 중국의 영토 표시를 하는 경계비 가운데 하나인 4호 경계비가 있는 북한 쪽 관명봉으로 오르는 산행이어서 그때까지만 해도 허가되지 않고 있었는데 윤 대장이 새로운 코스 개발을 위해 추진을 감행한 모험에 동행한 것이었다. 감시 중인 북한 병사가 툭하면 소리치며 다가와 제지하는 통에 덤으로 짜릿한 긴장까지 느꼈기에 더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백두산 별을 본 것은 남파에서 트레킹으로 서파에 도착해 왕지(王池)에서 야생화 탐방을 한 뒤 근처에 있던 텐트 숙소에서였다. 왕지는 청나라의 전신 후금(後金)을 세운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전설이 서려 있는 여진족의 성지였던 곳으로 해발 1500m쯤에 위치한 고원 늪지. 백두산에 자생하는 1800여 가지의 야생화 가운데 대부분이 자라고 있어 '천상의 화원'이란 별칭에 걸맞게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가 온통 꽃 대궐이었다.

중국 당국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왕지에 데크로드(deck road)를 설치하고 서파 산문에 가까운 왕지 근처에 숙소용 텐트촌을 만들어 밤중에도 별 보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었다. 일행들과 단체로 저녁을 먹은 뒤 텐트 밖 공터에 있는 데크에 윤 대장과 둘이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노라니 그때까지 보았던 별들과는 차원이 다른 '별(別)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 검기보다는 차라리 짙게 검푸른 하늘을 수박만한 별덩이들이 싸인볼(signball)처럼 둥둥 떠다니고, 그 사이 사이로 온갖 크기의 별들이 고무줄에 달린 듯 멀어졌다, 가까이 왔다를 반복하며 어떤 때는 좌우로 흔들흔들 입체 쇼를 계속 해댔다. 가뜩이나 서울 출발 전부터 백두산을 보리라는 기대감으로 꽉 찼던 머릿속에 이 엄청난 황홀경의 감동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찰나에 터질 것만 같은 흥분에 온몸이 절로 들떠 올라 나도 마치 별이 되는 것 같았다. 내가 하도 감탄을 연발하며 넋을 놓고 있는 걸 보고 윤 대장이 슬그머니 텐트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진즉 이럴 줄 알고 형님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라며 45도짜리 이과두주(二鍋頭酒)를 내민다. 우리들 사이에 '수류탄'으로 통하는 이놈이 자그마치 다섯 병이다. 이럴 때 쓰는 문자가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렸다! 다른 안주가 무슨 소용이랴, 댓바람에 한 병을 털어 넣었다. 7월이라고 해도 백두산엔 봄꽃이 핀다. 그래서 밤중엔 꽤나 춥다. 윤 대장은 원래 산행 도중엔 술을 안 마시는 원칙주의자이다. 그럼에도 내 기분을 맞추느라 한 모금 시늉을 했다 . 나머지는 죄다 내 차지였다. 별에 취하고, 술기운이 차오르니 별들의 군무(群舞)가 아까보다 훨씬 역동(力動)한다. 추위는 고사하고 밤공기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 밤이 새고 나면 1442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 천지를 끼고 15km가량 '데꾸보꾸' 트레킹을 할 참이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우리는 새벽 3시 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삶이 신산하고 강퍅할수록 별을 보아야 한다. 사위가 새카만 밤에 먹물보다 진한 어둠 속에 몸뚱어리를 던져버리고 나면 외레 영혼은 맑아지고 투명해진다. 온갖 짜증과 성냄, 화딱지가 짙은 어둠의 붓질로 지워지고 오롯이 남는 건 맹물같이 무미한 명징일 뿐이다. 바로 이때, 죽은 듯 잦아든 숨소리조차 감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거기엔 철저한 어둠에서 비켜선 푸른빛이 도는 아스라함이 비단처럼 천구(天球)를 덮고 있고, 수없이 빛나는 금강석(金剛石)들이 쉼 없이 윙크를 보내고 있으리니 무엇이 서럽고,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어느 순간 한껏 경배하는 몸짓으로 두 팔을 벌려 하늘을 껴안으면 어느 결에 허튼 몸 구석구석 별빛이 스며들어 내가 별이 되고, 별이 내가 된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진한 응어리가 녹아내려 눈가에 촉촉이 별빛을 받아 반짝이면 철학보다 더 깊은 심연이 몸 안으로 들어와 앉는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별빛을 흠뻑 마시면 만 리 길도 한걸음에 날 수 있다. 나는 '별바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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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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